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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하지 않은 놀라운 힘, 문인수

우리가 한국 현대 미술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작가들은 이우환, 심문섭, 백남준 등에 불과하다. 이우환과 심문섭은 도교에 바탕을 일본의 정원예술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모노파(物派) 또는 미니멀리즘에 가까운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고, 그리고 한국사람이라기 보다는 플럭서스로 더 잘 알려진 백남준은 그가 만들어낸 전기음극선을 사용하여 소리를 내는 작품들을 발표해 오고 있다. 그러나 문인수는 이들과 확실하게 다른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바로 그가 매우 모던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점이 그가 한국사람이 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청바지 를 입고, 햄버거를 먹더라도 나는 한국인이다. ” 라고 말하곤 한다.

문인수는 전통적인 미술양식으로부터 세례받은 바도 없으며 어떠한 한국현대미술의 어느 한 유형에도 종속될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 채 작업해 왔고, 국제적인 경향 ‥‥ 모든 이들이 더이상 어떤 취향도 지니고 있지 않음을 인정하고 새로운 무엇인가를 추구해야 하는 것으로 부터도 자유로운 위치에 있다.

젊은 문인수의 상상력은 전쟁으로부터 야기된 파괴와 뒤따르는 재건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37세의 작가는 전쟁으로 황폐해진 외딴 시골마을에서 성장했다. 그는 가슴을 에는 상처 를 지니고 부서진 집들을 보아야만 했고, 공장지대의 시멘트 벽돌, 좁다란 논길 옆으로 흐르 는 실개천을 보면서 자랐다.

그는 열두살때 이미 예술가가 될 결심을 하였다고 한다. 그때부터 수많은 소묘를 했고 풍경화를 그렸다고 한다. 그는 시력이 약해질 정도로 소묘에 몰두했고 많은 시간을 학교 미술실에서 시간을 보냈으며 때로는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고 한다. 따라서 그의 선은 이미 많은 힘을 가진 것이었다고 한다.

열다섯살 되던 해 그는 예술학교에 (한국의 예술분야의 교육기관들은 대부분 사립이다) 입학하여 열 여덟살에 졸업을 하였다. 그는 당시 화가가 되려고 한다고 한다. 60년대 말 한국에서 미술이란 전적으로 회화를 뜻했다.

그러나 그의 소묘에서 힘을 감지한 지도교사는 조각을 전공할 것을 권했다. 따라서 그는 자연스럽게 조각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한국에서의 미술교육은 매우 전통적인 흥미로운 과정을 요구한다. 그도 이에 따라 두상을 만드는 것을 시작으로 조각을 접하게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문인수는 한국에서의 미술교육과정중 다른 어떤 것에도 관심을 돌릴 여유가 없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대학생활을 보냈다고 술회한다. 그러나 이 당시 그는 조각에 대한 구체적인 촉감을 익힐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고 한다. 그의 대학생활중에는 한국현대미술의 많은 운동들이 교차하는 시기였다. 추상에 대한 관심 과 앙포르멜의 열풍 그리고 이후 미술의 본질에 접근하려는 단순하면서도 사변적인 환원주의적 미니멀리즘등이 급속하게 진행되던 와중에서 대학생활을 보내게 되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매우 암울한 시기였다고 한다. 그가 좋아하는 조각가들을 들라는 질문에 그는 안토니 까로, 칠리다 그리고 국내조각가로는 심문섭과 동년배인 돌을 주로 다루는 박석원 등을 든다.

특히 그가 스스로 매우 동양적이라고 느끼고 있는 리차드 세라를 빼놓지 않고 있다. 이 동양적이라는 어휘와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묘하게도 그는 그의 집에서 편안하고 조용하며 안온한 느낌을 갖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결코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작업의 모티브를 취하고 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자신의 작업의 근거는 작가 자신이 스스로 술회하고 있듯이 파괴된 길, 그리고 그것을 다시 세우고, 고치는 광경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또한 그의 영감의 또 다른 하나는 한국전쟁 이후 남한과 북한을 구분짓는 불확실한 전쟁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며, 전쟁의 상흔을 간직하고 휴전선을 중심으로 남과 북으로 2킬로미터씩 동서를 관통하고 있는 시멘트 장벽으로 상징되는 비무장지대 같은 상황이라고 한다.

