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2. 23 - 3. 30 | [GALLERIES] Gallery JJ
닉 슐라이커
“현존과 부재, 은폐와 폭로의 율동적인 교체만이 시선을 깨어 있게 한다.” –한병철, 『아름다움의 구원』
갤러리JJ는 2024년을 맞이하여 자유로운 형태의 색면추상 회화로 삶의 다양한 이야기를 전하는 미국 작가 닉 슐라이커(Nick Schleicher, b.1988)의 국내 첫 개인전을 개최한다. 작년에 있었던 갤러리의 그룹전 <Untitled_Plane, Layer>를 통해 한국에서는 처음 그의 작업이 소개된 이후, 키아프 등을 통해 독특한 감성의 색채 작업으로 주목받아왔다. 이제 갤러리JJ는 신작을 중심으로 새롭게 제작한 독특한 형식의 삼면화(Triptych)와 아치형 버티컬 작품, 대형 작품 등을 총망라하여 33점의 회화 작업을 한 자리에서 선보이면서 슐라이커 작품세계의 새로움과 의의를 들여다보고자 한다. 이에 이번 전시는 사실상 한국에서 열리는 작가의 첫 데뷔전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닉 슐라이커 Nick Schleicher, BJA-CRSH, 2024, Acrylic, gel gloss, glazing medium, interference, fluorescent and glow pigments on linen wrapped panel, 35 x 31in (88.9 x 78.74cm)
작가는 자신이 속한 주변 세계를 기반으로 사물이나 찰나의 순간 혹은 대중문화와 미술사 등에 영감을 받아, 색면회화에서 오브제 작업까지 다루면서 색, 회화 매체 및 공간에 대한 탐구를 한다. 그는 일상의 다양한 주제, 감성적 내러티브를 색으로 치환하여 소통하고자 한다. 거울처럼 주위를 반영하는 매끄러운 표면은 아름다운 색상의 조합을 토대로 지층처럼 쌓인 색채의 스펙트럼을 품으며, 흔들리 듯 불규칙한 가장자리와 부드러운 곡선을 띤 프레임 간의 조화는 슐라이커 회화가 지닌 시각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마주하는 거리와 시점, 빛에 따라 새롭게 변하고 일렁이는 마치 사물 같은 회화는 결코 단조로움을 거부한다. 그것은 색면추상 그 자체로 아름다운, 회화적 나르시시즘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작업 내부에 잠복한 문화, 사적 순간의 내밀함 등의 풍부한 레퍼런스들은 때로 미묘한 암시가 되어 다양한 영역의 해석과 상상으로 작품을 돌아보게 만든다.
이번 전시<Cloud Wave>는 다양한 형태의 셰이프트 캔버스(Shaped Canvas)로 구축한 색면추상회화로 이루어진다. 전시 제목인 ‘Cloud Wave’는 관객이 작업에 붙여준 별칭에서 가지고 왔다. 실지로 작품 틀의 불규칙하고 유기적인 형태는 관객들로 하여금 마치 베개를 닮거나 파도가 휩쓸리는 모습, 푹신한 구름을 연상하게 한다. 특히 전시는 이러한 매체적 특성은 물론 시간을 압축한 감각적인 ‘색’에 집중하고자 한다. 작가에게 있어서 지나간, 덧없지만 순수했던 특정의 순간들은 보는 것만큼이나 손에 닿는 촉감과 느낌, 냄새, 맛 등 감각으로 기억되며 이는 색채로 소환되어 나타난다.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작품들은 2023년 작가에게 일어난 주요 사건들, 특정 순간들에 기인한 색상 팔레트로, 가령 멕시코 여행으로부터 떠올려진 색상의 조합으로 이루어지거나 하는 것들이다.
표면 아래 색층이 머금은 빛과 더불어 마치 전시장 공간을 맴도는 구름인 양 리드미컬하게 돌출된 부조 같은 형태들은 전통적인 회화 방식과 다소 다르게 공간을 점유하여 공간 자체를 변형시키고 있다. 주위 환경과 작품이 결합하여 만들어내는 동적인 에너지로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전시는 다시 한번 슐라이커 작업만의 독특한 매력을 확인할 수 있다.
