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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을파손죄

2022. 4. 7 – 6. 4
김을

Drawing Machine_mixed media_165×55×56㎝_2018~2022

“그림 이 새끼”
작업 곳곳에 등장하는 글귀가 심상찮다. 뿐인가? 그림을 집어던지는 사람, 날아가다 철퍼덕 처박혀 벽 타고 흘러내리는 그림, 그림과 아웅다웅 핏발 선 눈겨룸, 잘 마무리하다 냅다 긋고 찢은 캔버스까지…유독 그림에 모질고 야멸차다. 노골적인 푸대접에 대놓고 찬밥이다. ‘화가 맞아?’ 싶다.

“나는 그림을 정말 못 그리는 화가다”라며 하루에 12시간씩 그림을 그린다. 멋들어진 선, 공들여 빚은 모양새, 그럴듯한 깊은 의미? “그냥 장난이다. 그리기 싫으면, 그려주는 장난감 만드는 거지. 하하-“란다. 회화에, 미술에 염증을 느낀 이들을 치료할 초강력 항생제가 등장했다. 종로구 OCI미술관(관장 이지현)에서 4월 7일 막을 올리는 김을 개인전 《김을파손죄》

A Painter Holding a Rolled Burlap_mixed media_16×9×7㎝_2018

심상찮은 제목 《김을파손죄》는 ‘김을 개인전’이란 수식어도 굳이 따로 달지 않는다. 그가 미술 세계를 짓는 핵심 재료는 ‘정직’. 그럴듯한 거짓을 파하고, 자기만의 드로잉적 사고와 태도를 따른다. 김을의 드로잉은 굳은 틀을 ‘깨는’ 것. 거짓에 물든 회화는 ‘감옥’에 가둬야 한다. 합해서 김을파손죄. 그래서 이번 전시의 아이콘은 틀을 깨는 망치와, 뻥을 잡는 감옥이다. 영문 제목도 EULLdalism(김을+반달리즘)이다.

Twilight Zone Studio 2022_mixed media_dimensions variable_2022

들어가기도 전.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건 영락없는 집 한 채. 전시장 안에 건물이라니? 등불까지 반짝이는 오두막 안은 작업의 흔적과 수많은 작품으로 빽빽하다. 김을의 작업실을 통째로 가져다 놓았다. 이름하여 TZS(Twilight Zone Studio). 황혼이 질 때의 모호함과 몽롱함, 무엇이든 떠올릴 수 있고, 그 어떤 것도 될 수 있는 중간 지대, 자유 지대가 바로 그의 작업실이다.

Twilight Zone Studio 2022_mixed media_dimensions variable_2022

좁지만 볼거리로 가득한 TZS. 수십 개의 낡은 망치가 벽 하나 가득이다. 이번 전시의 핵심 아이콘 중 하나인 ‘망치’. “Drawing is Hammering”이란 표어와, 동명의 전시 작품에서 보듯, ‘드로잉은 두드려 깨는 것’이란 메시지를 잔뜩 걸었다. 그리는 것만이 드로잉이 아니다. 묵은 생각을 틀을 깨는 것이 드로잉적 태도라는 것.

Twilight Zone Studio 2022_mixed media_dimensions variable_2022

잔잔히 흐르는 밥 딜런의 음악 사이로 붉은 팻말의 흰 글씨 “아트조심”이 선명하다. 그림은 수단일 뿐. 애지중지하고 신성히 받들면, 결국 괴로워지고 종속될 뿐이다. 그림에 먹히지 않으리란 그의 다짐이 가훈처럼 내걸려 번뜩인다.

Toys_mixed media_dimensions variable_2006~2021

화가라 해서 늘 그림이 좋은 건 아니다. 김을은 그림이 싫을 때 장난감을 끈다. “네~에. 그냥 장난이에요-오. 그림 그리기 싫을 때. 이놈 을 끌면, 그림 그려주니까. 하하-“ 예술가적 고민을 장난감으로 승화한 센스. 관객이 직접 끌고 타 볼 수 있다.

