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GALLERIES] ELIGERE
2023. 6. 2 – 6. 22
루카스 퍼틸레
루카스 퍼틸레는 아르헨티나 차코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살고 작업하며,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교에서 시각 예술과 그래픽 디자인을 전공했다. 그의 많은 작품에서 작가는 캔버스와 종이에 다양한 기법을 결합하여 지지대의 표면에 다층적이면서도 투명한 효과를 만들어낸다. 아르헨티나 정글의 자연과 모더니즘 회화의 영향을 받은 그는 종종 지역 민속과 마술적 사실주의의 전통을 연결한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무의식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야만적인 어린 시절의 기억의 산물이라고 정의한다.
“주로 자연이에요, 저는 자연의 장막과 미지의 사물에서 영감을 얻습니다. 인간이 설명하거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모든 것들이죠. 이 신비로움을 포착하여 다양한 기법을 통해 그림에 드러내 보이려고 노력합니다. 저의 작업 과정은 보기, 이해하기 그리고 결론짓기라는 세 가지 논리적 시간대를 존중합니다. 이 마지막 단계는 캔버스로 나를 이끌게 됩니다. 미리 그려진 스케치 없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기본적으로 알면서도 공백의 캔버스에 돌아갑니다. 그럼 무의식이 놀이처럼 새로운 작품을 지저귀기 시작하고, 얼룩과 붓질을 통해 새로운 작품이 탄생합니다.”
Lucas Pertile
그 소음은 귀가 먹먹할 정도이다. 우르릉거리는 소리와 울부짖음 사이 어딘가의 강렬한 포효, 귀뚜라미의 현악 부분, 원숭이의 날카로운 소리, 그리고 무한한 음색의 새들의 합창. 아르헨티나 북동부의 정글에는 3천여 종의 식물과 500여 종의 조류가 서식하고, 세계에서 가장 크고 강력한 폭포 중 하나와 습한 열기의 폭염이 있으며, 밤에는 솔직히 무서울 수 있는 곤충 합창단을 자랑한다. 이곳에는 살아 숨쉬는 신화와 같은, 이 차원뿐 아니라 다른 차원의 생물들이 살고 있다. 여기서, 사람들이 라틴 아메리카 문학에서 묘사하는 마술적 사실주의는 단순한 현실일 뿐이다: luz mala, 즉 사악한 빛은 만져질 수 있는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다. Pombero 소악귀는 여러분에게 휘파람을 불며 위험을 경고하고 존재들은 다른 세계에서 우리에게 노래한다.
루카스 퍼틸레는 늪 바닥과 메스꺼운 냄새가 났으며, 잡히면 신음하는 날카로운 비늘을 가진 거친 물고기가 서식하는 Río Negro, 어두운 강의 강변에서 자랐다. 선사시대의 동물들. 그는 벌채용칼로 무성한 덤불을 베면서 길을 뚫어야 했다. 다섯 살 때부터, 그는 집 앞을 흐르는 탁한 물에서 수영을 했다. 같은 나이에, 그는 그즈음 형이 자른 나무줄기를 타고 강을 건넜다. 그는 물 히아신스를 먹었다. 그는 원숭이를 키웠다. 그가 10살이 되었을 때, 그는 친구들과 낚시를 하러 다녔고, 별빛 아래에서 잠을 자거나, 열대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즉석에서 나무껍질과 나뭇가지로 만든 대피소에서 잠을 청하곤 했다.
그의 할아버지가 루카스가 결코 떠나고 싶어하지 않는 신성하고 금지된 공간인 그림 작업실로 그를 처음 들여보낸 것도 그의 어린 시절이었다. 할아버지는 그에게 연필을 주었고, 자신의 그림을 베끼게 했다. 할아버지는 생애 초기에 예술가라는 천직을 찾은 무뚝뚝한 사람이었다. Chaco의 Resistencia에 있는 미술학교는 Alfredo Pertile이라는 그의 이름을 따라 명명되었다. 루카스의 할머니는 난초를 키웠고 그는 여전히 꽃의 신비에 매료되어 있다.
루카스 퍼틸레는 다음과 같이 정글을 그린다. 그림의 색채와 밀도는 소리의 색상과 밀도를 반영한다. 색채는 발포성 고요함과 함께 잔물결을 일으키며 존재감이 넘친다. 그것은 평면내에 포함되어 있고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는 그것을 그의 기억 속에 새기고 있다. 그래서 그는 그림을 그릴 때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는 그것을 그냥 밖으로 내보낸다. 그것은 원시적이면서도 환상적인 내면의 정글이다. 마치 탁 트인 강에서 수영을 하고 나무를 오르면서 자란 아이의 집과 같은.
붓놀림은 자유롭고, 거침이 없으며, 정교하고, 흩어지면서 끌리고, 겹쳐지며, 얼룩과 임파스토가 있다. 마치 여러명의 다른 화가들이 같은 캔버스에 작업한 것처럼 말이다. 무성한 녹색, 오렌지, 푸른색은 육식성이거나 말을 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관능적인 식물과 꽃을 만들어낸다. 마치 초감각적인 현실, 즉 비디오 게임에 속해 있는 것 같다. 다른 우주에서 온 것이거나 어쩌면 새벽과 함께 희미해지는 꿈일 수도 있다. 폭풍이 몰아치는 아침, 혹은 불타는 저녁, 밤, 또는 뜨거운 낮잠시간 동안의 일식. 그들은 시간 밖에 있다.
