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1. 15 - 11. 25 |
한희숙
작가 한희숙은 이번 개인전에서 ‘본 보야지(Bon Voyage)!’라는 테마를 통해서 관객에게 힐링이 가득한 한 편의 ‘휴양지로의 여행’을 선사한다. 국내외 여행 속 과거의 기억이 ‘지금, 여기’에 화폭으로 소환된 한희숙의 작업은 달콤하면서도 쌉쌀한 그녀만의 매력을 물씬 담고 관객을 맞이한다. 그것이 무엇인가?
한희숙, 혼자만의 항해, mixed media on canvas, 24 X 34cm, 2023
I. 호모 비아토르의 삶 속 여행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Gabriel Marcel, 1888~1973)은 존재론적 인간의 정체성을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로 규정한다. ‘걷는 인간, 길 위의 인간, 여행하는 인간’과 같은 말로 풀이되는 호모 비아토르는 인상파 화가 고갱(Paul Gauguin)의 작품,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D’ou venons-nous? Qui so’mes-nous? Ou allons-nous?)〉(1897)라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고갱의 이 작품은 과거-현재-미래로 흐르는 예측 불허의 인생 여정을 상징적으로 선보인다. 죽음에 이르는 존재임을 알면서도 죽음을 향한 길을 지속해야만 하는 인간의 불가피한 여정을 말이다. 호모 비아토르의 개념 역시 인간이 최종적으로 죽음에 이르는 존재임을 뻔히 알면서도, 그 죽음을 향한 예측 불가능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재차 알려준다.
작가 한희숙은 이러한 호모 비아토르의 은유를 자신의 작업 안에 숙명처럼 받아들인다. 유한의 정체성으로 세상 위의 길을 떠도는 호모 비아토르는 삶의 의미를 찾아 여행한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행복이자 희망이기 때문이다. 가브리엘 마르셀은 ‘호모 비아토르는 길 위에 있을 때 아름답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일까? 혹자는 이 호모 비아토르의 은유를 ‘희망의 형이상학을 향한 프롤레고메나(서설)’이라고 해설한다.
한희숙, 다채로운 축복, mixed media on canvas, 117 X 91cm, 2023
한희숙은 호기심 가득했던 어린 시절의 시골 여행 체험, 집에서 책으로 읽었던 간접적 세계 여행, 성인이 된 후 장단기의 국내외 여행 경험을 한데 녹여 자신의 작업을 풀어나간다. 게다가 그녀는 삶의 거주지 안에 당시 체류했던 나라들의 이국적인 분위기를 재연하면서, 상상의 여행 혹은 희망 여행마저 자신의 작업과 삶 속으로 끌어오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한희숙의 작품, 〈Bon Voyage〉를 살펴보자. ‘여행 잘하세요’라는 의미를 담으려는 까닭일까? 작품은 추상 이미지이지만, 마치 항공기를 타고 내려다본 푸르른 대양이나, 얼음으로 뒤덮인 남극이나 북극과 같은 풍경처럼 보이기도 한다. 푸른 대양을 가르며 커다란 고래가 길을 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계곡을 따라 빙하가 녹아 흘러내리고 있는 것일까? 미디엄이 섞인 물감이 만든 거친 마티에르를 화면 가득 안은 이 작품은 어떤 형상으로 특정하기 어려운 추상적 화면 안에 푸르른 자연의 풍경과 같은 이미지를 넉넉히 품어 안는다.
