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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de-to-Measure

정재연

K-93_005, 종이에 레터프레스 인쇄, 42 x 59.5 cm, 2022 (No edition)

정재연은 우리가 사회적으로 합의되었다고 믿는 역사와 문화의 정체성에 질문을 던지며 통사와 통론의 가장자리에서 간과되거나 소외되는 개인의 경험이나 가치관을 주제로 영상, 퍼포먼스, 설치, 판화 등 다양한 매체의 작품을 선보여 왔다. 한때 중앙박물관으로 사용되었던 조선총독부 건물에 대한 사적 기억을 다룬 개인전 《로스트 코너》(아트 스페이스 그로브, 2018), 《로스트 코너-메모리 아카이브》(세마창고, 2019)와 화재로 소실된 것으로 알려졌다가 20세기 말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서 우연히 발견된 대동여지도 목판 원본을 소재로 한 전시 《K-93》(청주미술창작스튜디오, 2022)을 비롯해 효창공원 자리에 있었던 조선 최초의 골프장에 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가상 복원한 코쇼엔 골프 코스를 작품으로 선보였던 최근의 기획전 《고고학》(갤러리 더씨, 2023)에 이르기까지, 정재연은 단선적이고 일원화된 역사관의 바깥에 존재하는 미시사 속의 엇갈리는 감각들을 포착하고 시각화해 보는 이들에게 과연 당신이 알고있는 역사의 토대는 얼마나 단단한 것인지 질문을 건낸다.

(우) K-93_001-003, 종이에 레터프레스 인쇄, 42 x 59.5 cm, 2022 (No edition)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내러티브를 바탕으로 다매체를 활용한 설치 작품을 주로 선보이던 작가의 전작들에 비해 이번 전시 《Made-to-Measure》는 한층 간결한 방식으로 구성된다. 이번 전시의 주를 이루는 작품은 작가가 레터프레스로 찍어낸 판화와 에칭 작품으로 시각적으로 어딘지 익숙하게 느껴지는 이미지들을 고전적 방식으로 재연(reconstruction)한다.

(우) MTM_001, 스폰지, 천, 종이에 실크스크린, 가변설치, 2023

판화 속 이미지가 참조하는 두 개의 지도가 있다. 하나는 1861년에 제작된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이고, 다른 하나는 17세기 후반 페르디난드 페르비스트(Ferdinand Verbiest)가 북경에서 간행한 곤여전도[i]이다. 당시 기준으로 가장 정확하고 방대한 정보를 담고 있었던 두 지도는 작가의 손을 거쳐 파편화되고 변형되어 예술 작품의 자격으로 전시된다. 사실 정재연이 소환하는 것은 두 지도를 둘러싼 가장자리의 이야기이다. 한 시대의 응집된 세계관을 드러내는 ‘지도’라는 유산은 그 지도를 공유하는 다수에 의해 기준이자 표준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나와 타자의 거리를 가늠하고 그 경계를 구분 짓는 객관적 지표의 상징인 지도는 시대와 제작자의 관점에 따라 끊임없이 수정되어왔고 모두에게 적용될만한 완전한 표준이 되진 못했다. 정재연은 《Made-to-Measure》를 통해 이 불완전하고 납작한 표준들을 해체하고 재구성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시각화한다.

K-93, 종이에 실크스크린, 레일, 목재, 가변설치, 2022

1층에 전시된 작품 〈K-93〉[ii](2023) 시리즈는 대동여지도 목판의 일부를 네거티브로 재구성해 레터프레스로 찍어낸 복제 이미지들이다. 파편화된 지도 속 산길과 물길의 이미지는 위칫값을 추정할 수 없이 추상화되어 시각 패턴으로 소비된다. 다량 복제된 〈K-93〉의 이미지를 원단 삼아 의상의 블록 패턴처럼 재단해 설치한 작품은 조금 이례적인데, 특정 집단과 시대의 표준 지표를 상징하는 지도의 도상을 사용자(작가)의 필요와 기호에 맞게 자르고 붙여 평면에서 입체로 확장 가능한 새로운 차원의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방식이 흥미롭다. 2층 전시실에는 대항해 시대에 바다를 건너와 중국에 머물던 벨기에 선교사 페르비스트가 제작한 세계지도 속에 등장하는 동물 삽화들을 소재로 한 에칭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는데 이 동물들은 산해경 속 상상의 동물들을 연상시킬 만큼 실제 동물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작가는 이 생경한 동물의 이미지를 지도라는 맥락에서 분리해 재단용 룰렛, 백신, 보이저(Voyager)호의 궤도 등 지도 밖의 세계에서 소환한 이미지와 짝지어 제시하며 당대에 도상이 가졌을 가치를 무력화시킨다. 비슷한 맥락에서 16~17세기 유럽에서 실제 코뿔소의 모습으로 알려져 있던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의 작품 〈코뿔소〉(1515)의 이미지 역시 경험한 적 없는 대상에 대한 상상적 표현이 판화를 통한 대량 복제라는 방식을 통해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는 과정을 시사한다.

Face Value, (좌) 잉크젯 프린트 (우) 종이에 에칭, 42 x 59.5 cm 2021 (edition 1/3)

이번 전시의 제목 《Made-to-Measure》는  패션 분야에서 주로 사용되는 표현으로 표준 치수로 제작한 의상 블록(Fashion Blocks)들을 입는 이의 체형에 맞게 규격을 조정해 완성하는 맞춤 제작 방식을 뜻한다. 《Made-to-Measure》는 다양한 문화권의 경계를 넘나들며 살아온 정재연이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확인하고자 펼쳐 든 지도 속에서 발견한 불완전성에 대한 보고이며, 이를 극복하고자 유효 기간이 지난 지도에 자신만의 흔적을 개입시키며 작가만의 새로운 예술적 인장을 만들어 가는 과정의 기록이다. 이 과정에서 파생된 각각의 작품들이 따로 또 같이 정재연의 다음 행보를 안내할 믿을만한 길잡이 역할을 해 주길 기대해 본다.

New year’s day, 종이에 레터프레스 인쇄, 42 x 59.5 cm, 2023 (No edition)

[i] 곤여전도(坤輿全圖)는 세계지도를 뜻하는 말로 ‘곤여(坤輿)’란 큰 땅, 곧 지구를 뜻한다. 지금의 지도와는 차이가 있지만 남극과 북극, 아메리카, 아시아, 유럽, 오세아니아가 비교적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고 여러 대륙에 살고있는 동물들을 상상하여 그려넣었다. 지도에는 원숭이, 고래, 기린, 타조, 사자뿐 아니라 인어, 용, 유니콘을 닮은 도상도 등장한다. 

[ii] 조선 후기 화재로 소실되어 원본이 남아있지 않다고 전해지던 대동여지도 목판 121개 중 일부가 1995년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서 발견되었다. K-93은 발견 당시 미분류 유물로 목판에 적용되었던 임시번호이다. 이 때 발견된 대동여지도 목판 11장은 2008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갤러리가비
서울시 용산구 한강대로52길 37
02) 735-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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