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RTICLE] Gallery Shilla + Art project and Partners
2020.11.4 – 11.30
박두영
치바 시게오 “ 性을 다하여 天命에 이르다(盡性至命) – 박두영론 “
한국의 현대미술은 1975년 대구에서 시작됐다. 바로 서울로 확산된 것이어서, 대구가 시작이었던 것은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적어도 1970년대까지 대구는 그 주변과 남쪽(예를 들면 경상북도와 부산)출신의 작가들을 끌어들이며 이 미술의 중심지였다. 대구 출신 작가만 들더라도 이른바 “단색화”의 핵심 작가로 꼽히는 이강소, 김구림, 최병소, 영상의 박현기, 그리고 아래 세대의 김호득이 있다.
그런 환경에서 성장한 박두영은 처음부터 현대 미술의 최첨단을 알고 있었다. 가장 본질적인 것을 하지 않으면 이제 미술의 의미는 없다.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1983년 첫 개인전으로부터 30년 이상이 지나 곧 환갑을 맞는다.
1980년대를 돌아오면서 하나의 전환을 맞이한다. 그 동안의 시도들을 일거에 무너뜨리고 더욱 본질적인 지평을 목표로 두었다. “그림”의 방향을 포착해서 이르게 된, 그 시행착오는 대체로 10년이 걸렸고 1990년부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것은 예를 들면 노랑과 파랑, 빨강과 초록의 보색들로 이루어지며, 극히 단순한 가로 또는 세로 줄무늬의 작품들이다. 하지만 그것은 추상 회화도, 미니멀 회화도, 개념예술도 아니다. 다만 주의해서 보지 않으면, 며칠 동안 또는 시간을 두고 보지 않으면, 그의 그림의 질과 내용은 못 느끼고 이해도 못할 수도 있다. 비유를 든다면 그가 한 장의 그림에 쏟아 부은 시간·노동·정신·마음·감각·이성의 총량과 비교될 만한 것을 보는 사람도 공유해야 한다. 다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본다”라는 감히 두려워야 할 행위는 그 총량을 일순간에 납득하기도 한다.
나의 그 이해를 간략히 말한다면 다음과 같다 – 한국 “단색화”의 독창성은 그림을 “이미지”의 일로부터 전혀 다른 위상으로 변환시킨 것이다. 그리는 행위(칠하는 행위)의 자립, 물감이란 물질로 이루어진 평면을 물질로서 독립시키는 것, 그것도 작품을 조형보다는 정신의 일로, 이 세 가지로 구성된 그것까지 미지의 전혀 새로운 예술로의 전환이다. 그 결과 “단색화파” 최고의 작품에서는 물질(물감으로 칠해진 평면)이 물질 자체로서 거기에 존재하는 그 이상의 어떤 의미도 거기에는 없다는 것을 아는 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정신의 빛을 발현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 “성취”에 박두영이 연결되는 것은 무엇일까?
그의 작품을 보면 단순하고 특별하지도 않은데 묘한 설득력이 있다. 그 유래를 보면 거기에 축적된 하루하루의 “행위”가 보인다. 게다가 그리는 액션을 표출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의지가 느껴진다. “그리기” 행동으로 “행위”의 흔적을 지운다. 그것도 그 사실 자체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레벨에까지 이르렀다. 표현을 함으로써 표현을 지운다. 비유하건대 거의 고승의 깨달음에 가깝지만, 좋은 일에 더 범속한 편안함이 있고 속된 것은 없다. 그의 작품을 계속 보고 있으면, 어느새 조용하고 온화한 기분 속에 있게 된다.
그리는 행위(칠하는 행위)의 자립과 정신의 일로 그것을 연결하는데 필수적인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에 대한 답이 박두영에게 나타나고 있다.
[이”답”이 유일하다]라고는 말 할 수는 없겠지만, “단색화파”의 작가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이 지평이 아닐까 한다. 결국 일상의 정신, 날마다의 마음, 매일 매일을 영위하는 태도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다. 생략, 시간 절약, 지름길, 효율화, 이런 종류의 일은 반드시 “작품”과는 서로 상반되는 것들이다.
예술은 정직한 것이다.
황 인(미술평론가) “성리(性理)와 라티오(ratio)”
박두영은 분할의 작가다.
색띠가 그의 작품의 기본을 이룬다. 화면 속에서 동일한 폭의 색띠가 반복되거나 두 개 이상의 폭을 가진 색띠가 반복된다. 하나의 색띠는 이웃한 색띠와 보색대비를 이룬다. 전체적으로 두 개 이상의 색상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화면을 두 개의 보색의 색띠로 나누어 질서정연하게 연속적으로 배치하는 것이 그의 작업이 요체다.
