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GALLERIES] UM GALLERY
2021.4.17 – 6.5
황영자
UM갤러리는 1990년 8월 청주의 무심갤러리로 시작했다. 2002년 8월 엄은숙 대표는 서울 청담동에 UM갤러리를 개관한다. 엄 대표는 UM갤러리 개관기념 초대전으로 ‘김구림 전’을 열었다. UM갤러리는 김구림을 시작으로 이건용 홍명섭 등 미술시장에서 환영받지 못한 작가들에게 주목했다.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최근 김구림과 이건용은 국제미술계에서 주목받아 그들의 작품들을 해외 유명 미술관에 소장하고 있다. 엄 대표는 국제미술계에서 주목받는 김구림과 이건용을 보면서 “이제 국제미술계에 주목받을 국내 작가들 중에 홍명섭 선생님과 황영자 선생님을 들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엄 대표는 2004년 청주 무심갤러리와 UM갤러리 두 곳에서 황영자 개인전을 개최한다. 그리고 2011년과 2019년에도 UM갤러리에서 황영자 개인전을 개최했다. 그리고 진천 문백 공예마을에 새로 개관하는 UM갤러리 sight_B의 개관전으로 황영자 개인전을 개최한다. 따라서 엄 대표가 황영자 작가를 국제미술계에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진천 공예마을에 위치하는 UM갤러리 sight_B는 3층 주택을 리모델링한 건물의 1층에 위치한다. 1층에는 갤러리 전시공간뿐만 아니라 카페 그리고 아트숍도 있다. 따라서 UM갤러리 sight_B의 전시공간 크기는 서울 압구정동 가로수길의 UM갤러리 보다 작지만 국제미술계를 타킷으로 삼는 굵직한 개인전을 개최할 예정이란다.
UM갤러리 엄 대표는 2019년 황영자의 전작들을 담은 두툼한 도록을 발행했다. 엄 대표는 이번 UM갤러리 sight_B의 개관전인 황영자 개인전을 위해 황영자의 작품들과 작가노트를 실은 소책자를 발행한다. 만약 누군가 황영자의 작품세계에 대해 궁금해 한다면, 황영자의 소책자가 황영자의 작품세계로 들어서는데 매우 유용한 자료라고 할 수 있겠다.
황영자의 ‘나나’를 아시나요?
만약 관객이 진천 공예마을 초입에 위치하는 UM갤러리 sight_B에 당도한다면, 관객은 무엇보다 거대한 황영자 개인전 현수막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현수막에 인쇄된 황영자의 강렬한 그림 때문이다. 이를테면 관객은 노랑 꽃들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인에 빠져들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황영자 개인전 현수막 상단에는 ‘HWANG Young Ja / 나나 展’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나나’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혹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인의 이름이 ‘나나’일까? 혹 그것은 두 개의 ‘나’, 즉 ‘나’와 또 다른 ‘나(분신)’를 뜻하는 것은 아닐까? 만약 관객이 그것을 알고 싶다면, 관객은 황영자의 회화세계로 들어가야만 할 것 같다.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인은 머리에 유럽의 공작부인(孔雀夫人)이 즐겨 쓰는 베일로 알려진 검은색 비단으로 만든 얇은 만틸라(mantilla)를 쓰고 있다. 그리고 머리카락이 돋보이도록 머리에 붉은 장미를 꽂았다. 그리고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인의 눈꺼풀 위에 마치 공작부인의 위상을 상징하듯 푸른색 눈 화장도 해놓았다.
황영자는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인을 그린 그림을 ‘나나’가 아니라 <공작부인>이라고 작명한다. 우리는 흔히 화려하게 차린 아름다운 여인을 비유적으로 ‘공작부인’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화려하고 풍성한 붉은 드레스에 비해 유난히 작은 여인의 두 손은 인형을 들고 있다. 여인의 손에 인형이라니?
