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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FSET

젊었을 때 동아리에서 그린란드 원정을 추진했는데 갓 서른이었던 나는 원정대 멤버로 선발되는 행운을 누렸다. 미션은 그린란드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 세 개를 오르고 3주간 스키 캬라반을 통해 거대한 빙하들을 지나 픽업 포인트의 활주로로 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때 식량계획을 잘 못해 버리는 바람에 막판 일정 1주일 정도 식량이 모자라서 매우 고생했는데 다행히 픽업 포인트의 창고에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모르는 오트밀이 있어서 굶는 것은 면할 수 있었다. 경비행기를 타고 다시 아이슬란드에 돌아오자마자 우리들은 허겁지겁 가까운 레스토랑으로 들어가 스테이크를 과도하게 많이 주문하고 그걸 다 먹어치웠다. 잔득 포만감을 느끼며 위스키도 몇 잔 했던 나는 급하게 많은 음식을 한꺼번에 먹은게 탈이었는지 레스토랑 화장실 변기에 먹은걸 다 토해내 버렸다.
배고플 때는 배를 불리고 싶고 목마를 때는 물이 마시고 싶다. 보수라는 가치 반대편에는 진보가 있듯이 자본주의의 반대에는 공산주의가 있다.
보통사람들은 이러한 양극단에 놓이기를 거부하며 그들 사이의 중간 어디쯤에 있기를 선호한다. 극단적인 여름을 경험하고 있는 현대인들은 앞으로 더 많이 10월의 파르스름했던 공기를 그리워 할 것이고 가벼운 재킷을 걸치고 한가하게 산보를 하는 것을 추억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영원히 만나지 못 할지도 모르는 가을은 이렇게 우리들을 외면하면서 기억의 편린이 되어 무심하게 스쳐 지나가고 있다. 사계절이 뚜렷했었다는 말은 사어가 될 것 같은 불안감을 만들어내고 이제는 어쩌면 태극문양같은 모습으로 일 년의 절반은 더운 날 나머지 절반은 추운 날이 될 것 같은 불안감이 진동한다.
상쇄(相殺)라는 개념은 그래서인지 더 흥미롭다. 상반되는 것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어 0을 수렴한다는 뜻인데 앞에서 언급한 중간이 아닌 ‘무(無)’의 상태로 두 개의 가치의 소멸을 의미하므로 대단히 불교적이면서 파괴적이고 심지어 미니멀하다.
나의 지난 10년간의 작업의 키워드들을 살펴보면 분노, 불안, 장애, 균형 같은 네거티브한 언어들로 가득차 있다. 살펴보자면 그 과정들은 나 스스로의 불완전함과의 투쟁이었다. 그 투쟁을 통하여 부정하고 싶은 가치의 반대방향의 중간 어디쯤에 다다르고자 발버둥치는 시간들 이었고 그 미련한 시도의 기록과도 같았다.
남성이 나이가 들면 멜로드라마틱(melodramatic)해지거나 아니면 고약하고(mean) 비뚤어진 노인이 된다고들 한다. 20년 전의 나는 무모하고 대책 없는 자칭 다원주의자였고 10년 전에는 대상이 있는지도 모를 어딘가를 향하여 분노를 표출하는 분노조절 장애자였다.
2024년 1월 내가 사랑했던 그리고 지금도 사랑하는 최고의 미니멀리스트 칼 안드레가 영면에 들었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다른 미니멀리스트들이 상업주의에 경도되어 영혼을 팔고 있을 때 오로지 본인의 미학을 고수하며 관객과의 소통을 최우선하는 진정한 예술가였다.
그를 기억하면서 시작하는 이번 전시는 나의 포스트 미니멀리스트로서의 매니페스토이며 ‘화해’를 희망하는 작가로서의 고해성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과 균형 같은 주제는 여전히 잔존하며 나의 작업의 중요한 요소들로 자리매김 하지만 그 스펙트럼을 조금 더 확장해서 불완전한 해결책을 찾아보려 한다.
적어도 이제 부터는 배고프다고 급하게 먹다가 먹은걸 다 토해 버리는 우매함은 없기를 바라며.

 

2024년 박 지 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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