닉 슐라이커 Nick Schleicher, BRT-WVE, 2024, Acrylic, gel gloss, glazing medium, fluorescent and iridescent pigments on linen wrapped panel, 11 x 14in (27.9 x 35.6cm)
/Form_확장, 장소
이처럼 회화가 환경으로 확장되면서 전시장은 단순한 공간을 넘어 하나의 의미 있는 ‘장소’로 구현된다. 살펴보면, 일상의 수많은 레퍼런스를 담은 슐라이커의 작업은 회화와 조각의 경계를 넘어선 사유로부터 출발한다. 작가는 ‘색’을 매개로 세상을 감각하고, 이를 영롱하고 촉각적 물질성을 지닌 색면추상회화로 때로는 회화와 사물이 교차하는 오브제 시리즈로 구현한다. 이때 작가는 회화 역시 단순히 평면이기보다 사물로 인식한다. 그의 회화는 종종 그림의 통상적인 엄격한 사각의 틀을 벗어나 원, 반원, 아치형 등 다양한 모양의 셰이프트 캔버스로 이루어지며, 이때 제한된 틀 바깥으로 밀려나온 안료가 마치 지층처럼 불규칙한 윤곽으로 테두리를 형성하여 그림에 리듬과 생동감을 더한다. 곧 회화는 프레임 너머의 공간으로 확장되며, 관객을 둘러싼 현실 공간에 개입한다. 이는 회화의 범주를 재인식하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닉 슐라이커 Nick Schleicher, ICE-TRE, 2024, Acrylic, gel gloss, glazing medium, fluorescent and iridescent pigments on linen wrapped panel, 11 x 14in (27.9 x 35.6cm)
작가가 사는 세인트루이스에는 ‘세인트루이스 대성당(St. Louis Cathedral)’을 비롯하여 성당이 많고 유명한 ‘게이트웨이 아치(Gateway Arch)’도 있다. 유추해보면, 추상적인 틀의 형태들, 특히 아치형 형태가 서핑보드인 듯, 산인 듯 혹은 성당의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인 듯 현실의 요소에서 파생되었을 수도 있다. 이에 대해 작가는 “어릴 적부터 예배당 공간에 관심을 가진 건 사실이며, 그 공간들이 아름다웠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아치형 창문 모양이 실내 환경의 톤을 바꾸는 방식이 마음에 들었고 갤러리와 미술관의 환경 또한 마찬가지다… 다만 관객이 천천히 시간을 갖고 바라보면서 그림과 자신만의 상호작용을 자유롭게 하기를 바란다.” 몸으로 경험하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장소… 우리가 놓인 현실 또한 추상의 세계가 아닌가? 과거부터 이어져온 작업의 흐름을 살펴보면, 작가의 이러한 회화와 조각, 재현과 추상을 아우르는 매체적 관심이 지속적으로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처음에는 농구공 시리즈와 팝 소품 시리즈 등(2013년) 시카고미대의 과정을 거치면서 졸업과 동시에 꾸준히 실험으로 이어져왔다. 2015년부터 재현을 떠나 미니멀리즘 회화에 영향 받은 색면추상화를 시작하면서 회화 매체의 가능성을 본격적으로 탐구하기 시작하였다. 이당시부터도 손의 흔적을 남기는 가장자리의 불완전한 선 처리 등 작가가 처음부터 미니멀리즘의 정확성과는 거리를 두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단어회화(Word Painting, 2016)시리즈, 아크릴안료를 편 후 말려서 마치 옷감처럼 늘어트린 ‘스킨회화'(Skin Painting, 2017)시리즈와 스티로폼에 채색한 ‘거석'(Monolith, 2018)시리즈를 거치면서 형상과 색에 관한 탐구가 깊어졌다.
