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GALLERIES] KUKJE GALLERY
2022. 12. 15 – 2023. 1. 29
코라크릿 아룬나논차이
재는 비현실의 공간에서 우리의 기도가 가 닿는 곳이다. 불은 모든 것을 더이상 환원 불가능한 상태로 태워버린다. 세상이 불에 타던 시절을 누가 기억할 것인가?
재는 불길을 끌 수도 없지만 다시 불타오를 준비도 되지 않은, 분류 불가능한 사회의 무정부 상태를 구현한다. 그 재라는 잔여물은 반대항으로, 단체로, 체제로 아직 재탄생하지 못했다.
우주의 진정한 중심에는 우주적 시간이 존재한다. 이는 우리가 둘러앉아 모든 것의 이전과 이후의 시간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 접근할 수 있는 시간이다. 이 이야기들은 창조와 파멸의 순환에 불을 붙인다. 신이 존재하는 곳이 바로 여기다. 우리의 기도가 닿는 공간이 여기다. 이것이 죽음이다. 죽음 너머에 존재하는 것은 결코 지켜지지도, 깨지지도 못할 약속이다. 이는 언제나 우리에게 갈망의 감각을 남긴다. 이 약속 아래 사람들이 모인다.
불에서 재에 이르기까지, 정치 시스템이란 소멸 직전에 이르러서야 자신을 온전히 의식할 수 있게 되는 것인가? 불길에 휩싸인 세상의 역사 속 희생자들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인가? 승자에 의해 구축된 기념비 밑에 흩어진 재는 우리의 패배를 가리킨다.
바슐라르는 “불사조의 특권은 타인의 ‘재’로부터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 재탄생한다는 것에 있다” 했다. 불사조는 재로 이루어진, 재로 뒤덮인 공동체를 피한다. 죽음으로 귀결되는, 심지어 죽음 너머로 귀결되는 자신의 논리를 통해 터무니없는 자율성 원칙을 따르는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생 내지는 새로운 불에 대한 희망이 전혀 없는 공동체, 소각된 내가 “타인의 재”와 뒤섞이는 공동체야 말로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불을 지피고 불을 들여다보면서 이 세상과의, 그리고 서로와의 상징적 관계를 형성해왔다. 우리가 이미지와 상징을 찾기 위해 불 주변으로 모여들 때 그 밑의 땅과 그 위의 하늘이 증인이 되어주었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의미가 탄생할 것이다, 꿈의 형태로. 꿈이 역사보다 훨씬 강력하기 때문에. 꿈은 죽음을 피해 가기 때문에.
국제갤러리는 2022년 12월 15일부터 2023년 1월 29일까지 K3 공간에서 태국 출신의 현대미술가 코라크릿 아룬나논차이(Korakrit Arunanondchai)의 개인전 《이미지, 상징, 기도》를 선보인다. 2021년 국제갤러리 전속 작가로 결정된 후 갤러리에서 선보이는 첫 전시다. 영상, 퍼포먼스에서 회화, 설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며 작업하는 아룬나논차이는 다양한 형식을 정교하게 엮어내며 개인과 사회, 삶과 죽음, 다양한 신념 체계를 아우르는 존재와 의미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을 제시해왔다. 본 개인전은 재와 흙으로 다져진 바닥의 전시장에서 작가의 대표 연작 〈역사 회화〉를 선보인다. 전시 공간을 뒤덮은 검은 흙바닥에는 작가의 기도문이 부조로 새겨져 있는데, 그 기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태초에 발견이 있었다 / 잠을 방해하는 새로운 악몽 / 혼란에 질서를 부여할 필요 / 우리는 외면당한 기도를 통해 이 세상을 만들어 나간다. / 격변 너머에 광휘 있고 / 통합에 대한 향수 / 애도의 땅에서 / 공기에, 잡을 수 없는 것에, 당신을 맡긴다 / 유령은 갖지 못한다, 아무것도
전시장 바닥의 가장자리를 따라 흐르는 기도문 위에는 작가의 〈역사 회화〉 및 〈빈 공간(하늘 회화)〉 작품들이 걸려있다. 2012년에 시작된 〈역사 회화〉 연작은 작가의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군으로, 청바지를 주요 재료로 삼는다. 서양 중심의 세계화와 노동의 역사에 대한 고찰의 일환으로 청바지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작가는 재료를 표백한 후 그 위에 다층의 이미지를 쌓아 올린다. 자신의 신체를 각인하거나 땅의 텍스처를 고스란히 옮긴 이 이미지들은 이후 불이 활약할 수 있는 무대, 불이 연소할 수 있는 재료가 된다. 다시 말해 작가는 이 회화에 불을 붙이는데, 이때 불이란 작업의 과정이자 주제로 거듭난다. 형식과 내용이 뒤섞이는 것이다. 회화에 불을 붙인 후 작가는 문제의 타는 모습을 사진으로 남긴다. 불을 끈 후에는 불타고 남은 회화의 파편, 그 화재의 결과인 재, 그리고 불타는 과정을 기록한 사진이 한데 결합한다. 결국 최종 결과인 작품은 스스로의 생성 과정을 생생하게 품은 양상을 띠게 된다.
‘매체(medium)’라는 미술 용어와 ‘영매’라는 초자연적 대상의 관계성에 관심을 갖던 아룬나논차이는 영혼의 존재와 그들이 우리의 정치 시스템 및 현실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 오래 탐구해왔다. 이 맥락에서 불과 재라는 요소는 작가가 자신의 사적 경험, 주변의 사회적 사건들을 고찰하고 서술하는 방식에 주요한 재료가 되어왔다. 모든 것을 더 이상 환원 불가능한 상태로 태워버리는 불과 그 결과물인 재를 둘러싼 이 여정을 통해 작가는 보는 이로 하여금 창조와 파멸의 우주적 순환구조에 대해 조망할 기회를 제공하고자 한다.
국제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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