한희숙, Bon Voyage, mixed media on canvas, 20 X 20cm, 2023
또 다른 추상 이미지의 작품, 〈다채로운-축복〉은 어떠한가? 특별한 형상을 띠고 있지는 않지만, 푸른색 이미지 덩어리가 작품의 좌우 양측에 작게 자리하고 있는 이 작품은 황금빛 혹은 노란빛 물감이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흔적을 담고 있다. 작품의 전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침착하면서도 낭만적이고 기묘한 표현주의 분위기는 아래 작가 노트처럼 실내에서 떠나는 세계 여행의 의미를 되묻게 한다: “어느새 여행을 가지 않고도 아름다운 북악산 아래 내 집 마당에서 열리는 감이나 ‘살구’들로 달콤한 잼을 만들며 작은 행복을 느끼거나 ‘나른한 봄날 테라스에서 시를 읽으며 태양의 명상을 누리는 이 확실한 자연의 놀라운 경험들은 가끔 ‘이국의 아침’에서 눈뜰 무렵 맡아지던 빵 굽는 냄새와 생경한 향신료의 냄새와 나라마다 다른 온도와 습도, 자연과 구름의 빛깔과도 오버랩된다. ‘꿈속의 꿈’처럼 무의식적으로 전달된 ‘다채로운 축복’에 감사드린다.” 이러한 차원에서 이 작품을 우리는 ‘호모 비아토르의 삶 속 여행’ 혹은 ‘호모 비아토르로 떠나는 삶 속 여행’이라고 할 만하다.
II. 마인드스케이프 – 예술로 떠나는 세계 여행
실제로 여행을 떠나지 않는 중에도 한희숙의 세계 여행은 지속된다. 음악, 소설, 무용, 영화와 같은 예술이 그녀의 비주얼 아트와 만나 동행하는 가운데 펼쳐지는 마음 여행(mind journey)이 그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여행을 화두로 삼는 그녀의 회화를 ‘마음으로 그리는 이미지’, 즉 이미저리(imagery)로 그리는 마인드스케이프(mindscape)로 불러본다.
붉은색 계열의 추상 작품 〈넌 내가 노래하는 음악이야〉는 동명의 쿠바 음악으로 그리는 마인드스케이프가 된다. 쿠바에서 ‘팬텀싱어’라는 한 오디션 프로에서 선보인 바 있는, 성악과 쿠바 리듬의 음악이 뒤섞인 이 노래는 환상적 멜로디와 함께 행복을 전파하는 노래 가사가 일품인데, 한희숙은 이 노래에서 받은 감동을 화폭에 가득 담아낸다. 아크릴 물감과 미디엄이 섞인 채 화면 위로 흘러내리는 붉은색은 이 노래 가사처럼 ‘수정할 필요 없는 자연스러움’의 최대치를 선보인다.
한희숙, 신비의 연금술, mixed media on canvas, 20 X 20cm, 2023
또 다른 작품을 보자. 모래와 같은 거친 질감이 맞부딪히고 핑크, 레드, 블루가 마블링처럼 뒤섞이는 추상 회화 작품인, 〈신비의 연금술〉은 브라질 소설가 ‘파울로 코넬료(Paulo Coelho)의 소설 ‘『연금술사』(1988)’를 시각 예술로 번안한 것이다. 연금술사가 행복을 위해 찾아 나선 금의 정령이자 보물인 ‘현자의 돌(Philosopher’s Stone)’이란 결국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이 소설은 한희숙의 작품 속에서 되살아난다. 보라! 아크릴 물감의 덧칠과 흘러내림이 교차하는 비정형의 신비로운 형상과 다양한 마티에르를 말이다. 그것은 마치 비금속(卑金屬)이 빛나는 금으로 변화해 가길 기대하는 연금술의 상상처럼 다채롭고 화려해 보인다. 비록 연금술이 금 만들기에는 실패했지만, 그 과정에서 이룩한 놀라운 화학, 물리학, 약학에서의 성과가 오늘의 현대 문명을 일구었듯이, 한희숙은 연금술적 과정으로 조형 언어를 실험해 나가면서 자신만의 작업을 하나둘 천착해 나가는 중이다.
핑크빛 바탕색이 화면을 가득 메운 작품, 〈몽상가의 춤〉은 무용극에 연극적 연소를 도입했던 작품 〈카페 뮐러(Café Müller)〉의 주역이었던 독일의 현대 무용가 ‘피나 바우쉬(pina bausch)’의 환상적이고도 매혹적인 공연에 관한 영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희숙은 ’몽유병자처럼 공간을 부유하는 그녀의 춤‘에서 현대인의 외로움과 공허, 소외의 아픔뿐만 아니라 그것이 승화된 숭고미를 발견하고 자신의 작품 속에 그것을 담고자 시도한다. 핑크빛이 가득한 화면 속에 배치된 검정과 금빛이 혼성된 유선형의 이미지 덩어리는 몽상적인 춤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할 뿐만 아니라 아픔의 감정과 더불어 승화된 숭고미를 담아내기에 족해 보인다.
