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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근욱: 하드보일드 브리즈

지근욱

임시의 테 001 Inter-rim 001, 2023, Colored pencil on canvas, 160x160cm

여기 정미(精微)하고 섬세한 붓질로 미시세계와 거시세계를 모두 다루는 화가가 있다. 우리는 분자가 무엇인지 볼 수 있어도 원자가 무엇인지 모른다. 원자를 넘어 아원자 입자나 쿼크에 이르면, 이것은 추정 상의 개념이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더 깊이 들어가면, 그것이 파장(wave)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볼 수 없는 세계를 회화로 나타내서 아름다운 형식을 극한까지 밀고 나가는 작가와 마주한다.

상호-파동 001 Inter-wave 001, 2023, Mixed media on canvas, 227x162cm

지근욱은 색연필로 새로운 추상회화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대표 작가 중 한 사람이다. 그 모색은 잠재성에서 구체적으로 현실화하고 있다. 현실은 이번 개인전 《하드보일드 브리즈》를 통해서 더욱 굳건해진다.

교차-형태 001 Inter-shape 001, 2023, Acrylic and colored pencil on canvas, 45x45cm

하드보일드(hard-boiled)란 용어는 문학용어이다. “계란을 완숙하다”라는 뜻의 하드보일드는 그 뜻이 확대되어, 현실을 비정하고 냉엄하게, 때로는 군더더기 없이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문학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 한편, 브리즈(breeze)는 아주 기분 좋게 느껴지는 부드러운 바람, 즉 미풍(微風)을 뜻하며, 우리말로 남실바람ㆍ산들바람ㆍ건들바람ㆍ흔들바람 등으로 번역된다. 보티첼리의 명화 <비너스의 탄생>에서 바람의 신 제피로스가 입으로 불어 비너스를 바다로 보내는 산들바람과도 같다. 이번 전시회에 출품되는 <임시의 테(Inter-rim)>와 <상호-파동(Inter-wave)>, <교차-형태(Inter-shape)> 연작은 캔버스 화면에 색연필로 연한 색의 심층(깊숙한 화면)과 짙은 색의 표층(겉 화면)의 다른 층위(레이어)를 주어서 미묘하게 화합하는 경지를 그려낸다. 어떠한 미학적 수식이나 철학적 담론을 배제하고, 오로지 좋은 그림 자체만을 지향한다는 의미에서 ‘하드보일드’이면서 비정하고 냉엄하기는커녕 극히 온유하고 부드러운 화면과 곡선, 운율을 잘 살려 표현된 ‘브리즈’이다. <교차-형태> 연작은 문학적이고 은유적이면서도 물리학적 저편에서 벌어지는 물질적 진실을 추상화시키기도 한다. 지근욱의 신작에서 양자역학의 미시세계나 우리 은하 밖의 거시영역을 연상해도 틀리지 않는다. 《하드보일드 브리즈》는 언어적으로나 개념적으로는 형용모순을 이루지만, 지근욱의 회화의 세계에서는 절실한 실존의 무게를 더할 나위 없이 잘 표현하고 있다.

학고재 신관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로 48-4
+82 2-739-49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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