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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 음-; 이것은 비극일 필요가 없다

2021.2.25 – 4.11
박경률, 최하늘, 홍승혜

원앤제이 갤러리에서는 오는 2월 25일부터 4월 11일까지 그룹전 《웃, 음-; 이것은 비극일 필요가 없다》 를 개최한다. 박경률, 최하늘, 홍승혜 세 명의 작가가 참여하여 회화 (박경률), 조각(최하늘), 사진(최하늘), 영상(홍승혜), 설치(홍승혜) 작품을 선보일 예정이다. 전시는 작가들이 탐구해오고 있는 각 매체의 전통성과 현대성, 매체특성성과 매체 불완전성 사이에 작품들을 위치시키고, ‘농담’과 ‘희극성’의 맥락 안에서 소개한다.

박경률, 〈그림 3〉, 2020. 캔버스에 유채, 280 x 230 cm

전시《웃, 음-; 이것은 비극일 필요가 없다》 는 예술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시대에 작가들의 취하는 전략으로서의 유머와 희극성을 단순히 즐거운 관람, 또는 온순하고 일시적인 통합을 위한 것으로만 치부할 수 없음을 전제한다. 또한 희극이 규범을 그 기반으로 삼고 있다는 점을 상기하며. 세 작가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유머는 그들이 다루고 있는 매체 규범 바깥에서 읽힐 수 없다는 점에 주목한다. 작가들에 의해 놀이처럼 다뤄지고 있는 극대화되고 비틀어진 매체의 역사, 또는 매체의 견고한 성격들은 유희로 읽히는 것을 너머, 예술의 의미 전환 시기에 그 좌표와 방향을 모색하는 제스쳐로 읽혀야 한다. 또한 작가들의 전략으로 사용하는 유머는 실효성을 상실한 아방가르드 예술의 위치, 또는 한세기 반 동안 ‘전복’이라는 거창한 믿음으로 지속되어 온 예술의 힘의 쇠락을 외면하거나 숨기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보고자 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전시는 그러한 관점에서 이 세 작가의 작품을 통해 그들에게서 보여지는 이 전략이 유효한지, 그리고 그로부터 어떠한 예술 정의의 전환을 모색해 볼 수 있을지 살펴보고자 한다.

최하늘, 〈아빠〉, 2020. 희생된 육신은 액자에 프린트된, C-프린트, 200 x 110 cm

1990년대, 예술의 아방가르드 전략의 실패와 팝아트의 고급화를 목격한 비평가들은 현대예술의 상황을 ‘위기’로 진단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브 미쇼( Yves Michaud, 1944~ )는 이러한 진단에 대해 현대 예술의 위기는 예술 그 자체의 위기가 아니며, 현대 예술 관념의 위기, 그것에 기대어진 믿음의 위기일 뿐이라고 반박한다. 그에 따르면 한 세기 반 동안 나타난, ‘독특한’ 믿음이었던 아방가르드 계보의 시대가 이제 저물어가고 있으며, 이제 우리는 기존의 페러다임을 벗어난 예술이 등장을 기다린다. (그것을 형성해야만 한다.)

그로부터 약 30년이 지난 지금, 현대 예술을 관통하던 페러다임은 완전히 뒤바뀌지도, 온전히 남아 있지도 않은 듯 보인다. 예술이 사회, 정치 변화의 주동자였던 시절을 경험해보지 못한 세대가 예술계 전반을 차지하고 있는 현재의 우리는 때때로 그 시절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가지면서 동시에 연민을 느끼기도 한다. 단일한 유토피아에 대한 믿음 아래 지속되어 왔던 현대미술은 자신이 비판하던 권위와 제도로 포섭되어 시장의 환호를 받는 예술상품으로 전락해 버린지 오래고, 그에 대한 비평은 담론을 형성해내기도 전에 그 다음의 비평에게 자리를 빼앗긴다. 더이상 지속적이고 보편적으로 유의미한 비평의 전략을 세울 수 없게 된 예술은 유토피아의 환각에서 벗어나, 이제 자신의 위치 – 또는 역사 -를 위태하게 만드는 조소와 익살을 전략으로 삼는다. 그리고 그 전략 역시 다시 거대하고 방대한 제도 안에 슬며시 녹아버리고 만다. 예술가는 더이상 사회변화를 이끄는 변혁가가 아닌 ‘노동자’라는 일원이 되고, 작품은 예술가의 삶이 바쳐진 지성의 결정체가 아닌 대중들의 지적 취향에 맞춰진 예술상품으로 조정된다.

홍승혜, 〈 Digital Carpet 〉, 2021. Adhesive vinyl sheet on floor, 가변 크기

전시 《웃, 음-; 이것은 비극일 필요가 없다》 는 이러한 시대에 작가들의 취하는 전략으로서의 유머와 희극성을 단순히 즐거운 관람, 또는 온순하고 일시적인 통합을 위한 것으로만 치부할 수 없음을 전제한다. 또한 희극이 규범을 그 기반으로 삼고 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이 세 작가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유머는 그들이 다루고 있는 매체 규범 바깥에서 읽힐 수 없다는 점에 주목한다. 작가들에 의해 놀이처럼 다뤄지고 있는 극대화되고 비틀어진 매체의 역사, 또는 매체의 견고한 성격들은 유희로 읽히는 것을 너머, 예술의 의미 전환의 시기에 그 좌표와 방향을 모색하는 제스쳐로 읽혀야 한다. 또한 작가들의 전략으로 사용되는 유머는 실효성을 상실한 아방가르드 예술의 위치, 또는 한세기 반 동안 ‘전복’이라는 거창한 믿음으로 지속되어 온 예술의 힘의 쇠락을 외면하거나 숨기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보고자 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전시는 그러한 관점에서 이 세 작가의 작품을 통해 그들에게서 보여지는 이 전략이 유효한지, 그리고 그로부터 어떠한 예술 정의의 전환을 모색해 볼 수 있을지 살펴보고자 한다.

원앤제이 갤러리
서울시 종로구 북촌로 31-14
02 745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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