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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의 방 그리고 화가의 작업실

2022. 6. 15 – 7. 12
남경민

그리기, 화가로서의 삶
지금 나는 평촌의 내 작업실에서 이 글을 쓰고 있다. 평소 이 시간 캔버스 앞에 앉아 작업에 열중하고 있을 내 모습을 떠올려본다. 노련한 시간 관리와 고도의 집중력이 요하는 창작, 매순간, 선택의 연속과 빠른 판단에 대한 반복과 집중은 때로 피로감을 주지만 흡족한 작업의 성과를 누리는 날은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희열을 느끼게 된다. 누군가 곁에 다가와도 모를 집중력과 몰입으로 자기 세계로 걸어 들어가는 창작 생활은 내가 그 누구도 아닌 내 자신으로 삶을 살아가게 해준다. 하루 종일 혼자여도 외롭지 않음과 세상이 떠들썩해도 나만의 세계에서 초연할 수 있는 삶에 익숙해져 가는 것, 이 생활은 캔버스 속으로 깊이 들어가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하는 작가이기에 가능하다. 특히, 작업하는 그 순간의 행위만이 있는 몰입의 순간은 신과 함께하고 있음을 느끼고 기쁨을 느낀다.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주인공 레빈의 풀베기장면은 이 소설의 백미로 ‘몰입’ 에 대한 작가 톨스토이의 견해가 잘 드러나 있다.
……레빈은 시간에 대한 감각을 완전히 잃어버린 채 지금이 이른 시간인지 늦은 시간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이제 그의 일에서 그에게 커다란 만족을 안겨주는 변화가 시작됐다. 한창 일을 하고 있는 동안에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까맣게 잊게 되고 갑자기 일이 쉬워지는 순간이 찾아 들곤 했다. 바로 그 순간에는 그가 벤 줄이 치트가 벤 줄처럼 고르고 훌륭해졌다. 하지만 그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기억해 내고 더 잘 해내려고 애쓰는 순간, 그는 노동의 힘겨움을 고스란히 느꼈고 줄도 비뚤비뚤해지고 말았다……중략) 이 단락은 내 자신이 캔버스 앞에서 작업하면서 느낀 몰입의 기분과 느낌을 잘 설명해주고 있어 감탄해 마지않았다. 대문호 톨스토이 역시 몰입과 집중의 위대함을 농부의 노동인 풀 베기를 통해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그의 집필 작업을 통해 경험한 이 집중의 위대함을 직접 풀 베기에 적용 했으리라 추측해본다. 나 역시 몰입의 순간을 경험하며 삶의 매순간 작업하는 매일 매일이 환희와 축제로 채워지길 영원히 지속되길 원했다. 하지만 그런 완벽한 시간은 그리 오래 가지도 늘 그런 것도 아니다. 오히려 시간 관리에 허술하고 안개 속을 헤매듯 잡념으로 가득 차 “하루 종일 무엇을 그린 거야” 자책하는 날도 있다. 작업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는 집 근처의 산을 오르며 고전 장편소설을 읽기도 한다.

남경민, 회화에 관한 사유의 풍경-두개의 창과 거울속의 풍경, 97×130.5cm, oil on linen, 2015-2017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전, 새로운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는 늘 시간이 걸리는 행위를 해본다. 산에 가거나 녹음이 무성한 나무들이 많은 공원을 거니는 것이 그것이다. 자연은 내가 그를 얼마나 추앙하는지 알 것이다. 내가 자연 속에서 얼마나 즐거움과 기쁨을 누리는지, 내 자신이 한없이 작고 교만 했음을, 일상에서 원치 않는 일들이 일어나면서 권태로움이 찾아올 때 내 열정과 창작의 기쁨이 손가락 사이사이로 빠져나갔음을 자연 속에선 금방 깨닫게 된다. 산 속에 피어있는 풀과 꽃은 “오늘은 이렇게 피고 내일은 저렇게 피어야지” 하거나 나무들은 “가지를 이쪽으로 뻗어야 멋질거야” 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피어나고 지고 자신의 임무를 해낸다. 그들은 포용과 아가페 적인 사랑으로 나를 일깨우며 삶과 작업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을 준다. 작가의 삶이 지치고 힘들 때 나의 영혼이 메마르고 사랑이 다 빠져나간 때임을 어릴 때는 알아채지 못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진심으로 무엇인가를 사랑하게 될 때 자신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강하다고 느끼게 된다. 여기에서의 사랑은 아가페 적인 사랑을 의미한다- 그 때 스스로에 대한 확신과 신념에 가득 차 사랑과 평온함을 느끼게 되고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된다.

