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GALLERIES] Gallery Hyundai
2021. 6. 16 – 8. 1
이강소
“매 순간마다 조금씩 낯선 저에 의해 그려지는 회화들,
그리고 매 순간마다 조금씩 낯선 저에 의해서 문자처럼 써지는 회화들,
순간 저에게 매혹적으로 자극을 준 색채에 의해 그려진 회화들.
그리고 붓질들의 느림과 빠름을 경험해 봤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습관적인 붓질로부터 조금씩이나마 벗어나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 이강소
갤러리현대는 이강소의 개인전 《몽유(夢遊, From a Dream)》를 6월 16일부터 8월 1일까지 개최한다. 《몽유》는 작가가 1990년대 말부터 2021년까지 완성한 회화 30여 점을 엄선한 전시로, 신작을 중심으로 ‘화가’ 이강소의 진면목을 확인하기 위해 마련됐다. 일필휘지(一筆揮之)로 남긴 역동적인 붓질과 과감한 여백이 아름다운 대형 회화, 여러 층위로 칠한 거친 추상적 붓질과 1980년대 말부터 작가의 작품에 아이콘처럼 등장한 새와 나룻배 등을 연상시키는 구체적 형상이 공존하는 회화, 회색이나 흑백의 모노톤 회화와 극적으로 대비되는 형형색색의 눈부신 컬러를 사용해 평면의 캔버스에 무한의 공간성을 구현한 실험적 신작 회화 등을 함께 선보인다. 전시를 찾은 관객은 이강소가 지난 20년 넘게 전개한 회화적 언어의 정수를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이강소는 한국 현대미술과 동시대미술사를 논하며 빼놓을 수 없는 거장이다. 그는 실험미술의 새로운 움직임을 이끌던 1970년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설치, 퍼포먼스, 사진, 비디오, 판화, 회화, 조각 등 매체에 구애받지 않는 왕성한 창작 활동을 펼쳤으며, 특정 사조나 형식적 방법론에 안주하지 않았다. 그가 1970년대 발표한 <여백>(1971), <소멸(선술집)>(1973), <무제-75031>(1975) 등의 선구적 작품은 미술의 고정관념을 타파하고,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과 태도에 가차 없는 균열을 가했다. 갤러리현대는 2018년 이강소의 개인전 《소멸》을 개최해, 그의 1970년대 역사적 실험미술 작품을 집중적으로 재조명했다. 이듬해, 이탈리아 베니스 팔라초 카보토에서 그의 초기 설치와 비디오, 근작 회화와 조각 등을 아우르는 특별전 《Becoming》을 베니스비엔날레 기간에 맞춰 개최하며 국제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몽유(夢遊, From a Dream)》는 2009년 회화와 조각, 사진으로 구성한 개인전까지 포함해, 작가와 갤러리현대가 함께 하는 4번째 개인전이다. 앞선 전시가 이강소라는 거장과 그의 실험미술 작품이 한국 미술사에 남긴 의의를 학구적으로 탐색했다면, 《몽유》는 그의 회화 작품에 작가의 독창적 세계관이 구체화되는 방식, 그 시각적, 형식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 실험미술 작품과 1980년대부터 최근까지의 회화 작품이 공유하는 작가적 문제의식 등을 동시에 살피는 전시다. “꿈속에서 놀다” 정도로 풀이할 수 있는, 전시 제목 ‘몽유(夢遊)’는 이강소의 철학적 세계관을 함축한 키워드이자, 그가 작품에 담고 싶은 시대적 명제라 할 수 있다. 그는 무척 자명해 보이는 이 세계가, 실은 꿈과 같다고 해석한다. “나에게 이 세계는 엄청난 신비로 가득하다. 동시에 정신 차릴 수도 없이 복잡하고 가공스럽다. 만물은 생명을 다해도 그 원소들은 없어지지 않는다. 흩어지더라도 우주의 구조와 함께 알 수 없는 인과의 생멸을 거듭한다는 것이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생멸의 연기는 우주 저 멀리까지 펼쳐질 것이다.”(작가 노트) 어린 시절부터 학습한 동양철학과 양자역학 등에 기반을 둔 그의 이러한 통찰은 작품 곳곳에 자연스럽게 스며 있다.
