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5. 15 - 7. 12 | [GALLERIES] GalleryMEME
곽남신
[미학적 히스테리 환자의 바니타스와 웃음]
김원방 (평론가, 작가)
작품과 작가의 관계는 본래 상호반영적인 관계이다. 서로가 서로의 거울이 되어 비춘다는 뜻이다. 작가는 작품이 ‘자기의 내면이 투영된 이마고(imago)’라고 생각하며 작업을 시작하지만, 일단 새로운 작품을 완성하고 나면 그 작품에서 전혀 예기치 못했던 생소한 자신을 발견하기 일쑤이고, 이 때 자신에 대한 그간의 고정관념은 전복된다. 예술적 창조 과정에는 새로운 작품을 통해 과거에 자신이 스스로에게 부과한 고정관념 또는 세상이 ‘대세’로서 강요하는 인습적 틀 모두를 깨고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는 미시적인 파괴와 혁명의 사건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바로 이러한 사건들이 바로 작업을 지속시키는 추진력이자 행복감이다. 이것을 요즘 회자되는 정신분석학 개념을 빌려 설명하자면, ‘히스테리적 주체'(욕망이 억압된 사람)의 삶과 흡사하다. 히스테리적 주체는 이 세상의 지배적 가치나 규범에 의해 자신의 진정한 욕망이 억압되고 이로 인한 병증에 시달리는 주체이다. 그러나 그는 그 병증을 계기로 스스로를 통찰하고 결국 더욱 진정한 자기를 향해 나아간다.
갤러리밈 ‘누구세요’ 전시전경
곽남신의 70~80년대 청년기 작업과 당시 시대적 정황을 살펴보면 그러한 히스테리 주체로서의 욕망과 작은 혁명들의 궤적이 선명히 확인된다. 그는 연필로 그림자 만을 희미하게 그리는 ‘그림자’ 연작으로 첫 작업을 개시했다. 그 자신도 토로하듯이, 이 작업은 70년대 미술계에 주도적 대세라고 자칭했던 ‘모더니스트 추상’ 혹은 ‘한국적 모노크롬'(이를 비평적으로 엄밀히 정의하면 ‘단색조 추상’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의 틀을 벗어나려는 의미있는 몸짓이었다. 그의 그림자 연작은 얼핏 단색조 평면추상인 듯한 느낌을 지니긴 했지만, 그림자의 구체적 형상성을 유지함으로써 ‘형상과 의미에 대한 갈망’을 분명히 드러낸 작품이었다(그는 “저의 내면적 욕구는 반대적인 성향이었고, 왜 그림에서 의미나 정서는 배제되어야 하는지 의문을 품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것은 ‘미학적 히스테리 환자’가 표출한, 외양은 소심하지만 내면은 격렬한 증상이자 저항적 선언이었다. 그리고 이 그림자 연작에는 이후 그의 전 작업의 지향점, 즉 ‘자유로운 의미와 상상’, ‘물질의 감각’의 추구가 이미 예고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에게 큰 의미가 있는 작업이다.
갤러리밈 ‘누구세요’ 전시전경
이후 행한 작업들, 예를 들어 우연히 습득한 정체불명의 오브제 파편들을 화면에 붙이거나 설치작업으로 실행한 ‘이콘’ 연작들에서는 앞서 말한 한국적 모더니즘에 대한 거부는 물론, 80년대 중반에 폭발하여 또 하나의 대세를 이룬 민중미술의 교조적, 정치 프로퍼갠더적 미술에 대한 거부감이 드러나 있고, 그는 이러한 두가지 지배적 주류를 벗어나 ‘이미 희생되거나 상실, 억압되고 있다고 생각되는 제3의 가능성’을 추구해 나갔다. 당시 민중미술은 그것이 가장 적대시했던 한국적 모더니즘 계열과 큰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후자가 ‘의미와 형상이 삭제된 비재현의 무념무상’을 공동선으로 율법화하려 했다면, 전자는 반대로 ‘형상을 일사분란하게 체제화하고 훈육적 기능을 최종목표로 하는 사회주의적 리얼리즘 양식을 신봉’했다는 점에서 양자는 모두 전체주의적이고 교조주의적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곽남신은 당시 두 부류의 미술들을 모두 ‘파시스트적이고 전체주의적’인 미술로 간주했던 것으로 필자는 기억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곽남신은 ‘그 두가지 권력에 모두 반대하면서 억압된 의미의 증상적 해방을 갈구한 포스트모던 히스테리 환자’ 정도로 간주될 수 있겠다. 그러면 ‘이야기와 형상의 황량한 부재’도 아니고, 그렇다고 ‘관객의 뇌 속으로 강압적으로 침입하는 훈육자’도 아닌, 그래서 ‘형상, 의미, 읽기, 상상이 자유롭게 스스로 창발, 생성되는 모체(matrix) 같은 작품’을 그는 어떤 방법으로 만들어내려 했을까? 나는 이 글에서 두 가지를 집어내고자 한다.