지금보다 어릴 때는 나의 그림으로 뭔가를 보여주겠다고,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거라는 확신에 차서 작업에 임하기도 했다. 그러나 생각처럼 쉽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달라진 것과 변화한 것이 있다면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과 마음가짐이다. 호우시절이 영원하리라 믿었던 생각은 모든 것은 끝이 있고 세상의 것들은 오래가기 힘들다는 것으로 바뀌었다. 모든 것은 끝이 있고 소멸하기에 아름답고 소중하다. 어제와 내일이 아닌 지금의 힘과 이 순간의 내적 평화를 소중히 하는 내가 된 것은 심신의 고달픔을 심하게 겪고 난 후 내 작업 행위에 대한 순수한 애정을 갖게 되면서이다. 나만의 시선으로 보고 싶은 세상과 풍경을 그리는 일은 코로나 시대 또한 차분하게 견디는 힘이 되어 주었다. 매일 같은 날의 연속인 듯한 하루하루는 내 앞의 달라져가는 그림으로 어제가 오늘과 같지 않음을, 오늘보다 내일이 조금은 나아질 것임을 무언으로 알려주었다. 지속성과 연속성이 주는 선물의 비밀을 몸으로 체득하고 경험한 것을 몸이 기억을 하는 것은 큰 축복이다.

스타의 방
코로나를 지나오며 많은 사람들이 외로움에 진저리를 쳤다. 외로움이 타인과의 관계에서, 쓸쓸함이 자아에서 오는 것이라면 이 시간 동안 나는 두 가지 모두에서 해방되지 못했다. 그러나 체념하고 묵묵히 버텨낸 지금 코로나가 새로운 다른 지혜를 주었다. 고독을 더 많이 즐기게 되고 혼자 있는 시간을 통해 나 자신을 좀 더 알아가는 시간이 그것이다. 코로나가 오기 전 해부터 세기의 여성 스타의 삶에 관심을 갖게 된 나는 세계인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오드리 헵번의 개인사가 행복하지 못한 것에 주목했다. 마릴린 먼로, 다이애나 황태자비, 재클린의 사적인 삶을 들여다보았고, 세기의 아이콘이 된 그들은 거대한 스타가 되고도 행복하지 못했다. 그녀들 삶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남경민, 오드리 헵번의 방, 116.7x252cm, oil on linen, 2020

스타의 화려함 이면, 숨겨진 베일 뒤의 진짜 모습이 궁금해졌고 그녀들의 방을 그리게 되었다. 헵번과, 백치미와 섹스 심벌로 유명한 먼로는 굉장한 독서광이었다. 그녀가 죽고 난 후 그녀의 책꽂이에 꽂혀있던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 특히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는 그녀의 독서 수준에 놀라게 한다. 이 두 여성의 책과 함께 휴식을 취하는 사적인 모습은 할리우드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세계적인 배우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이런 소탈한 모습은 우리의 모습과도 닮아있다. 그들의 일상 휴식공간을 그리며 세계적인 대스타도 평범한 사람도 어쩌면 일을 마치고 돌아간 사적인 생활에서는 누구나 같은 것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나는 나의 작품에서 이 점을 부각시키고 싶었다. 그것은 평화와 자유, 사랑, 가벼움과 홀가분함을 추구했으며 독서를 사랑했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책 읽는 것을 좋아한 나도 왠지 모를 야릇한 인간적인 일체감을 느꼈다. 코로나 속에서 자유가 자유가 아님을, 함께가 당연함이 아님을, 함께여도 그 전과는 다른 희생과 지혜가 필요함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몇 번의 외출 외에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지나온 코로나 시기 때 그린 그녀들의 공간은 내게 또 다른 삶의 의미와 평화를 가져다 주었다.