사물이나 사태의 진상을 이것과 저것으로 ‘나누거나 분별하는’ 행위를 동북아의 한자문화권에서는 리(理)라고 했고 고대서양인들은 ‘라티오’(ratio/reason)라고 했다. 19세기에 동북아의 철학자가 서양의 라티오라는 단어를 처음 접하고 리(理 나눈다)라는 단어를 자연스럽게 떠올려 이를 결국 이성(理性)이란 조어(造語)로 엮어낸 것은 절묘한 번역작업으로 보인다.
그 번역을 뒷받침한 사유의 근거는 성리학(性理學)에서 나왔다. 성리(性理)가 곧 이성(理性)이고 이성이 곧 성리였던 것. 대부분의 동북아 사유체계가 시간성(장소성)을 중시하는 데 비해 성리학은 플라톤이나 데카르트의 철학과 마찬가지로 나름대로의 공간성을 추구한다. 그러나 이성과 성리, 이 둘은 같은 듯하면서도 많이 다르다. 나눔(ratio)이 이루어지는 공간이 절대적인 공백성(blankness)을 갖춘 무한대 균질공간인가(이성), 아니면 어느 정도의 적재성(loadedness)을 지닌 느슨한 공간인가에(성리) 따라 이 둘은 구별될 수가 있다.
박두영은 성리학이 우세한 대구 경북 지역이라는 토포스에서 생장했다. 그의 가계는 성리학적 기반과 기풍이 강했다. 그는 성리학적인 세계관을 생이지지(生而知之)로 받아들이고 있는 듯이 보인다.
한편, 그에게 학이지지(學而知之)가 있다면 그의 곁에 도널드 져드를 세울 수가 있다. 도널드 져드는 모더니즘의 최고정점에 섰던 작가다. 모더니즘이 이성의 절대적인 신봉에서 출발했던만큼 그는 철저한 이성(理性 ratio)의 작가다. 1990년대에 도널드 져드가 서울을 방문한 것은 충격적인 사건이었지만 그 영향의 지속은 전국은 물론이고 서울의 화단에서조차 미미했다. 유독 대구 경북지역의 화단에 국한하여 사건성이 강력하게 지속되었다. 학이이지도 어느 정도 생이지지를 갖춘 자에게만 가능할 수 있다는 증거가 되겠다.
도널드 져드가 보여준 작업의 요체는 ‘균질공간’(universal space)의 엄정한 수학적인 분할에 있다. 그는 우선 캔버스에서 몸이 개입할 수 있는 가시적인 장소성을 소거하고 그 자리에 비가시적이고 관념적인 균질공간을 대입하였다. 데카르트가 주창한 균질공간은 추론적인 내관(內觀)의 공간이다. 이 공간은 절대적인 공백성을 지녔다. 어떠한 물질도 물성도 용납할 수 없는 허공의 공간이다.
그리고 그는 이 공간을 이성(理性)을 갖춘 수 즉, 유리수(有理數 rational number)로 분할했다. 유리수라 함은 두 개의 정수(整數)로 된 분수(分數 fraction)까지를 포함한 수의 집합이다. 숫자 대신에 공간의 수직과 수평의 분할을 통해 이성에 대한 절대적 신봉을 드러내었다.
공간의 분할을 구조적으로 가능케 하는 도구는 1이라는 기본단위의 반복적인 확장을 통해 결국 무한대 공간까지 계기적으로 연장될 수 있는 비인칭(非人稱)의 숫자다. 져드가 공간분할에 엄정한 수학적 계산을 적용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리고 작가의 인칭을 소거하고 균질성을 강조하기 위해 모든 재료와 기법을 중성적으로 또 기계적이거나 간접적으로 처리한다. 여기까지가 져드가 사유한 나눔의 세계 즉, 무한한 공간을 관통하는 이성(理性 ratio)의 세계다. 이는 박두영이 학이지지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영역이다.
박두영의 대부분의 작업들이 공간의 분할(ratio)을 택한 점에서는 도널드 져드의 작업과 일맥상통하는 데가 있다. 다만 박두영에게는 보색대비의 강렬한 색면을 유독 강조한 점이 돋보인다. 보색대비에서 하나의 색이 결정되면 대칭이 되는 보색의 색상도 결정된다. 작가의 의지와 무관하게 결정되어버린다는 점에서 이 또한 비인칭의 세계다. 내가 느끼고 감수하는 지각의 세계와 무연하게 이미 비인칭적으로 결정된 인식의 세계라는 점에선 리(理)의 세계와 통한다.
작가는 비인칭적인 합리의 세계를 일상적인 레디메이드적인 조형물에서 찾았다고 한다.
