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GALLERIES] Gallery Doll
2022. 4. 15 – 5. 1
박윤지
박윤지의 그림은 신비롭고 아름답다. 물결처럼 일렁이거나 아른거리며 색감과 만나면서 어울리는 장면은 분위기로 어필된다. 추상적이면서 사실적인 것이 화면은 전체가 조화롭다. 부드럽지만 단단하고 잡힐 것 같지만 어디론가 빠져나갈 것 같은 묘한 구석에 그림은 작가의 평소 경험을 바탕으로 하지만 장면에 포착됨은 대상이 아니다. 그보다 빛 옆에 따라다니는 그림자를 전제로 하기에 화면은 어디선가 본 듯한 기억처럼 잔상으로 남는다. 미세한 떨림이 있거나 여린 면 이 있는 형태들로 무엇을 정면에 내세우고 있지만 사물이 아닌 그림자로서 마치 동양화의 여백처럼 기억이 전달해 주는 느낌 같기도 하다.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유추해 내듯 자신의 내면이 감각화된 작용으로 그림자는 색채와 만나면서 살며시 스며든다. 사물은 아예 사라지거나 축소되고 그림자는 색채로서 화면을 메운다. 공간의 채워짐. 작가의 작업은 장소성의 힌트를 주는 연출도 있지만 그보다 추상으로 가는 양상이다. 공간이 있고 안료와 그림자의 섞임, 이곳은 남겨진 것인지 다시 시작되는 곳인지 알 수 없다. 마음속을 맴돌고 있는 그 무엇이 심상으로 변화하여 자리를 잡는다.
평면은 한지에 먹이 번지듯 스며든 강한 기억과 느낌들이 즐비한데 여백 같은 공간에 그림자가 섞임은 어떠한 사물도 살펴보기 쉽지 않지만 그러한 사물들이 주는 느낌보다 더욱 강렬한 어떤 것이 감지될 수 있게 하는 힘이 있다. 아마도 이런 힘을 갖게 된 건 장면 안 그림자 외에 그 비워진 여백을 그림자로 대신하고 있는 본래의 사물에 부딪혀 그 주위를 감싸고 있던 빛들, 혹은 그 사물 사이로 새어 나온 빛들이 화면의 나머지 여백 공간을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에게 일상이란 지나간 날들이 포함된 현재로서 현실의 반복은 감성으로 이어진다. 문득 떠오른 것이 사소하거나 버거운 진실들로 감정이란 상념 같은 것일 수도 있다. 그저 기약 없이 삶을 지속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생각하고 삶의 일부로 순간에 주목한다. 이를 감지하기 위해 경험 안의 빛과 그림자를 평면 안에 새겨 넣음으로 각인시킨다. 언젠가 있었고 그 순간은 없음을 확인받는 자리로 작품이 된다. 무엇이 있었지만 사라져 버린 것을 확인하는 순간 더 강력한 어떤 것을 느끼는 건 참으로 아이러니한 상황이지만 작가는 그것을 감각화 시켜 보여주려 한다. 잡히지 않는 한 순간을 그린다는 것은 무한한 시간의 흐름 속에 지나감을 확인하는 것이기에 무모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작업의 시작은 빛이 만들어내는 순간들을 수집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간혹 마주치는 눈앞의 풍경에 마음이 흔들리는 순간들이 있다. 도로의 길 바닥이나 지나치는 건물의 벽과 창에 드리운 빛과 그림자, 그 순간의 바람, 흔들리는 나무와 같은 물체들, 살갗에 닿는 온도 등 잡히지 않는 것들이 한데 모여 그림이 된다.
이번 전시는 일상에서 순간 순간 변화하는 창문의 풍경을 기록하고 시각적 경험을 토대로 재현해본다. 네모난 틀 안에는 순간 지나가는 빛 덩어리, 창 건너편에 흔들리는 나뭇잎, 녹색빛이 나는 유리, 기울어진 그림자들이 한데 모여 있다가 몇 걸음 자리를 옮기면 금새 모양을 달리한다. 창문 속 잠시 지나가는 풍경을 보고 잔상처럼 남겨지는 감각에 집중해본다.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노라면 창문에 빛 덩어리가 색을 더해 또 다른 그림을 만들어내고 그 만의 조형성과 리듬을 만들어 낸다.
장면을 처음 마주 했을 때 느낀 감정과 시간의 흐름에 따른 풍경의 변화와 그것을 화면에 담고 있는 나의 심상이 더해지다 보면 화면은 본래의 대상에서 벗어나 선이 되고 면이 되고 리듬이 되어 채워진다. 시간에 따라서 지나가 버리는 연약한 풍경과 기록하지 않으면 사라질 순간의 감각들을 화면에 옮기고자 하였고 각각의 네모난 창문의 형태로 제작하여 구성되었다. 네모난 화면들은 다시 조합되어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바닥에 은은한 그림자가 지나가듯이 종이 위에 옅은 물감의 붓질이 지나간다. 습윤한 상태에서 물감이 칠해지면 종이에 번지 듯 흡수되며 곧 사라질 듯한 잔상처럼 연약한 색상이 남는다. 종이에 물감이 흡수되고 고착되고 마르는 과정이 여러 번 겹쳐지는 순환적 제작 방식은 그 자체로 시간이 담겨 있다.
-작업노트-
갤러리 도올
서울시 종로구 삼청로 87
02-739-140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