그의 부모님은 한국전쟁으로 인해 고향을 떠나온 실향민이고, 실향민의 후손인 그는 비무장지대에서 매우 가까운 곳의 허술한 농장가운데 작업장을 가지고 있다.

그의 작업실을 가기 위해서는 계단식 논이 있는 야트막한 산허리를 가로질러야 한다. 해오라기들이 조용하면서도 아름답게 날고있는 목가적인 풍경이 매우 평화로와 보이지만 그곳으로부터 불과 10킬로미터 이내에 한국의 분단의 상징인 비무장지대가 위치하고 있다. 물론 그 비무장지대가 그곳에서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문인수는 자주 그곳에 대해 말하곤 했다.

좁은 논두렁을 따라 거슬러 올라 가다보면 그의 작업실에 이르게 된다. 문을 밀치고 들어가 면 마당에는 왜 많은 작품들의 파편이 널부러져 있다. 작업실 내부도 예외는 아니어서 패여 있는 바닥에 작품들의 부스러기들은 여기저기에 널려있다. 벽에는 볼테르 흉상이 한눈에 들 어오고, 에꼴 드 서울등 많은 전시회 포스터들이 여기저기 놓여있고, 가스통과 가스관, 용접 마스크들, 안락의자들,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탁자들, 전축, 벽시계, 작업복들 그리고 수많은 잡동사니들이 제각각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문인수는 이곳에서 매일 작업을 하며 지낸다. 때로는 며칠씩 이곳에서 작업에 몰두하기도 한다. 문인수의 성격은 매우 신중하며 수줍음을 잘타고 과묵한 탓에 속내를 잘 드러내놓지 않는다. 그는 그의 조각을 통해 아름다움만을 추구하고 있기보다는 무엇보다도 그것이 유용하게 쓰일 수 있기를 원하는 편이다. 또한 작품은 작가가 행위가 그대로 담겨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만 관객들이 가식없이 작품가까이 다가와 그것의 실체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라 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조각은 추상적이며 도시적이다. 그는 무거운 철판과 가로로 시멘트 덩어리를 관통하고 있는 구멍, 삐져 나온 철근 등을 통해 그가 어렸을 적 보아왔던 것들을 다시 발견하곤 한다고 한다. 그의 조각은 일반적으로 커다란 패치워크로 여러개를 주워 모아 덧대어 깁는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매우 강하면서도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동시에 구가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작품들은 창조의 힘과 파괴의 힘이 교차하면서 격렬하게 충돌하고 있는 것 같지만 매우 단순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작품들은 작가가 노력한 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간이 지나 마모되고 녹이 슬수록 친근해지며 직접적으로 다가오게 된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즈음하여 서울에서 문인수의 작품들을 보았을 때 나는 그의 작품이 가지고 있는 놀라운 힘과 아름다움에 감동되었다. 세라 이후, 나는 그의 작품보다 더 직접적이고 분명하며, 강력한 힘과 아름다움을 지닌 작품을 결코 본 적이 없다.

나는 최근, 서울과 김포의 후평리 그의 작업장에서 다시 그의 작품들을 볼 수 있었다. 최근의 그의 작품들은 변화를 떠나 잔잔한 느낌을 주며 더 조용해져서 적막감마저 도는 듯 하였고 안정된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변함없이 단순성을 유지하면서 힘을 지니고 있다.

문인수는 서울에서 그리 잘 알려진 작가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상황으로 봐서 45세 미만 의 작가가 독립된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물론 국외에서 한국의 그러한 상황에 대해서는 더이상 언급을 하기 않기로 하자.

그러나 나는 그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나의 문인수에 대한 확신은 다른 이들 한테서는 느낄 수 없는 확신이다. 우리는 이제부터 그에 대해 확신을 가져야만 할 것이다. 이제 많은 이들이 그에 대하여 다시 이야기를 할 날이 곧 올 것이다.

* 이 글은 1993년 3월 18일부터 4월 25일까지 대한민국 문화부와 외무부 파리시 그리고 프랑스 문화성이 주최한 “한국의 달” 행사의 일환으로 파리의 몽 쁘엥에서 열린 문인수개인전 도록의 미엘 누리자니의 글을 번역 개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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