황영자의 작업실에는 적잖은 인형들이 있다고 한다. 그 인형들은 다름아닌 황영자가 손수 만든 것이라고 한다. 더욱이 그녀는 자신의 옷을 인형에게 입힌다. 말하자면 그녀는 자신의 옷으로 인형의 옷을 만들어 입힌다고 말이다. 따라서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인의 두 손에 들린 인형의 붉은 원피스 역시 그녀의 붉은 원피스로 제작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황영자는 어린 시절 어머니께서 직접 만들어 주셨던 인형을 가지고 놀았다고 한다. 그녀는 어른이 되어 자신이 직접 인형을 만들어서 가지고 논다. 그렇다! 팔순의 그녀는 지금도 인형을 가지고 논다. 따라서 그녀는 천진난만한 어른인 셈이다. 이 점이 바로 그녀의 작품세계로 들어서는데 중요한 키워드라고 할 수 있겠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1883)에서 정신의 세 단계를 언급한다. 낙타와 사자 그리고 어린아이가 그것이다. 황영자는 정신의 세 번째 단계인 어린아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니체가 말하는 어린아이는 낙타와 사자를 관통한 어린아이이다. 따라서 니체가 말한 정신의 세 단계를 간략하게나마 살펴보아야 할 것 같다.
첫 번째 단계의 낙타는 주인에 대해 절대 복종 혹은 순종(obedience)한다. 낙타는 주인에게 자신의 강인함과 주인을 위하는 마음을 증명하고자 무릎을 꿇어 자신의 등에 많은 짐이 실리기를 바란다. 따라서 낙타의 단계는 나는 누구이며, 무엇이 삶이고, 고통인지를 아는 단계로 정신 변화의 출발점이다.
두 번째 단계의 사자는 낙타가 사자로 변하는 것이다. “정신이 자유를 쟁취하여 그 자신의 사막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낙타는 주인의 말에 무조건 복종하고 순종했지만, 낙타에서 사자로 변신(verwandlung)하면 자신의 의지로 움직인다. 만약 사자는 자신의 권리나 자유를 침해당하게 된다면, 사자는 대항하여 자유를 외친다. 사자는 기존의 가치, 도덕, 규범, 관습, 제도를 파괴하는 힘을 가진 존재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자유의지(will)의 소유단계를 말한다. 따라서 사자는 고독하고 불안하다.
세 번째 단계의 어린아이는 “순진무구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제 힘으로 돌아가는 바퀴이며 최초의 운동이자 신성한 긍정이다.”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는 새로운 시작, 거룩한 긍정의 삶을 만들어 갈 수 있는 단계이다. 삶을 놀이로서 혹은 예술작품으로서 바라보는 인간. 자신의 삶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완성시켜 가는 ‘너 자신이 되는 것(thou shalt)’이다.
자, 원점으로 돌아가 보자. 원점? 황영자의 <공작부인> 말이다. 만약 관객이 황영자의 전작들을 모조리 조회한다면, 그녀가 낙타와 사자를 지나 어린아이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녀는 삶을 예술작품으로 바라본다. 문득 황영자의 작가노트 <나는 그림쟁이이다>(2019)의 서두가 떠오른다.
“나는 그림 안에서 그림과 함께 산다. 그림 속이 내 집이다. 생각 속에서 그림이 나오고 생각을 그리다 다음 그림으로 옮겨지고 또 다른 생각으로 이어지고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그렇게 작품이 태어난다.”
황영자는 삶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완성시켜 나가고 있다. 붉은 드레스를 입은 ‘공작부인’은 바로 황영자 자신이다. 따라서 그녀의 <공작부인>은 일종의 ‘자화상’인 셈이다. 붉은 드레스를 입은 ‘공작부인’은 두 손으로 붉은 원피스를 입은 인형을 들고 있다. 그런데 그 인형이 다름아닌 황영자의 ‘분신(persona)’이 아닌가. 그렇다면 황영자 개인전 현수막에 적힌 ‘나나’는 ‘나(황영자)’와 ‘나(분신)’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인의 작은 손가락들에 화려한 반지들이 끼워져 있다. 그러고 보니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인은 손만 작은 것이 아니라 발도 작다. 와이? 왜 황영자는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의 손과 발을 작게 그려놓은 것일까? 그녀의 답변이다.
“난 손과 발이 작은 여자가 예뻐요. 여자는 나이가 들어도 여성성을 간직하고 늘 아름다움을 추구해야지요. 내 그림의 소파 다리도 3개이거나 아주 짧은데요, 불완전함과 더불어 재미를 위한 것이기도 해요. 완벽한 것보다 언발라스한 것이 더 매력이 있거든요.”
