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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진의 Edgewalker: 회화적 서설 혹은 연극적 서사

김명진의 Edgewalker: 회화적 서설 혹은 연극적 서사

유진상 (미술평론가, 목원대 교수)

Kim Myoung-Jin_Edgewalker_162x130cm_oilpastel&acrylic on canvas_2016

‘가장자리를 걷는 사람’이라는 뜻의 ‘Edgewalker’는 김명진의 연작 제목이다. ‘커팅 에지’(cutting edge)라는 표현은 ‘첨단’을 의미하는 말이지만, 초기 yBa (young British art) 작가들에겐 ‘낭떠러지 앞에 서있는 세대’를 가리키는 표현이었던 것처럼, 김명진의 ‘Edgewalker’ 역시 ’백척간두를 걷는‘ 화가로서의 자신의 처지를 가리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회화적 서사에 있어 ’가장자리를 걸으며 관찰하는‘ 자신의 시점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치 자신의 그림들에 나타나는 회화적 풍경들을 바라보는 시점이 거대한 공간의 가장자리여서 그 테두리를 따라 걸으며 안쪽의 소요(騷擾)를 응시하는 것이다. 마치 버질의 안내를 받으면서 ’연옥‘(inferno)을 따라 걸어가는 단테처럼 화가 역시 삶의 수많은 드라마들이 들끓는 공간의 가장자리를 걷고 있는 것이다.

내가 만난 김명진은 말수가 많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외부란 사태를 더 복잡하게 만들거나 간혹 흥미로운 사건이나 사람들이 출몰하는 무대일 뿐일지도 모른다. 거리를 두고 관찰하는 그의 시선에 포착된다는 것은 마치 거대한 고래의 입 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어떤 공간의 변형을 겪게 되는 것이다, 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화가의 시선에 포착되는 순간, 대상들은 예기치 못한 거대한 공간으로 빨려 들어간다. 텅 비어있지만, 거친 폭풍과 기류들이 몰아치는 어두운 사막이나 동굴과도 같은 풍경이 그 안에 펼쳐져 있다. 때로는 바다와 같이 거대한 물이 넘실대기도 하고 때로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사물들이 거칠게 날아오르기도 한다. 비명과 웃음소리, 쏟아지는 물줄기와 사물들이 서로 부딪치는 굉음들이 이 거대한 풍경 속에서 울려 퍼진다. 그 속에는 화가가 삶 속에서 조우한 사람들이 피치 못한 운명에 사로잡힌 배우들처럼 우스꽝스럽거나 기괴하거나 만화의 캐릭터 같은 파편들로 변형되어 자신들이 화가에게 각인시킨 기억을 끝없이 재연하고 있다. 이 우화적인 조합들은 보슈(H. Bosche)나 브뤼겔(Brügel)의 그림들에서처럼 원근법적 공간이 아닌 파편적 서사의 공간을 구성하느라 마치 이 혼돈의 공간 속에서 폭발한 조각들처럼 흩뿌려져 있다.

김명진 Edgewalker, oil pastel & acrylic on canavs, 2020 116.8X91cm (2)

페인팅은 캔버스에 물감을 묻히는 일이다. 캔버스에 물감을 묻히기 위해서는 먼저 캔버스라는 공간을 의식해야 한다. 어떤 화가들은 이 공간을 뒤덮고 그 위에 새로운 공간의 환영을 그리기도 하지만, 또 어떤 화가들은 캔버스와 물감의 물질적인 혼재를 강조하기 위해 일부러 원래의 바탕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러한 방식은 ‘미완성’, ‘표현적 태도’ 혹은 ‘드로잉과 유사한 방법’으로 이해되기도 하지만, 여기에는 보다 근본적인 특질이 자리 잡고 있다. 이 특질은 고르키(A. Gorky)로부터 추상표현주의자들을 거쳐 톰블리(C. Twombly)와 같은 화가에게 이르기까지 유화의 일관된 계보 속에서 핵심적인 가치로 다루어진 것이다. 그것은 화면을 붓에 의해 발린 물감과 백색의 바탕으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캔버스의 빛이 만들어내는 물리적이면서 초월적인 교직(交織)으로 보는 것이다. 이 경우 화가는 캔버스를 물감으로 뒤덮는 대신 배경의 흰색이 뿜어내는 빛을 조절하는 방식으로 물감을 표면 위에 묻히는 것이다. 김명진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캔버스는 밝은 배경의 빛들로 가득 차있다. 마치 대낮의 환한 빛 한 가운데서 연극에 가까운 삶의 장면들과 그것들의 배경이 되는 도시의 거리들이 외침과 소음들로 웅성거리는 것처럼 수많은 붓과 물감의 에너지들이 캔버스와 부딪치고 미끄러지고 흩뿌려져 있다.