대학에서 회화를 전공한 이강소는 1970년대 선보인 실험적 퍼포먼스, 비디오, 설치작품을 통해서도, ‘회화는 무엇인가?’를 줄곧 탐구하며, 기존의 회화 ‘개념’에서 벗어나는 반짝이는 실험을 감행했다. 예를 들어, 회화의 지지체인 캔버스천의 실밥을 한 올씩 뽑거나 찢어서 물질로서의 회화와 회화의 평면성을 동시에 제시한 <무제>(1975) 연작, 물감 튜브, 재떨이, 페인트 통, 자신의 비디오 작품의 한 장면 등을 캔버스에 실크스크린으로 전사한 다음 실제 물감을 듬뿍 묻힌 <무제>, <페인팅>, <리퀴텍스>, 자신의 벌거벗은 신체 곳곳에 붓으로 물감을 칠하고, 캔버스용으로 쓰이는 광목천으로 물감을 닦고 그 천을 바닥에 펼친 <페인팅(이벤트 77-2)>(1977), 작가가 모니터 화면의 안쪽에서 밖을 향해 모니터의 면을 물감을 묻힌 붓으로 천천히 칠하며 ‘그린다’는 행위를 상영하는 비디오 작품 <회화 78-1(Painting 78-1)>(1977) 등은 가장 오래된 매체인 전통적 회화 형식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며, 허상인 이미지의 실체를 드러내 객관화하고 있다.
이강소는 뉴욕주립대학에 객원 미술가로 머물던 1985년부터 물감과 붓을 사용하여 본격적으로 ‘그림 그리기’를 시작했다. 화면을 뒤엎은 자유롭고 거칠며 리드미컬한 붓터치, 구상과 추상 사이를 미묘하게 오가는 형태와 수평의 구성, 숲이나 강 등 자연의 일부를 확대한 듯한 청색과 녹색의 조합이 인상적인 작품을 잇달아 완성했다. 이후 모노톤의 바탕을 이중 분할해 집, 나룻배 등 건축적 구조물과 거친 붓질로 패턴 및 추상화된 화면을 동시에 제시하는 이미지 실험을 이어갔다. 1980년대 말, 몇 번의 붓질로 쓱쓱 겹쳐 그려져 을(乙)자나 유령처럼 화면에 부유하는 새 무리와 뿔 달린 사슴을 떠올리는 특정 대상 등이 청색과 회색, 흰색 등 모노톤의 아스라한 화면에 불쑥 등장하는 이강소 특유의 회화적 언어와 구조가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1990년대 중후반부터 <무제>라는 제목에서 벗어나, <섬에서(From an Island)>, <강에서(From a River)> 등 자연에서 모티프를 가져온 시적이고 서정적 제목을 지닌 연작을 발표하는데, 그려진 듯 그려지지 않은 극도로 절제된 최소한의 붓질만으로 물, 구름, 비, 폭풍 등 자연 현상을 떠올리게 했다.
2000년대 중반부터 발표한 <샹그릴라(Shangrila)>, <허(虛, Emptiness)> 연작은 간결하면서도 힘이 넘치는 획이 강조되는 동시에 새나 배 등의 형상(이미지)과 만난다. 2010년 중후반부터 현재까지, 작가는 <청명(Serenity)>이라는 제목의 회화 연작을 이어가고 있다. 동양 회화의 여백의 미와 작가의 호흡과 리듬, 몸의 제스처를 고스란히 간직한 강렬한 획의 교차가 잊히지 않는 시각 경험을 선사하는 <청명> 연작은 이강소의 작품 세계를 명징하게 드러낸다. 작가는 전시에 출품된 <청명> 연작에 관해, “내가 밝고 맑은 정신 상태를 유지하면서 붓질을 했을 때, 그것을 보는 관객도 ‘청명’한 기운을 공유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전시를 기념한 도록에 에세이를 쓴 미술사학자 송희경은 이강소의 <청명> 연작이 “그림, 문자, 시의 공통된 특성인 함축, 여운, 기세가 집약된 시서화일률의 예술”이라고 분석한다.
1층 전시장에서는 빠른 붓 놀림으로 굵은 선을 표현한 <청명> 연작 3점과 <강에서>(1999) 연작 3점을 소개한다. 관객은 1990년대 말-2010년대 중반-2020년대에 이르는 이강소 회화의 변화를 한 자리에서 조망할 수 있다. 이 작품들에는 작가가 작품을 통해 전달하려는 ‘기(氣)’의 양상이 잘 나타난다. 만물의 기운을 붓으로 시각화하는 것은 작가로서 이강소에게 큰 과제였다. 그는 보이지 않는 ‘기(氣)’가 존재한다고 믿고, 항상 ‘기’를 이미지로 남기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1999년 프랑스 니스 갈레리데퐁세트에서 처음 발표된 <강에서> 연작의 화면에는 유연하고 재빠르게 캔버스를 지나간, 농담이 다른 무수한 격정적 붓질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작품은 제목 때문에 추상화된 산수풍경이나 세차게 흘러가는 강물처럼도 보인다.