황영자의 ‘섀도우(Shadow)’
“내 마음과 머릿속 지나온 추억이 내 그림의 자궁이다. 어린 시절 나는 우울증을 앓고 있는 어머니 손에 자랐다. 바로 내 밑 3살, 2살 두 자식을 연이어 잃고 어머니는 반 미친 사람처럼 깊은 우울 속에서 살았다. 해만 지면 홀로 연못가에 앉아 한없이 우시던 어머니 모습을 보며 어머니가 물에 빠져 죽을까 봐 너 댓살 짜리 어린 나는 잠도 못 자고 어머니를 지키는 그런 유년시절을 보냈으니 나 역시 일찌감치 내 마음이 고장이 나 있었다.”
위 인용문은 황영자의 작가노트 <나는 그림쟁이이다>에서 인용한 것이다. 그녀의 유년시절 진술은 이번 UM갤러리 sight_B의 황영자 개인전 <섀도우(Shadow)>에 전시된 신작들로 접근하는데 유용하다. 이곳에 그녀의 신작들 중 <그림움>(2021)과 <사(死)자와의 통화>(2020) 그리고 <사(死)의 찬미>(2020)를 간략하게나마 살펴보도록 하겠다.
황영자의 신작 <그리움>(2021)은 땅속에 얼굴을 넣은 여인을 그린 그림이다. 여인은 브라우스와 치마 그리고 하이힐을 싣고 있다. 그런데 여인의 머리는 백발이다. 백발의 여인은 나이가 들어도 여성성을 간직하고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 그녀는 백발이 되어도 여자이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도대체 백발의 여인은 땅속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땅속에는 작은 유골이 있다. 그러면 여인은 땅속에 묻힌 죽은 아이를 보고자 하는 것이란 말인가? 흥미롭게도 여인의 가슴에서 흘러내린 피가 작은 유골을 향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죽은 아이에게 피를 공급해 부활을 꿈꾸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까닭일까? 유골 옆에는 색색의 꽃들이 피어있다.
황영자는 작가노트 <나는 그림쟁이이다>에서 어린 자식을 잃은 어머니를 언급한다. 그렇다면 황영자의 <그리움>은 잃어버린 어린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그리움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황영자는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안타까운 사연을 초현실적으로 그려놓았다. 그녀는 <그리움>에 대해 다음과 같은 작업노트를 적었다.
“아기 울음소리에 눈을 뜬다. 어젯밤 뒤엉킨 머릿속에 꿈으로 얼마나 술렁거렸는지 또다시 새벽이슬 맞으며 무작정 달린다. 네가 누워있는 구름 덮인 골짜기 그 자리에 네가 있어야 살 것 같은 세월, 이 세상에서 더 만날 데가 없고,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너를 찾아, 내 눈에는 너만 보이고, 내 귀에는 네 소리만 들려, 이 넓디넓은 산속이 너 하나로 하여 적막하질 않구나. 구멍을 뚫고 들여다볼 수만 있다면 꽃들이 만발한 꽃밭에 누워있다고 생각할 거야 그럴 거야.”
황영자의 <사(死)자와의 통화>는 사자(使者)들이 어깨에 메고 있는 가마에서 전화통화 하는 여인을 그린 그림이다. 여인은 백색 원피스에 백색 면사포를 쓰고 있다. 백색의 드레스를 입은 여인은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인과 마찬가지로 작은 손가락들에 화려한 반지들을 끼고 있다. 여인의 발가락들은 레드 매니큐어로 발라져 있다.
도대체 백색의 드레스를 입은 여인은 누구와 통화하는 것일까? 그녀는 사자(死者)와 통화하고 있다.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죽은 사람과 통화할 생각을 할까? 황영자는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안타까운 사연을 초현실적으로 그려놓았다. 그녀는 <사(死)자와의 통화>에 대해 다음과 같은 작업노트를 적었다.