“1992년의 어느 날, 칸을 나눠 보색으로 채운 화면을 내 미술로 전격 채택하였다. 그것은 당시 고민해왔던 주제나 형식 문제에 앞서 “실천적 태도”가 보다 가치 있다는 깨달음 때문이었는데, 이왕이면 기예와 권력 같은 것은 개입되지 않게 하리라는 다짐을 하였고, 그 방편으로 어닝이나 가림막 같은, 거리에서 흔히 보아온 줄무늬를 그림으로 가져오게 된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그 이미지가 회화의 관습을 추궁하는 측면도 있을 뿐 아니라 결국 미술은 “이성(理性)의 도해(圖解)”라는 평소의 소신과 부합되는 것이기도 했다.”
창작과 무관하게 그가 발견한 레디메이드가 결국은 색띠 작업으로 이어졌고 거기에 그가 신뢰하는 리(理)의 세계가 내재하고 있었음을 알아챘다고 말하고 있다. 박두영 역시 도널드 져드와 마찬가지로 엄정한 수학적 계산으로 공간을 분할하며 리(理)를 끌어낸다. 다만 이를 조형적 결과물로 이끌어내는 프로세스가 이성이 아니라 성리인 점이 다를 뿐이다.
성리(性理)란, 리(理)와 더불어 성(性)을 구현하고자 한다. “리(理)가 천지간의 사람과 사물이 공유하는 이치를 통틀어 말하는 것이라면, 성(性)은 나에게 있는 이치다.”라고 설명한 건 주희(朱熹)의 제자인 남송시대의 성리학자 진순(陳淳)이다.
리(理)가 비인칭적이고 균질적인 통합을 꾀한다면, 성(性)은 ‘나’라는 일인칭을 적극적으로 인정한다. 나의 몸이 자리하고 몸을 실감하는 곳은 공간이 아니라 장소다. 일반적으로 공간과 장소는 전혀 다른 차원이라서 겹칠 수가 없는데 성리학은 공간과 장소 이 둘이 겹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성리학에서는 공간과 장소 이 둘이 몸(身)에서 이어진다고 여긴다. 나의 몸을 다스리는 수신(修身)은 리(理)와 성(性)을, 공간과 장소를 이어주고 통합하는 작업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다시 공간의 분할로 돌아가 보자. 고대수학에서는 분수를 나타낼 때 1/2, 1/3, 1/8 등 단위분수(Unit fraction)만을 사용했다. 단위분수를 사용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 중 하나가 전체 속에서 나의 몫이란 개념이다. 수확물을 3명이 공평하게 나누면 나의 몫은 1/3이 된다는 것이 합리(合理), 즉 리(理 나눔)에 합당(合當)하다는 뜻이 된다.
이럴 경우 단위분수의 분자 1은 ‘나’에 해당한다. 즉 이성(理性 ratio)에도 원래는 ‘나’라고 하는 일인칭이 숨어있었음을 의미한다. 분수에 맞는 1이라는 몫이 성(性)이 된다. 이를 박두영의 캔버스에 적용하면 균질공간이라고 불러도 좋을 화면전체 속에서 한 줄의 색띠가 된다. 색띠는 전체화면 속에서 그 폭의 비율만큼의 분수가 된다. 이성을 가진 숫자 분수(分數)는 성리의 몸의 분수(分數)가 된다.
그리고 전체 화면의 균질공간 안에서 색띠의 폭만큼의 성리학이 공간과 함께 거두고자 하는 장소(場所)의 기미가 돋아난다. 그곳이 공간이 아니라 장소임을 드러내기 위해 색띠를 살짝 비균질적으로 처리한다.
박두영은 이런 과정을 생이지지로 받아들인다.
미니멀 아트는 어디까지나 공간의 미술이다. 박두영의 작업은 얼핏 미니멀 아트를 연상케 하지만 공간에서 장소를 돋아나게 하는 작업이 병행이 된다. 장소성을 나타내기 위해 두 가지의 방법이 동원된다. 하나는 몸이다. 몸을 은유하는 것은 붓질이다. 붓질의 주체는 일인칭의 신체다. 신체 중에서도 형이상학적 신체(metaphysical body)인 신(身)이 동원된다. 신은 형이하학적 신체인 체(體 physical body)와 달라서 정제된 일인칭의 기미만 드러낸다. 조심스럽고 절제가 되어있다. 절대로 색띠라는 경계를 넘어가는 법이 없다. 특히 최근에 하고 있는 종이 색띠 작업에서는 물감의 비균질성을 통한 신(身)의 지극한 경지가 잘 드러나고 있다.
