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2. 16 - 3. 9 | [GALLERIES] GALLERY MAC
강혜은
<흩뿌려진 풍경 속 색선(色線)의 향연>
실을 직조하여 옷감을 만들어 온 역사는 길다. 그 오래된 역사는 대부분 여성의 역할로 이어져왔다. 일의 성격상 아이를 양육하는 것과 병행하기에 가장 쉬웠기 때문일 것이다. 카시아 세인트 클레어가 실의 역사에 주목하여 쓴 『총보다 강한 실』에 따르면 산업혁명 이전까지 수백만 명의 여성들이 뽕잎을 따서 누에를 먹이고 손으로 직접 실을 뽑고 베틀 앞에 앉아 손톱이 빠지도록 옷감을 짰다. 방직공장이 생기자 먼지와 소음에 시달리며 주 60시간씩 일을 했다. 실의 역사는 여성의 생활사이자 노동사다. 세로로 길게 늘어뜨린 날실과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씨실을 서로 교차시키며 고단하고 지루하게 엮어간 직물 속에는 여성들의 삶의 애환이 녹아있다. 강혜은작가는 유화물감으로 마치 씨실과 날실이 교차되며 하나의 직물을 만들어가듯 캔버스 위에 수많은 색 선(色線)을 쌓아나간다. 수 백년의 역사 속 여성들이 그러했듯 강혜은작가는 물감에서 무수한 실을 자아내며 여자로서, 또한 작가로서 캔버스 위에 삶의 애환을 풀어낸다.
강혜은, line – piece 2301, 162×112cm, oil on panel, 2023
강혜은 작가의 작품을 처음 마주한 이들은 공통적으로 제일 먼저 재료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언뜻 봐서는 실인지 물감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실처럼 가늘고 긴 색 선들이 층층이 쌓이고 겹쳐져 화면을 가득 채운다. 각기 다른 색의 선들이 중첩되면서 어우러져 시각적으로 폭신하고 보송보송한 촉감이 느껴지는 듯하다. 작가는 10년간의 시행착오 끝에 물감에서 실을 뽑아내는 기법을 완성하였다. 마치 누에가 실을 뽑아 고치를 만들어가듯, 유화물감을 손아귀 힘만으로 적정한 압력을 가하여 굵고 가는 색 선을 뽑아낸다. 팔레트에서 조합한 색상을 붓으로 펴바르는 것이 아니라 물감 덩어리를 손가락의 힘으로 짜내어 선들을 쌓아가며 전체적인 형태와 색감을 조화시킨다. 실처럼 보이는 유화물감의 선들이 겹겹이 겹쳐지면서 층을 만들고 그 사이에 작은 공간을 형성한다. 평면의 캔버스이지만 전체적으로 입체감이 느껴지는 것은 바로 유화물감의 색 선들이 층을 쌓으며 만들어낸 공간 때문이다.
강혜은, line – piece 2345, 162×112cm, oil on panel, 2023
작가가 이러한 기법에 착안한 것은 어머니의 영향이 크다. 1956년생 강혜은 작가는 유년시절을 부산에서 보냈는데, 그녀의 어머니는 부산 서면에서 큰 의상실을 운영하셨다. 의상실 내부에는 옷을 제작할 수 있는 작업실과 작은 공장이 함께 있었고, 어머니가 일을 하실 때면 작가는 그 옆에서 실과 천을 가지고 놀곤 했다. 작가에게 실과 천은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소재이다. 예순의 나이가 넘은 지금도 작가는 실과 천을 만지고 있으면 어린 시절로 돌아가 어머니의 품 속에 있는 것 같은 편안함을 느낀다고 한다. 초창기 작품은 실과 천, 물감을 이용한 콜라주(collage) 작업이나 스크래치(scratch), 테이핑(taping), 드리핑(dripping) 등 끊임없는 선(線)작업이 중심이었다. 하늘의 뜻을 알게 된다는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그녀는 유화물감에서 실을 뽑아내는 듯한 기법을 처음 시도한다. 이때의 작업은 당시 작가가 일상에서 늘 마주하는 자연의 모습을 구상적인 형상으로 표현한 것들이다. 결혼 후 남편을 따라 20년간 자연 속에 묻혀 자연의 일부로 생활해 온 작가의 일상이 테마가 되어 캔버스를 구성한다. 몇 년간 지속된 작가만의 독창적인 시도는 어느새 섬세하고 화려한 동양자수를 연상시킬 만큼 물감의 굵기가 명주실처럼 가늘게 쌓아 올리는 경지에 이른다. 이후 물성을 드러내기 위해 색색이 쌓은 선 사이로 물감을 터트리는 작업, 프랑스 지베르니를 여행한 후 이어진 ’수련‘ 연작, 최근에는 좀 더 추상성을 띄는 자연으로 작업이 이어진다.
강혜은, line – piece 2403, 80×80cm, oil on panel, 2024
물감을 건조시키는 데 시간이 필요한 유화의 특성상 작가는 캔버스를 이젤에 세워서 작업할 수 없다. 작가는 항상 캔버스를 바닥에 눕힌 채 허리를 숙여서 물감을 손으로 흩뿌리듯 작업한다. 작가는 이러한 작업 과정 자체가 일종의 수련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고행에 더 가깝다. 호흡을 조절하고, 손 끝에 온 신경을 집중하여 작업을 하면 어느새 마음도 숙연해진다. 물감 덩어리를 손에 꼭 쥐고 색 선을 잣다보면 어린 시절 행복했던 기억과 그 시절을 향한 그리움이 응축되어 캔버스 위에 쌓인다. 옛 여인들이 손으로 직접 실을 뽑고 베틀 앞에 앉아 옷감을 짜듯, 강혜은 작가는 캔버스 위로 허리를 굽혀 끊임없이 고단하고 지루하게 선을 쌓아 작품을 완성한다.
강혜은, line-piece 2332, 145.5,×89.4cm, oil on panel, 2023
최근에는 앞서 잠시 언급했듯, 구상의 형태를 무너뜨리며 색(色)과 형(形)으로부터 좀 더 자유로운 작업을 시도한다. 이전의 작업들이 작품의 완성도 면에 집중하는 과정이었다면, 현재의 작업은 ‘작업을 하는 행위’ 그 자체에 집중하여 좀 더 생동감 넘치고 에너지가 느껴지는 작업을 한다. 이번 맥화랑 개인전에서 선보이는 20여 점의 작업은 지난 겨우내 작업실에서 꼼짝 않고 작업에만 전념한 결과물이다. 어떠한 형태를 만들어내는 것에 집중했던 것이 지난 세월의 결과물이라 하면, 작년 하반기부터 이번 개인전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그렇게 만들어냈던 색(色)과 형(形)으로부터 다시 자유로워지고자 함이다. 어른답게 나이가 든다는 것, 멋있게 늙는다는 것은 무언가에 사로잡혀있던 ’고집‘과 ’아집‘을 스스로 내려놓고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번 전시를 통해 만날 수 있는 강혜은 작가의 작품을 통해 ’자유로워짐‘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 맥화랑 큐레이터 김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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