“나에게 돌아가신 분들과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이 열린다면, 숨겨진 질서로 연결된 우주가
나에게로 보낸 메시지가 있다면, 한쪽 물이 닫히면 다른 한쪽 물이 열린다는 말처럼 그런 기적이 열린다면, 더불어 하나의 입자가 둘로 나뉘어 백만 광년이라는 엄청난 거리를 떨어져 있어도 계속해서 연결되어 있다면, 여보세요… 여보세요…”
황영자의 <사(死)의 찬미>는 숲속의 공주와 12마리 펭귄(penguin)을 그린 그림이다. 숲속의 공주는 백색 침대 위에 백색 드레스를 입고 마치 ‘잠자는 공주’처럼 우아하게 누워있다. 그리고 12마리의 펭귄이 그녀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문득 ‘백설 공주와 일곱 난쟁이(Snow White And The Seven Dwarfs)’가 떠오른다. 그렇다면 백색 드레스를 입고 잠자는 공주는 왕자의 키스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란 말인가?
머시라? 12마리의 펭귄은 무엇을 뜻하느냐고요?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황영자의 회화세계에 등장하는 펭귄은 ‘남자’를 상징한다. 그런데 그녀의 <사의 찬미>에 출현한 12마리 펭귄들은 그녀가 좋아했던 12명의 남자를 뜻한다. 숲속의 공주는 백설 공주보다 남자가 4명 더 많은 셈이다.
뭬야? 백설 공주를 좋아하는 난쟁이는 일곱 명이라고요? 그런데 잠자는 백설 공주에게 키스하는 왕자도 있잖은가. 황영자는 작년에 병에 걸려 죽음의 문턱까지 갔었단다. 그래서 그녀는 죽음을 찬미하는 그림을 그린다. 그것이 바로 그녀의 <사(死)의 찬미>이다. 따라서 그녀는 죽음을 찬미하기 위해 열둘 팽귄(남자)를 불러모은다. 오잉? 그런데 한 팽귄의 가슴에 ‘상처’가 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 팽귄이 숲속의 공주가 상처를 준 남자란 말인가? 그녀는 <사의 찬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작업노트를 적었다.
“나를 어떻게 속이겠는가? 손가락 사이로 물이 새어 나가듯 기운이 빠져나갔고, 나는 더 천천히 걸었고 더 빨리 숨이 찼다. 걸핏하면 이름과 날짜를 잊어 갔고, 나의 노쇠를 비춰주는 무정한 거울이었다. 누구나 태어난 순간부터 이미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는 생각을, 요즘 나는 겪어보지 못한 혼란을 겪고, 누가 이 불확실성을 피해 갈 수 있을까. 죽음은 아무도 예외가 있을 수 없는 평등이 위로가 된다. 나는 이 기회에 내가 내 영혼의 옷을 벗어 버리는 날을 그림으로 그리고 싶었다. ‘녹색의 화원으로 내가 좋아했던 친구들의 배움을 받으며 다음 생애는 어떤 옷으로 입고 올까 생각 중이다.’”
황영자는 죽음의 문턱에서도 다음 생에 어떤 옷을 입고 올까를 생각한다. 그녀는 자신이 좋아하거나 사랑한다고 할 수 있는 ‘그림들’을 UM갤러리에 전시해 놓았다. 그녀의 ‘그림들’은 압축적이고 농밀한 이미지로 표현되어 있다. 그녀의 그림들은 파편적으로 흩어져 있지만, 관객이 그녀의 그림들로 한 걸음 더 들어간다면 서로 문맥을 이룬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류병학 미술평론가는 “황영자의 그림들은 현실과 꿈을 넘나들면서 ‘인간’ 황영자와 ‘작가’ 황영자의 인생에 관한 섬세한 사유의 대화”라면서, 그러나 그 주체는 “작가가 아니라 관객”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그녀의 작품은 절대적인 의미로 닫혀있는 것이 아니라 관객들의 다양한 의미들로 열려있다. 그 점에 관해 류병학 미술평론가는 다음과 같이 평한다.
“황영자의 ‘그림들’은 장대한 스토리의 스펙터클한 자화상으로 아마 회화사상 가장 거대한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그녀의 ‘거대한 자화상’은 그녀 ‘자신이 되는 것’이다.”
UM갤러리 sight_B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공예촌길 89
02 515 39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