Jail_mixed media_205×180×200㎝_2022

전시장 2층 중앙은 감옥이다. 까만 쇠창살 사이로 흰 캔버스가 비뚜름히 서 있다. 다른 캔버스를 밟고, 어딘가 불만스러운 몸짓으로. 그러거나 말거나 벌을 받아야 한다. 진실되지 못한 회화는. 낮게 달린 어두컴컴한 낡은 조명이, 회화의 개과천선을 기다리며 홀로 묵묵히 내리비출 뿐이다.

빈티지 그린이 가득 눈에 들어차는 소품 섹션. 300점에 달하는 수많은 조각과 오브제, 드로잉이, 재미와 의미를 1+1으로 던진다. 짐을 빼고 텅 빈 작업실 미니어처. 캔버스와 씨름하는 인형. 아기자기 귀여운 모양새와 깨알 같은 디테일로 소장 욕구에 불을 지핀다. 그러면서 예술가의 황량한 고뇌와 쓴 다짐이 함께 솔솔 우러난다.

A Weeping Bird_wood, styrofoam, paper clay, paint_290×70×250㎝_2022

높고 환한 공간에 우뚝 선, 커다란 새 한 마리. 마치 그리스 고전주의 조각상이 잠깐 앉았다 간 듯 둘레에 층층이 단을 낸 뽀얗고 가지런한 사각기둥 좌대. 사람의 얼굴을 한, 하얀 새 한 마리가 올라앉았다. 얼굴을 알아볼 순 없지만, 부리와 같은 코가 솟아 있고, 무엇보다 커다란 눈물 한 방울이 당장에라도 떨어질 듯 맺혔다. 새(乙) 한 마리는 곧 작가 김을(金乙)이다. 전시장 곳곳에서 새가 된 그를 볼 수 있다.

커다란 방 한가운데 드리운 한 줄 쇠사슬. 위태로이 매달린 낡고 거친 전등갓. 미니어처로 꾸민 나무 테이블을 쓸쓸히 비춘다. 서부시대 미국 어느 거리를 연상케 하는 황량한 거리. 모래땅 위에 낡은 건물 몇 채가 줄지어 섰다. 머리가 없는 사람, 떨어져 나뒹구는 문짝, 주인 없는 마구간. 당장에라도 빠질 듯 기울어 걸린 “TZ STUDIO”간판과 몇 마리 외로운 들짐승만이 희미하게 숨 쉰다. 작업에 임하는 작가의 태도와 정신, 각오를 황량한 거리로 시각화했다.

Midnight Meditation in 2015_watercolor on paper_26×19㎝ each, 361pcs_2015

전시장 메인 로비에 스튜디오를 고스란히 가져다 놓았다면, 3층에는 그의 2015년을 통째로 펼쳤다. 글씨와 그림과 풍경과 온갖 기기묘묘한 표현으로 다음 장면이 늘 궁금한 361점의 액자가 벽면 사방을 몇 겹으로 휘감는다. 때로는 분노하고, 종종 다짐하고, 가끔은 한숨 쉬며 무게도 잡는다. 등락이 뚜렷한 한 해의 리듬을 따라가며 관객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의 사계절을 대입하게 된다. 술을 하지 못하는 작가가 무리하는 바람에(!) 4일이 비는 것이 포인트.

Self-Portrait 2019_watercolor on paper_23×18.6㎝_2019

4월 23일(토) 오후 3시, OCI미술관 전시장에서 ‘작가와의 대화’ 행사가 열린다. 웃음과 숙고를 동시에 주는 살아있는 작업들 사이에서, 김을 작가와 직접 정담을 나눌 수 있다. 또한 바쁜 직장인들을 위해 ‘야간 전시 투어’ 행사도 준비했다. 5월 27일(금) 오후 7시, 김을 작가가 전시장을 돌며 관객을 직접 안내한다. 행사 참석 및 전시 관람 무료. 전시 기간 6월 4일(토)까지.

OCI미술관
서울시 종로구 우정국로 45-14
02-734-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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