남경민, 다이애나의 침실, 112×145.5cm, oil on linen, 2021

먼로와 다이애나가 이와 같은 사적인 평화와 내적인 몰입에 좀 더 충실했더라면, 단 한 사람의 결핍된 사랑이 채워지길 갈망하며 쓸쓸히 삶을 마감하지 않았을 것이며 그녀들의 인생은 달라졌을 것이다. 헵번과 테레사 수녀의 방에서는 물적인 열망을 배제하고 싶었다. 그녀들의 삶이 그 사실을 일깨워 주기에…… 헵번의 삶은 세 번의 결핍된 결혼생활의 실패를 딛고 결핍된 곳으로 찾아가 아가페 적인 사랑으로 승화시키고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갔기에 우리의 기억에서 영원히 살 것이다. 헵번의 방은 스타 이면의 개인사를 캔버스 세 폭으로 나눠 유년, 청년, 노년으로 나누어 고요한 내적인 모습을 표현하고싶었다.

화가의 작업실
2005년 브레인 팩토리에서부터 선보여 왔던 화가의 작업실, 스톤앤워터에서의 나비 채집은 지금도 시도하고 있다. 2000년 초반 어느 날 여느 날처럼 들어선 나의 작업실의 생경함과 마치 나의 내면 깊숙한 곳을 렌즈로 확대해 보는 듯한 작업실 실내 풍경은 내가 좋아하고 동경한 서양대가들의 창작의 산실인 작업공간을 그리게 한 원천이자 동기가 되어주었다. 작업실 곳곳에 놓인 물감과 작업 기물들, 내 취향을 보여주는 음악 앨범과 책, 포스터, 나의 그림, 내가 아끼는 물건들은 작가인 남경민을 은유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모네, 벨라스케스, 르누아르, 모딜리아니의 작업실도 그와 같지 않았을까, 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호기심으로 그들의 작업실 자료를 찾아보며 또는 상상으로 화가의 작업실은 그려졌다. 그림 안에서 이들과 대면하고 조우하는 일은 생생한 즐거움과 흥미로움을 준다.

남경민, 모네의 앱트강 위의 카누와 나비, 89×130.5cm, oil on linen, 2021

그림에 등장하는 나비의 흐름은 화가의 작업실 시리즈에 등장하는 대가들과 이어주는 매개체인 동시에 작가의 자의식을 상징하는 의식의 흐름이다. 어느 날, 작업실 소파에 앉아 잠시 잠들었던 꿈에서 네덜란드 화가 베르메르가 옆집에 살고 있는 이웃이었다. 그래서 그리게 된 그림이 베르메르의 작업실인 <베르메르에 의한 환영>이다. 돌이켜보면 화가의 작업실 시리즈에 온 마음과 에너지를 다해 열정을 쏟았고 깊이 매료되었다. 벨라스케스의 작업실은 <라스 메니나스-시녀들>에 대한 나의 애정을 오마주 한 작품이다. 동시대 사람이 아니었지만 피카소 역시 벨라스케스를 흠모했던 사실과 나의 마음이 일치했기에 두 거장을 벨라스케스의 작업실에서 만나게 해주었다. 나의 작업실 시리즈에 자주 등장하는 모네의 작품은 작가가 된 후 세월이 갈수록 더욱 애정과 마음이 간다. 그의 화풍은 보는 이가 순수한 즐거움과 기쁨을 느끼게 하는 재기 발랄함과 순수한 에너지로 가득 차 나를 매료시킨다. 이번 전시에서 모네 작품을 배경으로 나비들이 공기 중으로 부유하듯 오르는 작품도 새롭게 시도하였다.

남경민, 벨라스케스 작업실-피카소와 마주하다, 145.5x224cm, oil on linen, 2020

벨라스케스, 르누아르와 모딜리아니도 그림을 통해서 나의 캔버스에서 만난다. 그들의 그림은 온전히 그들 하나하나의 영혼과 소통하게 해준다. 그들의 그림이 바로 ‘그’이기 때문이다. 온 마음을 다해 그림을 그려본 사람은 안다. 어떤 그림은 바로 그 사람을 말해 줌을, 그 그림이 무엇을 말하는지 몰라도 그 안으로 스며들게 하는 에너지가 있음을, 그 세상 안으로 언제든 들어가 즐길 수 있음을. 지친 우리의 삶과 단조로움을 생기와 소소한 행복으로 이끄는 힘이 예술에는 분명히 있다. 나의 그림을 보는 사람들 역시 그림을 통해 이처럼 밝은 사색의 에너지로 대가들과 만나고 소통하면 좋겠다.