닉 슐라이커 Nick Schleicher, MP1-CF1, 2024, Acrylic, glazing medium, phosphorescent, fluorescent and iridescent pigments on linen wrapped panel, 18 x 15in (45.7 x 38.1cm)
/Color_감각, 기억
굴곡진 가장자리를 따라 빛의 반사와 함께 드러나는 안료의 물성, 화면 속 모호하게 아른거리는 색층은 틈새 공간에 빛을 머금은 채 부유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과거 프랭크 스텔라의 조형적 실험으로 대표되는 셰이프트 캔버스 곧 틀의 정형성의 탈피는 동시에 물성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전통회화의 그린다는 개념, 형이상학적 의미는 해체되었다. 슐라이커는 회화의 지지체로서의 캔버스와 표면, 안료의 물성과 적용방식을 오래 탐구해 왔다. 작가는 인광안료나 광택 나는 젤처럼 물성이 강한 매체를 섞은 안료를 밀어서 안착시키는 방식으로 화면이 평평해질 때까지 반복적으로 얇은 층을 쌓아 나간다. 작가의 의도와 즉흥적인 구성이 함께 작용하여 투명하거나 불투명한 색층이 불규칙적으로 생겨나는데, 매끈거리고 반짝이는 안료의 물성이 더해지면서 거울 같은 표면 아래로 모호한 환영적 공간감마저 생긴다. 그것은 색면회화가 지향하는 순수한 색채의 표면을 지나 촉각적 물질성과 함께 사이키델릭한 색채 감성을 지닌다. 작업은 색면추상의 비물질적 특성을 물질로 갱신한다. 더욱이 특유의 선명하고 높은 채도의 화려한 색감과 인공적인 물성은 대중문화에서 오는 생동감과 시각적 유희성마저 느껴진다.
드로잉하고 손으로 잘라낸 틀의 자연스런 형태, 지층의 띠를 이루는 테두리의 선과 붓터치는 손, 몸의 흔적을 암시하듯, 작업은 미니멀리스트의 명료성과 진지함에서 비켜서서 위트를 더하며 보다 정서적이고 인간적으로 다가온다.
닉 슐라이커 Nick Schleicher, NMS-HET, 2024, Acrylic, gel gloss, glazing medium, fluorescent and iridescent pigments on linen wrapped panel, 40 x 29in (101.6 x 73.7cm)
“색은 신비스러운 언어이고 꿈의 언어이며 ‘듣는 눈’의 언어이다” –폴 고갱(Paul Gauguin)
현실이 던져주는 감정을 예술만큼 친절하게 품어줄 영역은 없다고 흔히 말한다. 괴테가 ‘색은 기계론적 분류보다 인간의 ‘감각’과 밀접하게 연관된다’고 보았듯, 슐라이커는 색을 매개로 세상을 감각한다. 작업에 있어서 색채는 인간의 감정을 표출하고 전달하는 매개로 작용하며, 작가는 특히 색상의 조합에 몰두한다. 카펫과 레스토랑의 히터에서 영감을 받은 색들을 조합한다거나 마블 코믹스, 심슨가족 같은 애니메이션, 영화 장면과 앨범자켓 속 색상, 혹은 어렸을 적 가지고 놀았던 장난감 등 자신에게 의미 있었던 것들이 작업에 투영된다. CBB-SLM 등 마치 암호 같은 작품 제목은 그 작품이 유래한 레퍼런스로부터 추출한 이니셜의 조합으로, 작가가 자신의 소중한 순간들을 기억하고 채집하는 단서로 작용한다. 곧 기억 속 재현적 장면은 추상의 형태로 걸러지고 색과 질감으로 번역되면서, 모호하고 진기한 무언가로 바뀌어 나타난다.
기억과 시간의 흐름으로 어른거리는 층들은 드러내기를 망설이는 듯, 단조로움을 거부하고 내부로 측면으로 확장되고 경계를 넘나든다. 우리의 모습이 반사되는 표면은 매끄럽지만 매끄럽지 않다. 숨겨진 내면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제프 쿤스의 ‘풍선개’ 표면의 이음새 없는 매끄러움과는 또 다르게, 깊이를 가지고 유희하고 유혹하면서 상상적인 것의 내러티브가 펼쳐지는 무대가 된다. 그리하여 작품은 깊이와 얕음, 심오함이 동시에 교차한다. 슐라이커의 흔들리는 색층의 회화는 보편적 질서나 영원성을 나타내고자 하는 추상이기보다, 오히려 그러한 영원성이나 항구적인 것에의 질문일 것이다. 반사되는 현상 그 너머, 끊임없이 변하는 불완전하고 유한한 삶, 그 덧없음과 불확실성을 신비하고도 유머러스하게 투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글│강주연 Gallery JJ Director
갤러리J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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