지하 전시장과 2층 전시장에서는 역동적인 획과 대담한 여백의 다채로운 변주에 집중한다. 이강소는 계산하거나 의도된 사고를 최대한 배제하고, 붓을 든 손의 감각과 자연스러운 호흡에 따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일련의 획을 캔버스에 그려간다. 이때, 그는 서양의 붓보다 길어 사용하는 사람의 놀림에 따라 더 크게 작용하고 반응하는 동양의 붓을 사용한다. 작가가 붓과 손, 감정과 정신이 혼연일체를 이룬 상황에서 남긴 다종다양한 붓질은 관객을 무한한 상상의 세계로 초대한다. 좌에서 우로 화면을 가로지르며 툭툭 던져진 획, 짧고 길고 다시 짧은 호흡의 획, 수직과 수평의 리듬이 살아있는 음악적 획, 캔버스와 싸우듯 격렬한 파장을 일으킨 획, 운동의 방향을 달리하며 면을 만드는 획 등 ‘일획의 미학’을 지닌 그의 획들은 옛 문인화의 전통을 품으며, 동시대 회화의 언어성을 풍성하게 확장해 간다. 지하 전시장의 폭 5m에 가까운 작품 <허-14012>(2014), <청명-20062>(2020), <청명-20063>(2020), 2층 전시장의 <청명-16124>(2016), <청명-17010>(2017) 등은 작가의 신체로 구현된 세계의 보이지 않는, 상상할 수도 없는 속도로 소용돌이치는 어떤 풍경이다.
2층 전시장에는 이강소의 작품에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며,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새와 배 등의 형상이 추상적 붓질과 함께 등장하는 작품을 소개한다. 새, 사슴, 배 혹은 산, 집과 같은 단순하지만 유동적인 이미지 기호는, 그려지다 만 듯 몇 개의 선만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런 형상은 색과 농담을 달리하며 칠해진 추상화된 붓질과 공존하며 이강소 회화에 이중의 구조를 형성한다. 자연과 문명의 상징인 대상과 자유롭게 운행된 필획을 병치해 놓음으로써, 그는 틀에 박힌 관념으로서의 세계가 아닌, 늘 ‘생성’의 과정에 있는 자연스러운 삶의 한 본질을 포착한다. 작가의 개입을 최소화시켜 관객이 작품을 다각도로 해석하길 원하는 그는, “오리로 보든 배, 사슴으로 보든 상관없다. 보는 사람이 인지하고 즉시 사라지는 환상일 뿐이다. 각자 자신이 판단하고 느끼고 경험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덧붙인다. 《몽유》에 처음으로 선보이는 채색이 사용된 <청명> 연작은 강렬한 주홍과 농담이 다른 군청의 붓질이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여러 차례 겹쳐진 붓질로 다층화된 추상의 공간을 만들고, 그곳을 노니는 듯한 대상의 흔적을 가볍게 그려 놓은, 초여름의 상쾌한 바람처럼 은은하고, 역동적이면서도 평온한 분위기의 회화가 탄생했다.
이강소 작가 스스로 “그려진 그림”이라 작품을 설명하듯, 그는 작가의 주관적 감정 표현이나 의도, 일방적인 정답 제시를 피하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입자와 에너지, 이곳과 저곳, 있음과 없음, 나와 너 등 그 모든 시공간의 찰나를 마치 신선처럼 “왔다리 갔다리”하며, 예상하지 못한 ‘기운생동(氣韻生動)’의 붓질로 관객에게 세계를 보는 또 다른 시각을 제공한다. 즉, 이강소에게 회화(작품)는 세계가 고정불변하고 자명하다는 근대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려는 부단한 수행의 결과이자, 끊임없이 부유하고 율동하는 만물의 진실을 드러내는 일이다. 또한 인간이 보고 경험하는 세계가 실재인가를 묻는 철학적 화두이며, 인간의 관점에서 벗어나 이 세계를 어떻게 시각화할 수 있는가에 대한 답변이다.
갤러리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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