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ULTURAL ISSUE] ARARIO MUSEUM
2022. 8. 24 – 2023. 2. 26
엄태정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의 2022년 가을 기획전으로 마련된 엄태정 개인전 <은빛 날개의 꿈과 기쁨>은 작가의 최근작을 선보이는 한편, 그의 형성기(1960년대)에 제작해두었던 미발표작, 평면과 드로잉, 1970-80년대 작품들을 함께 전시한다.
엄태정은 1960년대 서울대학교 재학시절 철의 물질성에 매료되어 금속조각의 길로 들어섰으며,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오로지 금속의 물질성, 사물의 사유로 공간과 시간에 대한 조형성에 몰두해왔다. 이러한 작업 태도는 그에게 조각가로서 정신적 스승이자 목표가 되었던 콘스탄틴 브랑쿠시(Constantin Brancusi, 1876-1957)를 떠올리게 한다. 브랑쿠시에게 조각은 단순히 작품을 제작하는 일이 아닌 참다운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고도의 정신적 수행이자 명상의 시간으로, 그의 삶 그 자체였다. 브랑쿠시에 깊이 매료된 엄태정에게도 조각은 사물을 사유하고 그 안에 내재된 본질에 다가서며 참다운 나(‘낯선 자’)를 발견하고 깨닫는 과정이다. 그리고 이러한 엄태정의 예술적 기조로 인해 그의 조각 언어는 자연스럽게 대상을 재현하는 구상이 아닌 추상이 되었다.
2000년대 이후 엄태정의 조각은 고요하고 시적이며, 온화하다. 금속은 단단하고 차갑고 무겁다는 인식을 잊을 만큼, 그의 조각은 평화롭고 정돈되었으며 한없이 자유롭게 주변을 포용하며 내면으로 침잠한다. 그러나 조각 내부의 꽉 찬 중량감은 그 자유로움이 결코 가볍지 아니하며 순수한 열정과 강인함이 내포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1970년대 작품들은 이러한 엄태정의 근작들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야외에 설치된 <기 No.3>(1971/2021)를 보면, 구리의 매끈한 표면과 상반된 내부의 거친 질감은 모종의 긴장감을 자아내며 강렬한 에너지를 분출할 듯하다. 엄태정의 조각을 그의 삶 자체를 투영한 깨달음의 결과물로 보았을 때, 1970년대 구리 작품에서 느껴지는 청년 엄태정의 분투는 1980-90년대 <천·지·인> 연작과 1990년대 <청동-기-시대> 연작 그리고 2000년대 알루미늄 작업까지 55년 여에 이르는 작업 여정을 거치며 한없는 고뇌와 예술적 반성을 거듭하고 오늘날 완숙한 어떤 경지에 도달한 것이 아닐까?
최신작 <은빛 날개의 꿈과 기쁨>(2022)은 두 개의 긴 직사각형 알루미늄 패널 사이에 철로 제작된 타원고리 두 개가 수직, 수평으로 끼워진 작품이다. 작가에 따르면 이 두 개의 알루미늄 패널은 ‘낯선 자’의 은빛 날개다. 은빛 날개 사이에 펼쳐지는 무한한 공간에서 태양과 달이 선회한다. 이 공간은 아름다운 영적 에너지의 공간으로 낮과 밤, 모두를 품는다. ‘낯선 자’는 낮에는 그늘을 초대해 산책하고, 밤에는 별빛에 반짝이며 향연을 베풀고 춤을 춘다. 은빛 두 날개를 활짝 펴고 하강한 ‘낯선 자’는 꿈을 꾸며 우리에게 치유의 충만한 기쁨을 베풀고 영혼을 즐겁게 한다. 이렇듯 작품은 물리적 영역 너머 작가가 부단히 추구해온 치유의 시공간으로 관객들을 초대하며, 관객은 스스로 ‘낯선 자’가 되어 그 속에서 사유하고 깨우치는 치유의 시간을 경험한다.
노년의 작가는 여전히 대부분의 시간을 작업실에서 보낸다. 남들이 보기에는 어제와 별다르지 않은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지만, 엄태정에게는 매일이 ‘차이가 있는 반복’이다. 드로잉 작업도 마찬가지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미세한 색과 형태의 차이를 두고 작은 사각형을 채워가는 과정은 그에게 내적으로 충만해지는 풍요로운 반복이며, 하루하루 우주 만물의 진리, 만다라(mandala)에 한층 더 다가서는 참을 수 없을 만큼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
서울시 종로구 율곡로 83
02-736-57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