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훈칠

《완성되지 않은 형식들》 전시 전경 (1)
갤러리 도올은 새해 첫 전시로 권훈칠(權勳七, 1948–2004)의 개인전 ‘완성되지 않은 형식들’을 개최한다. 두 차례의 국전 수상 경력과 서울대학교를 졸업, 그리고 이탈리아 유학을 거친 그의 작업은 추상과 구상을 넘나들며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높은 완성도를 보여준다. 그는 세계를 경험하며 느끼는 즐거움을 창작의 원동력이라 말했고, “그린다는 사실 자체가 나의 즐거움”이라고 했지만, 엄밀히 말해 형상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았다. 비정형적 형태를 통해 추상의 조형적 형식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그 결과물을 분석·탐구하는 과정이 그의 작업 전반을 이루었다. 이번 전시는 작가가 자신만의 회화적 언어로 이어지는 만다라에 도달하기 전까지의 여정을 되짚는 구성으로, 1990년대까지의 작업을 소개한다.
권훈칠, 아리랑 X, 1980년, 캔버스에 유채, 145×113cm (제8회 앙데팡당전 출품작)
권훈칠, 우의적 형식-XII, 145x113cm, oil on canvas, 1978
작가는 추상과 구상을 자유롭게 오가며 사실적 형상을 연습하듯 그려보는 한편, 꾸준한 추상 작업을 통해 회화의 깊이를 더했다. 부드러움과 차가운 섬세함이 조화를 이루는 그의 회화는 서정보다는 이성이 균형을 잡고 있으며, 인생 전반에 걸쳐 회화적 실험을 거듭했다. 완벽을 추구한 그는 작업실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고, 이러한 태도는 작품에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린다’는 행위 자체에 중점을 둔 그의 과제는 곧 평면 안에서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의 문제로 이어졌고, 이로부터 추상의 형식 탐구가 시작되었다.
《완성되지 않은 형식들》 전시 전경 (2)
단순한 시각적 형태가 아닌 색과 공간의 위치, 그리고 내면적 감각과 심리적 리듬이 엿보이는 ‘탈자(脫自)-A’는 추상회화의 본격적 시작을 알리는 작업으로, 그만의 방법으로 색채를 해석해 나가는 이정표가 된다. 이후 ‘사조’ (思潮)와 ’우의적 형식’에서는 삼각형의 변주가 엄격한 구도를 바탕으로 구축적이면서 안정적인 형태를 보여준다. 특히 색채는 한지의 질감과 만나 자연스러운 번짐이라는 우연적 효과를 드러낸다. ‘탈자’에서의 질감적 표현 이후, 그의 추상은 변화가 거듭된다. 이는 작가로 하여금 추상 자체를 더욱 신중히 바라보게 했고, 단번에 결론에 다다를 수 없는 사유의 흐름은 빛과 조응하는 색채적 표현을 찾는 방향으로 이어졌다.
권훈칠, 사조(思潮) III, 1975년, 캔버스에 유채, 163×130cm (제24회 국전 입선작)
‘그날 이후로’에서는 눈으로 식별하기 어려운 미세한 색 번짐을 극대화하여, 같지만 미묘하게 다른 특성을 알게 하는 앵프라맹스(inframince)를 활용한다. 캔버스 위에 기름으로 묽게 희석한 여러 색채를 흘려 자연스러운 어울림을 유도하는 조형적 실험을 진행했으며, 이러한 방식은 ‘해후’(邂逅) 시리즈에서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물감이 마르면서 생긴 균열과 요철들을 적극적으로 나타내고 위에서 아래로, 혹은 아래에서 위로 색채가 엷어지는 화면은 밝음과 어두움의 처리 속에서 지향점을 찾아간다. 같은 제목의 다른 작품에서는 탁본 효과를 표현하듯 한지의 결이 그대로 드러나도록 마른 먹 붓질을 이용해 한지 자체의 이미지를 활용하기도 했다. 연작들은 대부분 모서리에 테이프를 붙였다 떼어낸 흔적을 남김으로써 전통 가구의 가장자리의 장석 모티브를 연상시킨다.
《완성되지 않은 형식들》 전시 전경 (3)
그는 작업 메모에서 옛 것과 현대적 감각의 결합에 대한 고민을 언급하는데, ‘해후’를 통해 그러한 과제를 풀어 보려 했다. 고가구나 골동품을 모으거나 전통 보자기에 대한 관심을 가지면서 우리 것에 대한 미감의 눈을 열어 왔던 작가는 동양적 이미지를 얻을 수 있는 이러한 소재들을 추상으로 나타내기 시작한다.
권훈칠 KWON Hoon Chill, 심문 159x159cm, 1996, 카드보드에 아크릴 acrylic on cardboard
한 시대가 흐름을 만들고 그 흐름에 개인이 자연스럽게 끌려가는 경향이 있음에도, 권훈칠은 그 속에서도 자신만의 독자적 화풍으로 회화를 제시했다. 그는 서구 모더니즘을 수용하면서도 한국적 소재를 통해 동양적 정체성을 그림에 담고자 했으며, ‘심문(心紋)’은 이러한 맥락에서 등장한다. 질서 정연하고 견고한 구도 속에서 삼각형이 서로 마주하는 조형 방식은 추상을 단순한 평면에 머물지 않게 하고, 공간적 확장성을 획득하며 그의 후기 추상에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심문’은 ‘마음의 무늬’를 뜻하며 이후 만다라 시리즈의 기본 조형 단위가 된다. 한지를 구기고 자르는 과정에서 생겨난 우연한 흔적들은 화면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채움과 비움이 은근하게 드러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이로써 작품은 매체의 물성과 시간, 우연과 규칙, 의식과 무의식 사이를 유동적으로 넘나드는 특유의 깊이를 획득한다.
권훈칠 KWON Hoon Chill, 무제 Untitled 50x60cm, 마분지에 유채 oil on cardboard, 1990
갤러리도올
서울시 종로구 삼청로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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