남경민, 르누아르 작업실, 145.5x224cm, oil on linen, 2019

상징과 은유의 알레고리
<화가N의 밤 풍경을 거닐다>는 화가인 나의 내면을 밤 풍경으로 표현한 서사적인 작품이다. 내적인 충족감과 자연과의 일체감, 고요한 나만의 작업세계에서의 초연함, 그 안에서의 그림에 대한 내가 꿈꾸는 희망과 삶에 대한 본질과 가치, 사랑을 표현한 그림이다. 코로나는 전업 화가인 나의 삶에 대해 돌아보고 스스로에게 말을 많이 걸게 해주었다. 내 그림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여러 심볼에 대해서도 섬세한 성찰과 사색이 요구되기도 했다.

남경민, 화가 N의 밤 풍경을 거닐다, 194x390cm, oil on linen, 2018_2022

내 그림에서 나비는 영혼의 매개체이다. 나비는 히브리어로 예언자의 뜻을 지닌 영적인 곤충이다.
“나비는 먹기 위해서나 늙기 위해서 생존하지 않는다. 오직 사랑하고 생존하기 위해 생존한다. 그러기 위해서 나비는 비할 데 없이 화려한 의상을 걸치고 절단 선이나 색채, 비닐과 솜털 속에 다채롭고 정제된 언어로 존재의 비밀을 상징하는 자신의 몸체보다 몇 배나 큰 날개를 달고 있다. ” – 헤르만 헤세
마치 내 그림에서의 나비의 의미와 영적인 느낌을 절묘하게 공감되도록 잘 표현해 준 헤르만 헤세의 말을 인용해보았다. 유럽 어딘 가에선 나비가 부귀영화를 상징한다고도 하는데 그 자그맣고 가녀린 몸체가 물적, 영적으로 인간사에 풍부한 영향을 준다는 것에 가히 신비스럽기 그지없다. 나비를 그릴 때 나의 몸이 가벼워지고 홀가분해짐을 느끼는 이유는 그래서일까, 나비를 작품의 마무리 단계에서 그려서 일까, 하얀 나비를 한 마리씩 그리며 느끼는 자유로움은 분명 심적인 가벼운 느낌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 있다. 마치 나의 영혼이 맑아지는 느낌이랄까, 한 작품의 마무리에서 캔버스 위로 날아오른 부유하는 나비를 그리며 화면의 생동감은 고조된다.

깨지기 쉬운 투명 병은 상처받기 쉬운 예술가의 섬세한 자의식을, 잘려진 날개는 못다 이룬 꿈, 마음에 간직한 꿈이면서 바람의 희망이다. 막 꺼진 초와 타오르는 초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이면서 영원성을, 모래시계는 모든 것은 끝이 있다는 소멸과 동시에 영속성을 은유한다. 거울은 내면을 들여다보는 성찰의 도구를, 해골은 바니타스의 의미이면서 지금 여기에서 충실하고 행복하기를 보여준다. 그림 속의 의자는 인물의 페르소나이면서 그의 부재를 상징하는 이중적 의미를 내포한다.
하지만 여기에 나열한 상징적 표현은 서막에 불과하다. 그림을 감상하고 해석하는 것은 감상자의 몫이며 보는 이의 마음에 맞게 다채롭고 폭 넓은 해석으로 열려있기를 희망한다. 지금, 이 순간의 의식 너머 보이지 않는 세계와 만나고 상상하는 것, 더 큰 세계를 열린 마음으로 다가가는 것을 그림은 가능하게 해준다. 내가 그린 그림이 감상자의 다양한 열린 결말과 해석으로 풍부 해짐을 기대하는 일은 작가로서 매우 즐겁고 설레이는 일이다.

남경민 작가

이화익갤러리
서울시 종로구 율곡로3길 67
02-730-7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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