또 하나는 색띠와 색띠의 경계를 강조하기 위해 그라데이션을 나타낸 점이다. 균질공간이란 통으로 이어진 공간이다. 하나의(uni) 결(verse)로 된 세계(universe)이라서 경계가 없다. 경계란 장소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장소는 거칠기 때문에 밀도의 차이가 존재한다.
이성과 성리는 비슷한 듯하면서도 다르다. 이 두 세계를 함께 고민하며 작업을 하는 박두영의 분투에 기대어, 동북아가 이어온 사유의 전통이 새로운 조형적 세계의 전개로 열릴 것을 기대해본다.
박두영
박두영은 1958년생으로 1982년 계명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하고 1984년에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1983년부터 2020년까지 대구와 서울 그리고 일본 도쿄에서 14회의 개인전을 가졌고, 80년대부터 96년까지 앙데팡당전, 서울현대미술제, 3월의 서울전, 하드코어-대전 코넥션전, TA-RA그룹전, 캐러밴 대구-파리전 등 소위 컨템퍼러리 아트 계열의 단체전들을 통해 작품을 발표해왔다. 2020년 10월 현재 대구미술관에서 기획전인 <메이드 인 대구Ⅱ> 에 참가하고 있다.
갤러리 신라는 2020년 11월 4일부터 11월 30일까지 박두영의 개인전을 개최합니다. 이번 전시는 1983년도부터 10여회가 넘는 개인전을 발표해온 작가의 신라에서 개최되는 세번째 개인전입니다. 오로지 작업에 대한 일념으로 흔들리지 않고 정진하는 박두영의 작가정신을 엿볼 수 있는 전시입니다.
1980년대의 박두영은 미술 개념을 구성하고 있는 근본적인 것들, 일반적이지만 보편적이지 않은 기호나 개념들, 신체에서 유래한 감각 기제나 가치를 결정하는 일련의 의식 작용을 돌아보는 것이 작가의 역할이며, 작업의 중요한 국면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와 관련된 현상이나 개념들을 견출하고 재구성한 사진이나 설치작업을 선보였다. 이는 미술을 바라보는 관점 그 자체에 주목한 것으로 모두가 공유하는 개념이나 사실들이 개인마다 구축한 세계 모델이나 기호 체계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미술의 일은 이것을 반성하고 재정의 하는 일이라고 믿었다.
1990년대 시작한 새로운 회화의 화면들은 거리의 어닝이나 가림막 같은 것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스트라이프 패턴을 캔버스나 종이 위에 옮긴 작업이다. 화면 안에는 어떠한 메시지도 넣지 않은 작업으로 30여년의 짧지않은 시간동안 이 작업에 승부를 걸고 있다. 수직 수평의 직선면을 분할해서 반복하고 녹색과 적색, 청색과 황색 등 잘알려진 보색쌍을 교대로 배치하거나 색면 단계를 표시한 작업이다. 종이나 캔버스에 수채물감 또는 스스로 개발한 안료 혼합재료로 그린 것으로 처음에는 규칙적으로 분할한 칸에 정한 색을 채워 넣는 방식으로 그렸지만, 점차 배열 규칙은 유지하면서 붓질의 느낌을 살리거나 재료를 겹치고 텃붙이는 등 방법에 따라 변화를 주고 있다.
작가는 오래전부터 미술의 주변을 살펴보는 일과 더불어 인류가 창조한 모든 종류의 이미지들에게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근대적 미술 개념과는 무관하게 인간의 표현 행위들을 보다 본질적인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원시시대의 문양이나 낙서들, 유희나 제의(祭儀)를 위한 도상, 고문자, 수식이나 기하 도형들, 과학이나 철학의 도해(圖解), 종교화, 성적(性的) 상징들, 서사 기록, 도면이나 제품설명서들, 다이어그램이나 통계 도표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형상 기호들이 생산되었고 그것들은 언제나 용도나 기능 이상의 지식과 감각의 지평을 넓혀 왔다고 그는 생각했다. 이 과정을 통해 작가는 미술 작업을 미학적 담론을 뛰어넘는 인간 존재의 보편 가치로 인식해왔다. ‘미술을 위한 미술’에 앞서 그것을 수행하는 태도나 실천 가치에 마음을 둔 선택을 한 것이다.
이번 전시는 캔버스 작업 10여점과 종이작업 5,6점, 지난 ‘8~90년대의 작품 몇점이 전시될 예정이다. 화면 분할하기, 줄 긋기, 채색재료 만들기, 채색하기 등 일련의 작업을 과학자, 수학자 혹은 수행자처럼 반복해 오고 있는 박두영 작가의 의지와 태도를 볼 수 있는 기회입니다.
갤러리신라
대구시 중구 대봉로 200-29
053 422 1628 / 070 4119 1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