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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bor of Love

정정엽, 김들내, 노경희, 이지영, 정직성

전시 전경 1

작가의 노동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신비화되어 있거나 예술가를 직업으로 인정하지 않는 풍토로 인해 사회적으로 정확한 역할을 부여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술의 목적이 갖는 추상성, 그리고 일반 노동과 달리 창의적 생산과정에 내재된 모호성을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노동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가나 보상을 바라지 않는 수고를 이르는 관용구인 ‘Labor of Love’는 전시기획자들이 오랫동안 다루어온 단골 주제 중 하나입니다. 노동현장의 부조리한 관행이나 불평등의 증언부터 예술가의 ‘창조적 산물’과 ‘진정한 노동’의 경제학 사이의 구별에 대한 비판들, 그리고 노동을 수행하는 과정 자체가 예술이 되는 개념으로의 확장까지 예술이라는 노동의 의미는 다채롭게 탐구되어 왔습니다.

갤러리밈은 40~60대 작가 다섯명이(정정엽 김들내 정직성 노경희 이지영) 노동집약적 작업과정을 묵묵히, 때론 힘겹고 치열하게 지속해가는 이야기로 그 뒤를 이어가 봅니다. 물리적인 긴 시간, 반복동작으로 인한 특정 부위의 통증, 불안과 강박, 세상으로부터의 소외를 자발적으로 끌어안는 그 마음을 들여다보려는 것입니다. 이들의 작품을 마주하고 있자면 ‘섬광과도 같이 찾아오는 불멸의 영감’으로 캔버스를 한 순간에 완성시키는 예술가의 모습은 그저 신화 속 얘기인 듯합니다. 드물게 찾아오는 짧은 영감의 순간 이후에는 지극한 노동의 헌신에 의해서야 비로소 이들 작가의 세계는 정교하게 직조되고, 충실한 예술성으로 채워지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전시 전경 2

공존하는 삶, 여성노동에 대한 내러티브를 견고하게 구축해 가고 있는 정정엽의 캔버스는 붉은 팥알갱이들이 거대한 집적이 되어 묵직하게 소용돌이 칩니다. 이 작은 씨앗들은 늘 있어왔으되 눈에 쉬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찮고 무수한 콩, 팥들은 단단한 생명력으로 황량한 벌판을 풍요롭게 채우기도 하고, 광막한 밤하늘을 밝히는 빛이 되기도 합니다. 노경희의 숲 풍경은 캔버스 끝자락의 볼품없는 풀잎 하나가 바람에 흔들리는 듯한 환영을 불러올 만큼 지독스럽게 정밀합니다. 세상의 소란스러움 이 배경으로 물러난 듯한 적요의 숲 풍경 어딘가에 찰나와 영원이 하나가 되는 신비가 숨겨져 있을 것만 같습니다. 이 숨막힐 정도의 극한의 밀도를 위해 작품을 내내 붙들고 있는 작가 탓에 기획자는 종종 속이 탑니다.

전시 전경 3

하트를 단골 소재로 다루는 김들내는 그 도상과는 어울리지 않는 듯한 허무의 의미를 새겨 넣는 데 더 많은 공을 들입니다. 화려함과 지극한 묘사를 입은 빛나는 실존의 본색이 결국은 녹아내리는 초콜릿처럼 허허롭기 그지없습니다. 초콜릿의 달콤함도, 진주의 영롱함도, 끝내는 사라지거나 퇴색되고 마는 휘황한 것들이 내뿜는 욕망의 에너지가 강렬하면서 왠지 처연합니다. 슬픈 낭만 같습니다. 그에 비해 이지영은 세상 단출한 연필선을 무한으로 긋고 겹치는 방식을 고수합니다. 종이를 매개로 흑연이라는 광물의 흔적을 드러내는 연필은 존재의 미세한 떨림부터 심연의 깊이까지 양극 사이의 무수한 지점들을 기막히게 포착해 내는 매체입니다. 그 가는 선으로 섬약한 흔들림을 품은 야생화 무리와 그것들과 사이좋게 이웃하는 사람들 모습을 한땀한땀 수놓듯 채워나갑니다. 그렇게 검은 선들은 모여서 신비로운 꽃밭도 되고, 어둠 속 시커먼 망망대해도 됩니다.

전시 전경 4

최고의 손노동 기법으로 여겨지는 천년 전통의 나전칠기기법으로 현대자개회화 연작을 이어오고 있는 정직성은 이 작업으로 목디스크를 얻었다고 합니다. 칠흑의 옻칠과 대비되는 오색빛 자개의 물성으로 바람과 기계의 역동성을 추상의 언어로 제시합니다. 생명의 본질인 흔들림, 기계 굉음 가득한 노동현장의 에너지를 특유의 과감한 붓터치 대신 자개로 섬세하게 실어냅니다. 작가는 때론 이 고된 과정이 헛되게 느껴지기도 하는가 봅니다. 하지만 마음을 새겨내는 노동으로 타인과 깊게 공명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도 품어본다고 합니다.

정성과 수고로움으로 채워진 캔버스를 마주하는 일은 경이롭습니다. 작가들마다 각기 다른 호흡과 다른 결로 숙련된 손끝으로 긴 시간을 경작해가는 고단함의 리듬이 고스란히 드러나 보이기 때문입니다. 예술이란, 작품 속에 쌓여있는 시간과 노동의 헌신이 그 헛됨과 무용함으로 비로소 존재의 의미를 갖게 되기에 더더욱 거부할 수 없는 매혹의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작가들에게 작업은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해 끊임없이 달려가는 과정입니다. 자신과 세상을 향한 불안이 예술가의 본질인 까닭에 인간과 세계라는 두 존재의 경계를 끊임없이 서성이며 탐색하는 것입니다. 작가들에게서 불안이 물러나는 일은 좀처럼 없을 것입니다. 그저 작품의 질료삼아 끌어안는 방법뿐입니다. 그래서 예술을 한다는 건, 좀, 쓸쓸한 일일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이 수고로움을 이어가는 것을 감히,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김현진, 갤러리밈 전시기획자

갤러리밈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5길 3
+82 2 733 88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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