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GALLERIES] SUN GALLERY
2022. 10. 19 – 11. 19
이숙자
이재언 (미술평론가)
우리 한국화는 재료나 화풍으로 구분할 때 수묵화와 채색화로 구분된다고 중등교과서에도 나와 있다. 둘 다 우리의 소중한 문화 전통의 근간이다. 그러나 한동안 우리 화단에서는 채색화를 왜색이라 하여 폄하하곤 했다. 우리 현대사의 굴곡 속에서 생긴 과도한 피해의식의 결과일 수도 있다. 우리 고대 고분벽화에서도 채색이 우리 전통인 것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전통 민화나 인물화 등도 역시 채색이 기반이다. 수묵과 채색은 서로 상호보완 관계를 이루면서 문화적 시너지를 일으킬 수 있는 소중한 문화적 자산이다. 우리가 문화강국을 이룬 데는 보다 대국적인 문화의식과 안목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정말이지 심각한 자기부정이 될 뻔했다. 물론 눈부신 색감을 장점으로 한 채색화는 오늘날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우리 전통을 제대로 이해하고 재창조하고자 하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변화무쌍한 세계와 다양한 미의식에 대한 요구들이 채색화에 눈을 돌리게 한 배경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한 긍정적인 변화가 거저 온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많은 오해와 폄훼 속에서도 동요되지 않고 묵묵히 자기의 작업을 질적으로 도약시키는 데만 역점을 두어온 작가들이 있었음이다. 이 대목에서 한국화가 이숙자(80)의 이름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천경자라는 걸출한 작가가 현대채색화의 개척자였다면, 이숙자는 채색화에 한국이라는 국적을 보다 명료하게 각인하고 질적으로 한 단계 더 도약시킨 장본인이다.
그가 본격적인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초반부터였다. 처음부터 채색화, 그것도 색감의 깊이와 발색이 탁월한 암채(岩彩)를 사용하였다. 암채는 보통의 튜브 안료처럼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광물을 분쇄하여 만들어진 미립자 분말을 아교 용매와 혼합하여 그리는 번거로운 과정의 것으로서, 채색하고자 하는 색 수만큼의 복잡한 절차가 필요하다. 고가의 값도 값이지만 복잡하고 까다로운 과정 때문에 완성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소요된다. 물론 수련 기간도 길다. 중도에 한 번쯤은 쉽고 간편한 다른 재료를 시도할 수도 있었겠지만, 힘겨운 길임에도 불구하고 암채를 고집하였다. 암채만이 갖는 깊이와 기품이 있고 우아한 색의 세계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작가가 1999년에 북한을 방문하여 직접 남포시 덕흥리 고분벽화를 답사한 적이 있었다 한다. ‘남북평화미술전’에 참여하면서 기회를 얻었는데, 1500년 전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생생하게 살아 있는 색을 보고서 느낀 것이 많았다 한다. 채색화는 결코 남의 것이 아님을 절실하게 깨달았으며, 더 큰 자신감과 책임감으로 작업에 매진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가 인고의 길을 운명적으로 택한 것은 작가로서의 자존심만이 아니라, 교수로서의 책임감까지 작용했기 때문이 아닐까. 오랜 수련 기간을 거치면서 작가는 80년 제29회 국전에서 ‘작업’이라는 제목의 모내기 장면 작품으로 영예의 대상을 수상했다. 당시 국전은 스타덤에 오르는 최고의 관문이었다.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여러 가지 주제와 소재의 그림을 그렸지만, 작가에게서 발견되는 한결같은 특징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다움의 미’를 추구한다는 점이다. 세월 속에 혼이 깃든 사물이나 활력으로 가득 찬 삶의 현장, 훈민정음과 같은 정신문화의 단면, 소나 보리밭 등의 토속적인 정서가 가득한 풍경 등 다양한 주제와 소재가 ‘우리’라는 공동체의 신화와 삶, 산하 등으로 수렴된다.
특히 ‘우리’ 의식은 작가의 기념비적인 백두산 그림에서 절정을 이룬다. 많은 작가들이 백두산을 그렸다. 백두산 천지의 웅대한 장관에서 감동과 전율을 느끼지 않을 작가는 없다. 작가로서의 에너지와 결기가 어디서 온 것인지 작가는 백두산을 보고서야 확신을 갖게 되었다. 한민족이 흥할 수밖에 없는 원천도 바로 그것의 정기임을 느낀 것이다. 백두산이야말로 그를 필생의 각오로 그리고자 하는 열망에 사로잡히게 한다. 150호를 8폭이나 이어 붙인 15m에 가까운 초대형 작품 ‘백두산 천지’의 경우 1991년 시작하였지만, 2001년에야 완성시켰다. 너무도 웅장한 거작이다 보니 중간에 중단은 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이밖에도 2000년 시작하여 2001년에 완성한 ‘백두산의 새벽’, 2000년에 착수했다가 2016년에야 완성한 ‘백두성산’ 등도 ‘백두산 천지’에 버금가는 대작들이며, 형언하기 어려운 감동을 담고자 분투한 역작들이다.
신성한 영산을 화폭에 담는 데는 스케일도 스케일이지만, 보다 각별한 미적 태도로 접근하는 것이 작가다운 것이기도 하다. 1970년대 말부터 ‘보리밭 작가’로 화명을 날려 온 작가는 보리 이삭의 알갱이 하나를 그리는 데도 각별하다. 붓으로 그리기 전에 보리 낱알의 생김 그대로 도톰하게 부조로 성형을 한다. 그린다기보다는 만들었다는 것이 더 합당한 표현일 것이다. 이는 작가가 백두산을 그리 대하듯, 보리 낱알 하나조차도 경건하고 진지하게 대한 결과이다. 그야말로 혼을 불어넣는 그림이 아닐 수 없다. 작가는 평생 제작한 그림들을 꼼꼼하게 관리하고 있는데, 거의 600점에 이르는 것으로 밝혀져 있다. 인고의 암채화, 그것도 소품이 거의 없는 대작 중심의 작업이라는 점이 실로 경이롭다.
세간에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은 아무래도 ‘이브의 보리밭’ 연작이 아닐까. 이는 발표 당시나 지금이나 자못 충격적이다. 보리밭을 배경으로 나신이 등장한다는 정황 자체가 낯설면서도 무언가 기묘한 환상을 주기도 하다. 하지만 제목에서도 암시되듯 그것은 원죄 이전의 순수하고 이상적인 존재다. 무구의 자연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거울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부끄러움을 비롯한 잡다한 감정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 말이다.
물론 작가는 그 어떤 설명도 하지 않는다. 온전히 독자에게 던져진 텍스트는 독자의 것임을 묵언으로 역설하고 있다. 어떤 점에서는 보리밭 연작의 강렬한 인상 때문에 여타의 양식들이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했을 수도 있다. 1970, 80년대 젊었을 때의 작품들을 보면 어느 것 하나 쉽게 그려진 작품이 없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다. 반세기 넘는 창작의 세월 동안 어떻게 그토록 흐트러짐이나 굴곡이 없이 한결같이 작업을 해 왔는지 경이로울 뿐이다. 그는 이제 채색화 범주를 넘어 회화 전체에서도 귀감이 되는 작가라 해도 이의가 없을 것이다.
선화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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