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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OCI YOUNG CREATIVES 양하 개인전 《오픈더윈도우》

양하

양하_Well, It’s a Scene Made to Cry, So I Will-41_oil and acrylic on canvas_150×180㎝_2023

폭력을 경험한 사람에게 폭력의 이미지는 폭력을 둘러싼 모든 감각을 일시에 소환시킨다. 이는 불가피한 감각으로써 이미지의 현실감에 따라 좌우되는 경험은 아니다. 예컨대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폭력의 이미지조차 기억으로서의 폭력과 언제나 직접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통로가 된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폭발의 장면은 꽤 익숙한 이미지인 데에 비해 잘 모르는 사건이다. 폭발은 일시에 있던 것을 없애고, 온전하던 것을 부순다. 폭발은 지표면의 위아래에서 예고 없이 들이닥쳐 표면에 쌓은 흔적을 무화시킨다. 요컨대 폭발은 꽤 순수한 종류의 폭력이다. 그러나 뉴스, 다큐멘터리, 영화, 사진 등에 남은 폭발의 장면은 심지어 하루에 몇 번을 보더라도 그다지 충격적인 이미지로 남지 않는다. 아무래도 우리는 폭발의 이미지에 꽤 ‘면역’되어 있다. 겪어보지 못한 위협의 이미지에 어떤 식으로든 공감하며 나름대로 고통을 소화하기보다는 모든 이미지를 그저 ‘셀피’의 연장선 안에서 용해한다. 그만큼 이미지로서의 폭발에 관해서라면 우리는 이미 고통의 감각에 관한 기능을 이미 상실한 지 오래라고 봐야 한다. 어쩌면 폭발의 이미지가 저장되고 소비되는 장소가 여느 광고, 셀피가 업로드되는 장소와 다르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폭발을 그린 회화는 무언가를 다르게 만들 수 있을까?

양하_A Drawing for Blowing Up-20_oil and acrylic on canvas_129.4×99㎝_2023

양하는 세상과 나 사이에서 벌어지는 ‘얇은 감정(thin emotion)’을 여러 방면으로 탐구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 결코 평온해질 수 없는 이 감정은 때로는 친숙하고 무해한 곰인형의 얼굴로, 때로는 분노하는 마리아의 얼굴로 나타났다. 그가 2020년부터 다뤄오고 있는 폭발의 이미지 역시 ‘얇은 감정’의  연장선으로 독해할 수 있다. 눈물을 흘리는 저항의 아이콘 마리아와 납작하고 평평한 폭발의 저주는 성경이라는 절대적인 세계를 공유한다. 그러나 폭발의 이미지는 양하의 작업 안에서 점차 독자적인 위상으로 자리매김하는 중이다. 언젠가 양하는 ‘폭발의 이미지에 끌린다’고 말한 적이 있다. 끌림이란 언제나 언어 바깥에 있는 종류의 강력한 동기를 가진 감정으로써 때로는 가장 선명하고 거짓 없는 정동이다. 작가가 겪은 끌림에 관해 짐작하거나 끌림의 감각 경로를 상상해 보는 과정에서, 작가가 어떤 입장들 사이의 갈등에 관심을 가졌던 것인지는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그가 캔버스 안에서 새롭게 창출한 폭발의 이미지는 그가 참조로 삼은 폭발의 가해자와 피해자, 즉 주인공을 지시하지 않는다. 폭발은 이미지 그 자체로서 자립한다.

양하_A Drawing for Blowing Up-24_acrylic on canvas_140×180㎝_2023

독자적 이미지로 분리된 폭발의 시각적 경험은 그것의 ‘숭고한’ 내면만큼이나 ‘세속적’인 주장을 꺼린다. 양하가 그리는 이미지의 내용은 오히려 이미지를 구성한 재료의 물성과 더 긴밀한 연결고리를 갖는다. 그는 그림에서 유성과 수성 재료의 섞이지 않는 특성을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예컨대 아크릴로 만들어 낸 공간 위에 유화로 그려낸 폭발의 이미지라던가, 다시 그 위에 스프레이나 색연필을 더해 회화의 경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선택들이 눈에 띈다. 아크릴을 묽게 사용해 표현된 공간의 형태는 금방이라도 대기 중으로 날아가 버릴 것처럼 유약하다. 벽과 벽 사이, 벽과 바닥 면 사이, 벽과 천장 사이, 무엇보다 창문과 발코니 등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지시적인 성격의 선명한 공간감과 달리 이곳저곳 울퉁불퉁하게 어긋나 금방이라도 사라져 버릴 것처럼 흘러내리는 삼차원이다. 반면 제법 명확히 실내에서 벌어진 사건임을 드러내는 폭발 자체의 이미지는 꽤 견고하고 밀도가 높다. 폭발의 가장 실질적 폭력인 충돌이 무엇을 붕괴하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양하는 충돌 이후 불투명한 그러데이션으로 제 존재감을 드러내는 연기의 형태를 다룸으로써, 그 연기 안에 어떤 비참과 괴로움이 있는지 단언할 수 없게 만든다. 그리고 이때 양하는 자칫 심각하고 진지하게만 여겨질 수 있는 폭발의 이미지에 스프레이나 색연필로 엉성한 윤곽을 만들어 밀도에 균열을 더한다.

