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3. 19 – 6. 21 | [VISIT] Space K
맨디 엘-사예

전시 전경 (1)
코오롱의 문화예술 나눔공간 ‘스페이스K 서울’은 오는 3월 19일부터 6월 21일까지 맨디 엘-사예(Mandy El-Sayegh, b.1985)의 개인전 《테레사, 이후(For Theresa)》를 개최한다. 맨디 엘-사예는 말레이시아에서 태어나 중국계 말레이시아인 어머니와 팔레스타인계 아버지 사이에서 성장했다. 어린 시절 영국으로 이주 후 런던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는 작가는 다문화적 정체성과 비주류 위치에서 형성된 시선을 바탕으로 자료 수집과 편집을 활용한 아카이브 기반 설치 작업을 전개해 왔다. 그러면서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여 온 제도와 분류 체계가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배제해 왔는지를 질문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흩어진 이미지와 파편화된 텍스트를 수집하고 재배열하는 작가 특유의 방식으로 구체화된다. 신작 9점을 포함한 30여 점의 작품으로 구성된 이번 전시는 견고해 보였던 기존 질서에 균열을 내며 새로운 서사의 가능성을 제안한다.

전시 전경 (2)
맨디 엘-사예의 리서치 기반 작업은 서로 다른 문화적 맥락 안에서 지식과 교육의 체계가 어떻게 시각 이미지로 치환되는지 탐구한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한국의 박물관과 고서점, 벼룩시장 등을 직접 찾아다니며 수집한 고지도, 서예, 지폐 등 다양한 인쇄물
을 작업에 활용한다. 작가는 이러한 자료들을 수집하고 편집하는 아카이브 방식을 통해 물질적 흔적들이 권력의 형성과 유지에 어떻게 기여해 왔는지 살핀다. 전시장 곳곳에는 지도와 책 등 지식의 파편들이 작가의 개인적 기록과 교차하며, 거대 서사 속에서 지워
졌던 개인의 기억을 다시 불러낸다.

전시 전경 (3)
전시 제목 《테레사, 이후》는 한국계 미국인 예술가 차학경(Theresa Hak Kyung Cha, 1951~1982)을 참조한다. 작가는 파편화된 언어와 기억을 통해 역사 속 여성들의 서사를 엮어낸 차학경의 저서 『딕테(Dictee)』를 작가 작업의 중요한 출발점으로 삼는다. 차학경이 흩어진 언어의 파편들을 엮어 역사 속에 가려진 목소리를 기록했듯이, 맨디 엘-사예는 수집한 자료를 겹치고 덧대는 ‘봉합’의 방식으로 기록에서 간과된 개인들의 이야기를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넷-그리드 (아틀라스), 2026, Oil and acrylic on linen with collaged and silkscreened elements, 235 x 225 x 4.5 cm

넷-그리드 (아틀라스), 2023, Oil and acrylic on linen with collaged and silkscreened elements, 235 x 225 cm
전시 공간 전반에 등장하는 <넷-그리드(Net-Grid)> 시리즈는 맨디 엘-사예가 2010년부터 이어오고 있는 대표 작업으로, 작가의 작업 방식이 집약된 연작이다. 작가는 수집한 재료와 오브제, 다양한 텍스트를 실크스크린으로 인쇄한 뒤 그 위에 격자무늬(Grid)를 그려 화면을 구성한다. 여기서 ‘넷(Net)’은 흩어진 이미지 파편을 포착하는 장치이며, ‘그리드(Grid)’는 추상회화의 질서를 상징하는 구조적 틀을 의미한다. 작가는 평면성을 강조해 온 모더니즘 회화의 형식을 의도적으로 중첩하고 흔들어 질서 정연한 기록 속에 감춰진 불안정한 감각들을 드러낸다. 이때 그리드는 정보를 담는 매개인 동시에 실체를 가리는 ‘베일’로 작동한다.

체화작용, 2026, Wood and glass vitrine, (Artist materials used to create the exhibition), 160 X 85 X 125 cm
맨디 엘-사예의 작업은 파편화된 기록들을 수집하고 재구성하는 독자적인 아카이브 방식에서 출발한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서재 공간’은 이러한 작업 방식이 시각적으로 구현된 장소로, 학문에 대한 열망과 기물 수집의 욕망을 반영했던 한국 전통 민화 ‘책
가도’를 참조한다. 작가는 이 공간에 지도와 의학, 예술 서적 등 자신의 주요 관심사가 담긴 자료들을 모아 지식과 정보가 선택되고 배치되는 과정을 드러낸다. 특히 유리 진열장 작업인 <체화작용(Metabolism)>에는 이번 전시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쓰인 사적 기록과 오브제들을 배열했다. 관람객은 이 공간에 머물며 일상의 잡동사니가 예술의 문맥 안에서 소화되고, 새로운 형태로 추앙되기도 하는 과정을 엿볼 수 있다.

전시 전경 (4)
개인적인 경험과 기억은 맨디 엘-사예 작업에서 중요한 모티프다. 설치 작품 <심리적 자기방어(Psychic Self-Defence)>는 회화와 영상, 의복, 텍스트가 결합된 공간 설치 작품이다. 작가는 푸에르토리코와 팔레스타인 해방운동 사이의 연대라는 역사적 맥락 위에
무예와 관련된 아버지의 개인적 기억을 겹쳐놓는다. 1970년대 팔레스타인에서는 태권도를 비롯한 무예가 공동체의 연대와 자기방어의 상징적 실천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전시장에 설치된 무술 도복 차림의 마네킹은 자신을 지키려는 보호 의지를 시각화한다. 여기에 차학경을 비롯해 억압에 맞서 목소리를 냈던 시인과 사상가들의 글귀가 함께 배치된다.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시작된 이 글들은 작품 안에서 함께하며 개인의 기억을 더 넓은 역사적 맥락 속에 놓는다.