예술가는 눈앞에 닥친 재앙이나 정글 짐승의 출현에 직면하여 관점을 바꾸고 장소를 숨기면서 장면을 장악한다. 재규어, 원숭이, 카누를 탄 사람들, 유령들이 모두 등장한다.
그가 즐겨 그림을 그리러 가는 곳인 미시오네스 정글 한가운데에는 식물과 개미들이 엄청나게 많다. 딱정벌레는 과충전 상태이다. 타란툴라 거미는 뼈처럼 바삭바삭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진다. 벌레들의 울음소리는 너무나 집요하여 벌레들을 정령으로 착각해도 이상하지 않다. 한번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오두막으로 피신했다. 그는 전갈에 쏘여 팔다리가 잠드는 듯한 느낌을 체험하기 위해 앉았다. 생존은 자연계에 대한 그의 도전이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그것을 그릴 수 있다. 그는 자연계를 캔버스에 붙드는 힘을 얻었다.
María Paula Zacharías, independent art critic
루카스 퍼틸레의 예술
영감을 얻기 위해 약물도취를 하는 예술가의 개념은 그다지 새롭지 않으며 사실은 그 반대일 것이다. 그러나 루카스 퍼틸레는 전갈의 독으로부터 영감을 얻고, 이 경험을 그의 작품의 토대로 만든 내가 만난 첫 예술가이다. 그러나 포효의 합창과 비현실적으로 풍부한 색상으로 들끓는 정글의 오두막에 홀로 앉아 살 것인지 죽을 것인지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은 퍼틸레의 전시회에서 기대할 수 있는 분위기를 훌륭하게 묘사하는 것 같다.
환각, 꿈의 풍경, 환영… 퍼틸레는 자신의 삶의 과정은 잠재의식에 의해 이끌리며, 다른 차원으로의 여행이고, 예술은 그가 그 여정으로부터 복귀하면서 가져올 수 있었던 것에 의해 생성된 결과물이라고 말한다. 정신분석은 확실히 그의 작업에서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그의 작업은 또한 그의 주변세계에 대한 면밀한 관찰에 크게 의존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종종 몽환적인 색상으로 표현되는 그의 마법같은 동식물의 이미지를 볼 땐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많은 작업을 수행하는 장소인 정말로 초현실적인 풍경을 가진 미시오네스 우림의 정글 환경과, 그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관목이 그다지 무성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살기에 열악한 아르헨티나의 차코의 풍경을 떠올리면 그렇게 이상하게 느껴지진 않는다. 그리고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기억이다. 페르틸레는 그의 작품의 많은 부분에 등장하는 원숭이 모습을 일종의 자화상이라고 불렀지만, 이는 그가 어릴 때 집 근처 강가에서 놀 때 따라다니던 원숭이의 기억에 기초하고 있다. 또한 예술역사의 날카로운 인식도 결합되어 있다. 그이 작품에는 야수파와 원시주의,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의 신구상주의와 뉴이미지 운동의 분파의 분명한 반향이 있다. 우리는 페르틸레의 그림에서 발견되는 깊이와 가시적인 현실에 대한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이 확고한 학문적 기반은 아마도 차코의 가장 유명한 예술가 중 한 명인 알프레도 퍼틸레의 손자에게서만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할아버지의 작업실은 젊은 루카스에게 벌채용칼 대신에 붓을 휘두르는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모험을 소개했다.
내부세계와 외부세계, 환상세계의 생생한 결합의 기저에는 또 다른 핵심 요소인 죽음이 있다. 무의식과 함께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유일한 진실’로 예술가들이 묘사한 필멸성은 때때로 해골인물, 유령, 두개골로서 명시적으로 전면에 등장하지만, 그것은 또한 다른 구성요소들의 색상과 생생한 움직임을 강조하고 부각시키는 역할을 하는 어두운 붓놀림으로 배경에 잠복하기도 한다. 보편적인 현실인 죽음은 퍼틸레의 세계에 스며들어 밝은 형태와 감각적인 양식 사이의 틈을 메우고, 비록 우리가 아무리 화려한 꽃과 환상적인 인물에 현혹된 채 인정하고 싶지 않더라도 항상 거기에 있다.
삶과 죽음, 빛과 어둠 사이의 줄다리기는 퍼틸레의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인 것 같다. 종종 가장 생생하고 다채로운 그의 작품 속에서 순수하고 감각적인 기쁨을 발산하는 이미지를 감상할 때 관람자는 작품 구석의 어두운 지점에 시선이 가게 된다. 그림자 조각이나 나무 줄기의 움푹 들어간 곳은 이 모든 경이로운 것들이 덧없이 사라질 운명임을 상기시킨다. 반대로, 보다 우울한 구성들에서는 언제나 하나 이상의 빛이나 색채의 소재가 배열되어 있어 등장 인물과 관람자 모두에게 더 많은 것의 가능성, 희망의 불빛을 느끼게 하는 것 같다.
퍼틸레의 예술을 경험하는 것은 우리를 영원히 그 오두막으로 다시 데려다 주는 한 예술가와 함께 하는 것이다. 그 오두막에서 피부는 욱신거리고 가장 사악한 측면을 드러낸 자연 세계에 포위된 채 우리는 환영이 오기를 기다린다. 그것이 종말의 예고일지 새로운 새벽의 예고일지 알지 못한 채로, 아마도 무관심한 채로…
Kit Maude, Journalist
엘리제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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