양하_A Drawing for Blowing Up-31_oil and acrylic on canvas_40×40㎝_2023

한편 양하가 그리는 폭발의 이미지는 자연현상에 의한 폭발로 읽히지 않는다. 폭탄이나 미사일 등에 의한 인공적인 폭발에 더 가깝게 느껴지지만, 그도 명확하지는 않다. 다만 언제 터졌는지 알 수 없는 폭발의 잔해와 피어오른 연기가 배치된 장소가 자연현상에 의한 폭발이라는 판단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 뿐이다. 그 장소는 한편으로는 나름의 규칙을 가진 공간이다. 공간마다 서로 다른 규모, 색, 투명도를 가졌고, 창문이나 발코니의 배치 또한 다르지만, 양하의 마음속에서 그곳은 언제나 하나의 공간을 가리킨다. 그 공간이란 서로 다른 의미망을 연결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장소로써, 무엇보다 작가가 반복해서 저 스스로를 훈련하고 다짐하게끔 하는 수행적인 영역으로도 읽힌다. 그 수행성은 세상과 나 사이의 얇은 감정이 결코 무뎌지지 않도록 벼리는 태도와 유사하다. 무심하게 폭발의 존재감을 강조하는 것 같았던 그의 그림 중 눈에 띄게 캔버스 측면의 테두리를 가진 그림들은 공간 경험을 더욱 두드러지게 한다. 양하는 캔버스 안에서 계속해서 발언 가능한 공간을 창출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때의 발언이란 소리를 갖지 않는다. 휴먼 스케일을 압도하며 가장 큰 굉음을 가질 법한 폭발조차 양하의 그림 속에서 아무런 음향을 갖지 못한다. 그것은 철저하게 침묵 속에 놓여있다.

그 폭발이 침묵 안에서 제 모양을 선명히 가지고 있을수록 미묘한 긴장감이 팽창한다. 양하의 그림 앞에 선 누구든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목격자가 된다. 그림의 마지막 과정으로 덧붙인 스프레이나 색연필의 윤곽이 희망차고 밝게 느껴지는 만큼 그림은 차갑게 냉소한다. 웃음이라고는 있을 수 없는 비극적인 상황에서 입꼬리를 올리는 주인공을 마주할 때처럼, 산뜻하고 가볍게 물든 그림에서 느껴지는 가열한 명랑과 웃음은 대상이 불분명한 복수(revenge)의 감정을 포함한다. 그런 점에서 양하의 그림에 등장한 폭발은 양가적인 의미망을 만든다. “울라고 만든 장면이니 울어야지, 뭐”라는 그의 시리즈 제목처럼 양하의 언어는 마치 잃어버린 비참에 관한 가장 마지막의 조소 같기도, 회복 불가능해 보이는 마비된 감각 기능에 일말의 희망을 기대하는 낙관 같기도 하다.

양하_Well, It’s a Scene Made to Cry, So I Will-35_oil and acrylic on canvas_120×149㎝_2022

그 폭발이 침묵 안에서 제 모양을 선명히 가지고 있을수록 미묘한 긴장감이 팽창한다. 양하의 그림에서 폭발의 이미지는 점차 만개한 꽃처럼 식물화되고, 더러는 평온한 실내 공간의 정물을 그린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폭발 안에 또 다른 폭발이 자리하거나, 폭발의 이미지가 그 자체로 분열하고 있는 듯한 이미지로 진화하기도 한다. 이때 언어로 환원 불가능한 폭발을 둘러싼 서로 다른 반응과 의미 체계는 양하가 다루는 폭발의 이미지를 더욱 추상화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달리 말해 작가의 이미지 언어로 번안된 폭발에서 명확한 하나의 의미를 지시하는 구상적 이미지는 탈락된다. 이미지가 주는 감각의 잠재성은 마치 ‘유전되는 트라우마’처럼 감각하는 개별자에게 저마다의 출처로써 선명해질 뿐이다.

이 과정에서 폭발이라는 하나의 불분명한 사건은 각자가 겪은 개별 경험으로 전환되며, 이미지는 현실의 사건을 지시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감상자 모두에게 고유한 상(像)을 불러온다. 이는 폭발이라는 사건에 관한 직접경험과는 더 이상 관련이 없다. 오히려 어떻게 작품이 개인의 효능감을 일깨우는가에 관한 항구적인 난제를 다루는 양하 식의 해법이다. 양하의 그림에서 때때로 돌출되곤 하는 폭발 구름의 조각이 실마리를 더해줄지도 모른다. 작가가 ‘그리듯’ 나무 조각의 윤곽을 잡고, 다시 ‘그리듯’ 층을 쌓아 만든 이 조각은 폭발을 지켜보는 누군가들의 감각지를 캔버스 안에 가두지 않는다. 폭발은 언제나, 원래부터 이미, 그림 바깥에 산재한다.

양하_Well, It’s a Scene Made to Cry, So I Will-38_oil and acrylic on canvas_149.5×109㎝_2023

요컨대 양하의 진술은 반어적인 성격을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유약하고 쉽게 흩어지는 것을 빽빽하고 존재감 있게, 거대하고 심각한 것을 단순하고 유치하게 다룬다. 양하의 폭발 이미지 탐구가 예상외의 오랜 시간에 걸쳐 작가를 점유하는 동안 양하는 나름의 지치지 않는 흥미를 발견하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몇몇 질문이 잇따르기 마련이다. 폭발이라는 사건에 달라붙는 사회적 의미와 역사적 맥락의 더께가 떨어져 나간, 순수 이미지로서의 폭발은 과연 얼마만큼 풍부한 창작의 뿌리일 수 있는가? 폭발의 변주된 형태가 지속적으로 목적 없는 즐거움을 창발하고 있는가? 폭발이 담긴 공간은 어떻게 외부의 빛과 대기를 받아들이며 사라질 준비를 할 것인가? 달리 말해 늘 있는 창문은 언제 열리는가? 무엇보다 폭발이 일어난 공간을 지켜보는 화자와 감상자는 언제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것인가?

OCI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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