세계의 명화 (발화), 2026, Oil and acrylic on canvas and linen with collaged and silkscreened elements, 210 x 150 x 4.5 cm

세계의 명화 (정본), 2026, Oil and acrylic on canvas with collaged and silkscreened elements, 212 x 164 x 4.5 cm
<세계의 명화(Grand Collection of World Art)> 연작은 차학경이 『딕테』에서 시도했던 다층적인 언어 실험을 시각적 이미지로 확장한 작업이다. 작가는 한국의 한 고서점에서 발견한 『세계의 명화』라는 책 표지에서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그랑드 오달리스크(Grande Odalisque)> 이미지를 포착해 이를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화면에 옮겼다. 프랑스 신고전주의 회화의 대표작이 한국의 헌책방까지 전해진 경로를 떠올리며, 서구 중심 미술사에 내재한 위계 구조를 작업 속에 드러낸다. 또한 인물의 시선을 확대해 그동안 관찰의 대상이었던 여성을 응시의 주체로 전환한다. 이 과정에서 서구 회화 도판과 한글의 조형적 파편이 하나의 화면 안에서 겹치면서 새로운 이미지로 구성된다. 이러한 시도는 파편화된 기록과 이미지를 엮어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내려 했던 차학경의 방법론과 맞닿아 있다.

화이트 그라운드 (배신당한), 2023, Acrylic on canvas with collaged studio debris, 235 x 225 x 4.5 cm
전시장 바닥에 설치된 라텍스 작업은 전시 공간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피부’처럼 만든다. 바닥에는 종이신문이 깔리고 그 위를 라텍스로 코팅한 형태로 구성된다. 작가는 고무 농장에서 일했던 어머니의 기억에서 영감 받아 라텍스를 작업의 재료로 사용한다. 라
텍스가 마르면서 수축하고 변색되는 특성은 상처받기 쉬운 신체의 연약함을 떠올리게 한다. 하루 만에 사라지는 일상의 뉴스는 얇은 라텍스 막 아래에 덮여 또 다른 표면을 이룬다. <화이트 그라운드(White Grounds)> 시리즈에서도 이러한 신체의 흔적이 드러난다. 하얀 젯소로 덮인 화면은 모든 것이 지워진 듯 보이지만, 그 아래에 있던 이미지와 텍스트가 희미하게 비쳐 나온다. 분홍과 푸른 색조가 피부 아래 멍처럼 서서히 떠오르는 듯한 장면이다. 여기서 흰색은 단순한 공백이 아니라 여러 이미지와 기억이 겹겹이 남아있는 자리로 읽힌다.

전시 전경 (5)
높이 9m에 이르는 전시장 한 면에는 여러 캔버스가 겹겹이 배치되며 벽 전체를 채운다. 작가는 한국의 고지도부터 근현대의 지도 자료들을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교차 인쇄하고 그 위에 그리드를 그려 우리가 익숙하게 받아들여 온 경계의 개념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화면 곳곳에 등장하는 화폐 이미지는 글로벌 네트워크 속에서 순환하는 가치의 기호로 지도 이미지와 함께 배치된다. 작가는 이처럼 세계 곳곳의 일상과 역사에서 발견되는 지도와 화폐 같은 구조화된 매체들을 반복적으로 등장시켜 단일한 의미로 환원되지
않는 복합적인 해석의 가능성을 드러낸다.

전시 전경 (6)
이번 전시에서 맨디 엘-사예는 수집과 재맥락화의 과정을 통해 우리가 쌓아 올린 질서 아래 가려진 목소리들을 드러낸다. 작가는 파편화된 기록과 서사를 ‘봉합’이라는 독자적인 방식으로 엮어내며 흩어진 존재들을 다시 연결한다. 이는 모든 것을 하나로 규정하
려는 시도가 아니라, 상처 입은 역사를 보호하고 단절된 관계를 회복하려는 열린 태도에 가깝다. 이번 전시는 이미지의 파편을 수집하고 재배열하는 맨디 엘-사예의 아카이브 작업을 통해 개인과 사회, 인간과 시스템이 맺고 있는 관계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전시 전경 (7)
맨디 엘-사예(Mandy El-Sayegh, b.1985)는 말레이시아에서 태어나 현재 런던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7년 런던 웨스트민스터 대학교에서 학사 학위를, 2009년 런던왕립예술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작가는 2019년 치즌헤일 갤러리(Chisenhale
Gallery)와 2025년 네덜란드 보이만스 반 뵈닝겐 미술관(Museum Boijmans Van Beuningen) 등에서 개인전을 개최하며 역량을 인정받았다. 2017년 샤르자 비엔날레(Sharjah Biennial)와 2023년 LA 카운티 미술관(LACMA) 등 단체전에 참여했으며 영국 테이트 미술관(Tate)을 비롯해 LA 카운티 미술관, 샤르자 미술재단(Sharjah Art Foundation) 등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이번 전시는 배우 소유진이 오디오가이드에 재능기부로 참여해 전시 안내를 돕는다. 소유진의 목소리가 담긴 오디오가이드는 작품 옆에 설치된 QR을 통해 작품 이미지, 해설 텍스트와 함께 감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