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뜰리에아키
임현정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속 풍경을 그린다. 현실에서 겪은 감정과 기억, 사건의 조각들을 상상과 뒤섞어 화면 위에 다시 배치하는 것이다. 손이 가는 대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직관적 드로잉’이 그 출발점이다. 그는 이렇게 완성한 세계를 ‘마음의 아카이브’라 부른다. 정돈된 기록이 아니라 감정과 연상, 꿈의 논리에 따라 끊임없이 다시 짜이는 유동적인 공간이다.
임현정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를 졸업하고 런던 센트럴 세인트 마틴스 예술대학에서 순수미술 석사를 마쳤다. 이후 서울과 런던, 미국 서부를 오가며 드로잉을 바탕으로 한 회화 세계를 다져왔다. 서울 OCI미술관과 아뜰리에 아키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시애틀·샌프란시스코·런던 등 해외에서도 꾸준히 개인전을 이어왔다. 2026년 미국 아티스트 트러스트의 ‘그렉 쿠세라 & 래리 요컴 펠로십’을 받았고, 서울시립미술관 난지미술창작스튜디오와 OCI 레지던시를 거쳤다.
그의 작업은 드로잉에서 출발한다. 유화든 펜화든 모든 그림이 손으로 그리는 드로잉에서 시작된다. 먼저 종이나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을 묽게 푼 ‘아크릴 워시’로 배경을 깔고, 그 위에 펜과 잉크, 파스텔 펜슬로 선을 그어 형상을 세운다. 여기에 유화 물감을 얹어 색과 질감을 쌓아 올린다. 미리 밑그림을 그리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나무나 바위 같은 형상에서 출발해 손이 가는 대로 풍경을 키워 나간다. 이렇게 휴대폰으로 모아 둔 사진과 작업 중 우연히 떠오른 형상이 한 화면에서 만나, 정체를 알 수 없는 생명체 같은 낯선 존재로 자라난다. 작가는 이런 드로잉을 ‘스스로 미처 알지 못했던 이미지를 발견하는 과정’이라 말한다.
임현정의 작업은 2018년 미국 서부로 이주한 뒤 크게 방향을 틀었다. 런던 유학 시절 그는 히에로니무스 보쉬, 피터 브뤼겔 같은 북유럽 르네상스 거장들의 상상 가득한 풍경화에 빠져 있었다. 그런 그가 요세미티와 브라이스 캐년의 사막 지대, 태평양 연안에 직접 서자, 오래전 상상만으로 그리던 외계 행성 같은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작가는 ‘상상으로만 그려오던 세계를 현실에서 마주한 듯한 경험’이었다고 말한다. 이 경험은 미술사 속 풍경과 실제 자연을 하나로 엮는 계기가 됐다.
이번 Kiaf에서 임현정은 미국 서부를 여행하며 쌓은 경험을 담은 최근작들을 선보인다. 부스 한가운데에는 대표작 ‘Bryce Point’가, 그 양옆으로는 종이에 펜과 잉크로 그린 드로잉과 유화 작품이 걸린다. 유타주 브라이스 캐년에서 출발한 이 그림은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옛 산수화 몽유도원도의 시점을 빌려, 관객의 눈이 화면 속을 여행하듯 움직이게 한다. 작가는 관객이 그림 속에서 ‘자신만의 무언가를 발견하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그 앞에서 관객은 정해진 답 대신 걸어 다니는 물고기나 숨은 생명체를 좇으며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만나게 된다.
Balancing Rock, Acrylic, oil on canvas, 91.4×60.9 cm, 2025
Bryce Point, Acrylic, oil on canvas, 101.6×228.6 cm, 2024
North Window, Acrylic, oil on canvas, 91.4×60.9 cm, 2025
Peekaboo Loop, Acrylic, oil on canvas, 60.9×60.9 cm, 2023
Red Dirt Waterfall, Acrylic, oil on canvas, 91.4×60.9 cm,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