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RTICLE] Jason Haam
찰스 리치(Charles Ritchie)는 자신의 집과 내부, 그리고 주변의 교외 풍경을 길게는 수년에 걸쳐 작은 크기로 세밀하게 담아냅니다. 완성에 이르기까지 계절과 빛의 변화, 작가의 생각들과 꾸었던 꿈 등 작가의 끊임없는 관찰과 성찰의 과정이 작품에 응집됩니다. 그의 작품은 익숙한 공간에 대한 따뜻하고 애정 어린 시선을 바탕으로 여러가지 변화의 과정과 상념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기억의 저장고와 같습니다.
Ritchie의 작품은 오랜 시간에 걸쳐 세밀한 과정을 통해 완성됩니다. 작가가 평생에 걸쳐 써오고 있는 일기에서의 습작을 거쳐, 수년간 여러 단계로 그림이 더해지고 채색이 이루어집니다. 여러 생각과 꿈을 꾸준히 기록하는 작가는 종종 그림에 글을 써넣기도 합니다. ‘Landscape with Four Lights’ (2011-2017)는 이러한 작가 특유의 작업 과정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작품으로, 6년에 걸쳐 완성되었습니다. 일기장 속 드로잉에서 출발한 작품은 2012년 첫 단계에서는 꼼꼼한 스케치 위에 수채로 빛의 흐름이 표현되었고, 2015년에는 색채가 더해지며 집, 나무 등 자세한 형상이 드러납니다. 이후 세번째 단계에서 나뭇가지와 그림자 등 어두운 색조의 디테일이 추가되고, 2017년 마침내 색채의 대비감이 강조되며 작품이 완성됩니다. 빛의 흐름에 대한 작가의 관심과 노력은 흰색 물감의 사용 없이 표현기법과 색감의 대조 만으로 명암과 빛을 훌륭하게 표현해내고 있습니다.
Ritchie에게는 꾸준히 일기를 남기는 습관이 있습니다. 단상부터 꿈의 내용, 스케치까지 다양한 기록이 담기는 작가의 스케치북은 작년에 150권을 넘었는데, 특히 여기에 남긴 스케치로부터 작품이 출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마찬가지로 평생 풍경 스케치를 하는 습관이 있었던 영국의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를 떠올리게 합니다. Turner 역시 평생 200여 권의 스케치북을 남기며, 여름에는 여행을 다니며 스케치를 한 뒤 겨울에는 집에 돌아와 작업을 완성했습니다. 좋아하는 작품을 따라 그리는 것은 Ritchie에게 창조를 위한 명상의 과정과도 같고, 완성된 작품이 아닌 그의 다양한 스케치에는 작가가 세상을 포착하는 방식과 꾸준한 연구의 과정이 드러납니다.
같은 공간을 그리고 있으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조금씩 소품의 구성이 달라지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그려진 구도나 사물이 그림의 중심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정물화 전통을 연상하게 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작가는 이탈리아의 화가 조르지오 모란디(Giorgio Morandi)를 좋아하여 일기에 스케치를 남기기도 했고, 사물 이면의 본질을 추구하는 Morandi의 작가적 태도를 닮아있습니다.
Ritchie의 작품을 들여다보면 리치의 그림 속 사물들은 단순한 정물이나 전통적인 도상의 상징성이 아닌, 그의 삶의 궤적이 담긴 개인적인 상징과 기억을 담고 있습니다. 삶과 집을 기록하는 작가는 자연스럽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집안 곳곳 변화하는 오브제를 그림에 담고, 우리는 그의 딸의 탄생과 함께 생겨난 꽃병이나, 할로윈 파티 이후 집안에 추가된 모자 등 작가의 개인적 역사를 함께 엿보는 것입니다.
곳곳에 걸린 천문 지도부터 행성 오브제까지, Ritchie의 집과 스튜디오는 우주와 관련된 소품으로 가득합니다. 이러한 ‘집 안의 우주’는 작가가 내부를 그대로 그리면서 작품에 고스란히 담깁니다. 천체망원경으로 하늘을 관찰하듯 주변 세상의 흐름을 관찰하여 작품에 담고, 많은 창문과 거울을 이용해 반사와 상에 대한 실험을 지속하는 작가의 관점에 대한 탐구는 특히 유난히 작은 작품 사이즈와 다시 연결됩니다. 그의 독특한 사이즈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커다란 물리적 세상을 응집하여 조명하고, 세상의 단면과 흐름을 더욱 주목하여 집중하기 위한 작가의 노력이자, 작가가 제시하는 새로운 세상을 보는 눈인 것입니다.
제이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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