누구세요(Who is that-green), 90.9×72.7cm,캔버스에 아크릴릭, 2024
첫째는 ‘바니타스 회화'(Vanitas Painting)의 특징, 또는 ‘알레고리적 특징’이다. 90년대 후반의 ‘이콘’ 연작들, 그리고 <옴 바니미니 바아바데> 같은 설치작을 보면, 우연히 습득된 물건 파편들, 즉 의미의 맥락을 상실한 오브제들이 중요한 구성요소이다. “오물(dust)이란 본래의 장소를 벗어난 사물이라고 정의된다”라는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Lévi-Strauss)의 말이 웅변하듯, 그 파편적 오브제들은 본래의 언어적 통사구조에서 벗어남으로 인해서 ‘기의'(記意) 즉 ‘본래의 뜻’이 허공에 날아가 버린 쓰레기가 된다(물론 위생학적 쓰레기가 아니라 ‘장소에서 벗어난 언어’ 혹은 ‘이상한 외국어’라는 뜻이다). 그러한 상황은 우리의 정신을 해방, 이탈, 규범의 위반, 심지어 타락, 웃음 등으로 이끌고 간다. 이는 16-18세기에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한 바니타스 회화에서 낡은 고물들, 시든 꽃, 해골, 심지어 동물의 시체로 채워진 화면과 비교해 볼 수 있다. 이 연작뿐만 아니라 2000년대 이후 집중하고 있는 일종의 ‘눈속임 그림'(Trompe-l’oeil) 연작, 즉 인물들의 그림자, 윤곽선, 실물과 재현이 뒤얽히는 유희를 통해 착시를 일으키는 작업에 대해서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이 작품들은 종종 해학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마치 영화에서 추출한 스틸사진(movie still)이나 오래되어 빛바랜 사진처럼 이미 소멸한 실물이 수반하는 우울한 알레고리도 지니고 있다.
친구1 (Mate), 91x73cm, 캔버스에 돌가루, 아크릴릭, 2024
두번째로는 ‘웃음’ 혹은 ‘실소'(失笑)라고 부를 만한 측면이다. 방금 언급한 ‘눈속임 그림’ 또는 ‘인물 그림자’ 연작을 보면, 운동선수, 남과 여, 아이들 등 다양한 인물의 그림자나 윤곽 같은 것들이 마치 무언극이나 그림자극과 같은 분위기로 형상화되고 있다. 이들 연작들은 왠지 유머러스한 상황을 연상시키는데, 작가가 오줌을 허공에 멀리 싸는 상황을 그림과 설치로 시각화한 작품 <멀리 누기>(2002)에서 그러한 유머의 의도가 남김없이 드러난다. 여기서 그가 웃음을 연출하는 또다른 방법은 ‘착시 놀이’로서, 이것은 방금 언급한 그림자극의 특징과는 좀 다른 종류의 웃음을, 정확히 말하면 웃음이라기보다는 ‘실소’를 유발한다. 극히 사실주의적인 미술들, 예를 들어 교훈적 역사화, 민중리얼리즘 미술과 정치프로다간다 미술, 아르놀트 브레커(Arnold Breker) 같은 독일 나치 공식미술가의 조각을 보면, 일사분란하게 체계화, 서사화된 사실주의적 재현을 통해 관객의 머릿속을 옴짝달싹 못하게 구속한다. 이에 반해 곽남신의 이 연작들에서는 재현의 체계 자체가 뒤틀리고 무너져 있다. 극사실적 일루전, 윤곽과 그림자, 실제 사물, 네온 등 상이한 요소들을 짜깁기하여 혼동시키는 눈속임 기법, 특정 시점에서 온전한 형태가 드러나는 아나모포시스(anamorphosis, 歪像) 등을 통해, 관객을 속이고 실소를 유발한다. 실소는 허망함의 체험을 수반한다는 점에서 앞서 말한 바니타스와도 연관된 면일 것이다.
갤러리밈 ‘누구세요’ 전시전경
곽남신의 모든 작업의 저변에는 개인적 기질뿐만 아니라 그가 오랜 시간 고수해 온 예술관이 깔려있다. 그는 앞서 말한 한국적 모더니즘과 민중미술뿐만 아니라, 오늘날 국제미술계를 범람하고 있는 미술들에 대해 분명한 거부감을 천명한다. 예를 들어 전 지구적 재앙들, 전쟁과 테러, 기후변화, 인종차별, 젠더문제, 녹색 단체들의 급진적 운동 등, 지구의 모든 위기의 이미지들을 긁어모아 전시장에 산적해 놓고, 인류의 십자가를 짊어진 성직자의 역할을 흉내내는 예술들에 대해 비판적이다. 나는 그런 미술들의 저변에는, 물신주의적 유사종교, 과한 선지자 의식이 깔려 있다고 생각되고 곽남신도 그러한 관점에 대체적으로 동의한다. 그러한 미술들에는 니이체가 짜라투스트라의 입을 빌어 갈구한 ‘아이 같은 자유로운 정신’이 깃들기는 힘들어 보인다. 곽남신은 예술이 더 작고 겸손하며, 피부에 와닿아 실감나는 재미, 진실한 아름다움을 지니는 활동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작가이다.
갤러리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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