한희숙, Tango Lesson, mixed media on canvas, 70 X 35cm, 2017
또 다른 작품 〈탱고 레슨〉에는 푸른빛 가득한 화면 위에 꽃 같기도 하고 식물 줄기 같기도 한 유기적인 형상들이 부유한다. 붉고 푸른 보색이 대비를 이룬 가운데, 어두운 바탕 면을 얇은 층으로 뒤덮은 푸른빛 배경과 식물 형상의 두꺼운 물감의 마티에르가 조화를 이룬 이 작품은 환상적인 탱고와 여행의 로망을 한데 엮은 1997년 제작된 동명의 영화 작품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이다. 여성 감독 샐리 포터(Sally Potter)의 자전적 체험을 기초로 한 슬프고도 아름다운 스토리텔링이 한희숙의 작품 안에서 되살아났다고 할 만하다.
이처럼, 한희숙의 작품은 많은 부분 음악, 소설, 무용, 영화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들이다. 한희숙이 자신의 회화 속에서 예술을 매개로 떠난 세계 여행이자, 마인드스케이프인 셈이다.
한희숙, 넌 내가 노래하는 음악이야, mixed media on canvas, 130.3 X 162.2cm, 2022
III. 에필로그
한희숙의 회화에는 다양한 질료와 조형에 관한 실험이 펼쳐진다. 특히 특별한 문양의 천 조각이나 잘라낸 동판으로 콜라주를 시도하거나, 조개껍데기, 나뭇가지와 같은 자연물과 돌기와 같은 인공물이 한데 어우러진 ‘발견된 오브제’ 그리고 브로치, 그릇, 나무 액자 등의 공예품을 변형한 ‘만들어진 오브제’가 회화와 함께 만나기도 한다. 가히 오브제 회화라고 할 만하다.
이러한 오브제를 품은 회화는 대개 붓질의 속도감이 느껴지는 표현주의 계열의 추상이 대부분이지만 더러는 패턴화된 직물을 바탕으로 깔기도 하고, 때로는 물감의 질료감이 극대화된 텁텁한 마티에르가 가득한 앵포르멜 경향의 추상이 자리하기도 한다. 즉 표현주의 추상, 비구상, 오브제가 만나 이야기가 있는 그림으로서의 미적 향연을 펼치는 셈이다. 그녀의 그림에는 때로는 소설과 같은 상상과 삶의 서사가, 때로는 흥겨운 음악이, 때로는 탱고와 같은 유연한 춤이, 때로는 레몬버베나향과 같은 기분 좋은 향기가 자리하면서 시각뿐 아니라 청각, 후각 등 오감에 호소하는 작업에 천착한다. 한희숙은 이처럼 회화의 다양한 질료와 더불어 조형의 변증법적 결합을 통한 회화의 다양한 변주를 시도한다.
한희숙은 이번 전시에서 ‘본 보야지’라는 테마를 내세우며 ‘낯선 곳으로 떠나는 여행’을 시도함과 동시에 관람객에게 이러한 여행의 가이드를 자처한다. 그것은 ‘여행하는 인간’ 혹은 ‘길 위에 선 인간’이라는 의미의 호모 비아토르의 정체성과 인간 존재론을 확인하는 길이자, 음악, 소설, 무용, 영화로부터 영감을 받은 예술을 매개로 떠나는 세계 여행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에서, ‘길’ 혹은 동양적 표현으로 ‘도(道)’와 연계되는 여행이라는 테마를 통해서 삶의 의미를 찾아 떠나는 인간 존재를 확인하는 한희숙의 작업은 작가 스스로에게나 관람자에게 여행이 품은 삶의 철학으로 인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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