 

이 묵시적 공간에는 종종 화가 자신이 등장한다. 영화 <존 말코비치 되기>에서 주인공인 존 말코비치는 자신의 머릿속으로 들어가 세계를 바라보는데, 그가 자신의 눈을 통해 바라본 세계 속의 타자들은 모두 자신의 모습을 하고 있다. 김명진의 작품에서도 화가가 자신의 눈을 통해 바라본 세계 속에는 타자들과 함께 부유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등장하는데, 이 중첩된 시선에 의해 관객들은 화가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풍경 전체가 일종의 자화상이 아닐까 하는 의문에 사로잡히게 된다. 고래의 뱃속, 혼돈의 연옥, 수평선이 흐릿해진 바다, 수없이 많은 기억의 파편들이 휘몰아치는 한낮의 풍경은 모두 화가의 중첩된 시선에 의해 변형된 현실의 모습들이다. 자신의 어머니, 우연히 만난 여인, 마법사와 우주인, 동물화된 자아들 -개, 고양이와 같은 동물들-, 은폐된 사실들, 암호들은 김명진의 그림들 속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대상들로, 이들 모두는 각각 구체적으로 일어났던 기억 속의 어떤 사건들을 지시하는 행동들을 취하고 있다.

김명진 Edgewalker, oil pastel & acrylic on canavs, 2020 116.8X91cm

세계는 평면적인 사건들의 연쇄가 아닌 거시적 풍경과 미시적 장면들의 비-선형적 혼재로 이루어져 있다. 과거의 장면들이 현재의 풍경 위로 불쑥 튀어 오르기도 하고 다시 그 안으로부터 현재의 의미들이 스며 나오기도 한다. 불현 듯 웃음이 나오기도 하고 순식간에 거대한 불안으로 뒤덮이기도 한다. 그것은 일종의 원심분리기를 떠올린다. 가장자리를 따라 극도로 빠르게 회전하는 기계는 내부의 물질들로부터 개별적인 입자들을 분리해낸다. 화가가 풍경의 가장자리를 얼마나 빠른 속도로 회전하고 있는지 상상해보는 일은 회화를 바라보는 즐거움의 일부가 될 것이다. 기억과 형태와 사건들은 투명한 윤곽과 색채의 얼룩들로 중첩되면서 세계를 채우는 에테르(ether)의 와류(渦流)를 따라 거칠게 떠오르는 것이다. 이 분열적인 세계를 바라보면서 화가는 끊임없이 내면의 ‘기계’를 작동시키고 얽힌 기억들을 ‘분석’하며 그것들의 ‘번역’에 자신의 기호들을 아낌없이 사용한다. 이 극도로 사적이면서 동시에 우주적인 작업이 바로 김명진 회화의 의의라고 할 수 있다.

김명진 Edgewalker, oil pastel & acrylic on canavs, 2020 116.8X91cm

앞으로 김명진의 회화가 이 분열적이고 빠르게 회전하는 세계 속에서 어떤 또 다른 회화적 ‘번역’을 만들어낼지 궁금하다. 그의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신체가 시선과 한 몸이 되어 벌이는 이 거대한 흥분의 도가니가 또 어떤 무대를 우리에게 보여줄지 기대되는 것이다. 나는 그 안에 내가 미처 알지 못한 거대서사들과 우주의 구석구석에서 벌어지는 미시적 장면들, 서로 이어질 수 없는 것들의 시공간적 도약, 에로틱한 선망들과 일상적인 조우들이 허공에서 부딪히며 바닥에서 일어나는 입자들처럼 관객의 시선들을 뒤흔들어 놓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것이 첨단기술이 아니라 김명진의 몸과 캔버스, 그리고 그 위에 발리는 물감에 의해 일어나는 사태라는 것을 통찰하게 되길 바란다. 가장 평범한 것이 어떻게 가장 비범한 세계를 만들어내는지를.

김명진_Edgewalker_130X162cm_acrylic on canvas_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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