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GALLERIES] Arario Gallery Seoul
2023. 2. 1 – 3. 18
권오상, 이동욱, 김인배, 안지산, 노상호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이 1년 간의 장소 이전 및 재정비 시간을 끝내고 마침내 2023년 2월 1일 새로운 모습으로 문을 연다. 장소는 이전의 종로구 소격동에서 이동해서 원서동의 옛 공간사옥 부지이자 현 아라리오뮤지엄 바로 옆으로 옮겼다. 갤러리의 건축 디자인은 일본 스키마타 건축 (Schemata Architects)의 대표이자 세계적인 건축 디자이너 조 나가사카(Jo Nagasaka)가 함께했다. 스키마타 건축은 지하 1층부터 지상 6층까지의 기존 건물을 개조하되 완전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만드는 것이 아닌 기존 건물의 구조와 재료, 외벽의 벽돌 외관을 유지하면서 바로 옆에 위치한 김수근 건축가의 옛 공간사옥과 조화를 이루는 건물을 만드는 데 주안점을 뒀다. 결과적으로 옛 공간 사옥과 유리건물인 신사옥이 만들어내는 대비처럼,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의 검정색 외관과 갤러리 내부의 밝은 화이트큐브가 만들어내는 극명한 대비가 매력인 공간으로 탄생했다.
아라리오갤러리의 2023년 첫 전시이자 서울 지점의 이전 재개관 첫 그룹전인 <낭만적 아이러니 Roman Irony>는 갤러리와 오랫동안 함께 성장해온 작가 5인, 권오상, 이동욱, 김인배, 안지산, 노상호가 참여하는 그룹전으로 준비되었다. 전시는 독일 낭만주의의 이론적 기수 프리드리히 슐레겔(F. Schlegel)이 정립한 ‘낭만적 아이러니(Romantic Irony)’라는 양극에 위치한 사유들을 오가면서 변화하는 과정 그 자체를 긍정하고 주목하는 사유의 한 방법론 속에서 기획되었다. 이 과정은 결과를 쉽게 유추해낼 수 있는 일반적인 반전 제시나 아이러니 효과를 넘어선 그 이상을 바라보려는 시도이다. 대부분의 미술가들은 이런 식의 태도를 견지하며 그 과정에 따른 긴장감 넘치고 정답과 결과가 없는 무한한 사유를 작품이라는 결과물로 이끌어내는 이들일 것이다. 본 전시는 참여 작가 5인들의 작품들 속에서 이런 낭만적 아이러니적 태도들과 그 반성적 성질들을 포착해 보고자 한다. 오래된 건물이라 작지만 지하 1층부터 6층까지 있는 건물의 특성을 이용해서 본 전시는 전시 공간으로 할애된 지하 1층부터 4층까지의 각 층을 한 명씩의 작가가 맡는 형식으로 구성되었다. 더불어 향후에는 일반 관람객 공개가 안 될 사적 공간인 5층 공간도 개관전을 위해 전시 공간으로 제공해 관람객들이 전시된 작품들 너머 보이는 아름다운 창경궁과 원서 공원을 함께 감상할 수 있는 기회도 마련했다.
이번 전시에서 권오상 작가는 자신의 대표 매체인 사진 조각에서 최근 집중적으로 시도해온 다양한 형태적 실험들을 소개한다. 과거 구상 조각에 가까웠던 형태들이 근작들에서는 구상과 추상의 경계에 서 있는데, 이들의 공통점은 극도의 조형미 추구와 공간성 탐구에 있는 듯 하다. 총 7점 출품된 작품들 중 전반적으로 두드러지는 특징은 헨리 무어(Henry Moore) 조각을 오마주하고 그대로 형상화해가면서 추상적 형체와 유기적 구성에 기반한 독특한 인체 조각 연구에 대한 담론을 제기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 형상화된 표면에 권오상 작가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미지 채집과 유희적 콜라주가 더해져 구조와 표면의 아름다움을 모두 쫓는 권오상 식 조형 미학을 완성한다. 그 결과 출품된 각각의 작품들은 권오상 작가의 작품에서 흔히 발견되는 형태에서 발현되는 공간미와 분절된 이미지들이 만들어내는 미학이 서로 융합되는 매력을 표출한다. 헨리 무어 조각에서 파생된 작품들과 별도로 인물 흉상도 2점 출품된다. 작가는 최근 몇 년 특유의 사실적 묘사에서 벗어나 추상으로 넘어가는 반추상적인 인물 연작들에 집중해오고 있다. 이들 흉상에서는 조각의 자율성과 확장된 표현에 대한 작가적 시도를 느낄 수 있고, 대상을 똑같이 만들어내는 접근법이 아닌 공간과 표현의 중점이 되는 조형 요소와 원리로의 고민으로 관람객을 이끈다.
이동욱 작가는 5점의 신작을 선보인다. 이번 신작들에서 작가는 최근 관심사인 인간을 둘러싼 공간이나 건축, 그리고 기하학적 구조물들과의 공존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 구조적으로는 이동욱 작가를 대표하는 15센티 내외의 작은 벌거벗은 인물상의 전신 혹은 신체의 일부가 존재하고, 그 인물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다양한 상황들로 표현된다. 전시는 5개의 작품으로 분리되어 있지만 작품 간 형성된 묘한 긴장감으로 인해 전시장 전체가 마치 하나의 작품인 것 같은 인상을 전달한다. 우선 전시장 중앙에는 미끄럼틀을 연상시키는 거친 구조물이 설치되어 있는데, 알루미늄의 차갑고 반짝거리는 느낌과 피부를 연상케 하는 분홍색 물질들의 공존이 매력인 이 작품은 인간과 그것을 둘러싼 여러 인공적 구조물 간 분리할 수 없는 태생적 밀접성과 끈적한 관계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더불어 주변부에 배치된 각각의 작품들에서의 인물들은 건축 자재인 알루미늄 허니콤 패널에 갇혀 옴짝달싹 할 수 없게 붙들려 있다. 한 작품에서는 잡혀 있을 뿐 아니라 조금이라도 균형을 잃으면 무너질 수 밖에 없는 구조에서 간신히 지탱하고 있는 인물상도 표현되어 있다. 이번 전시에서도 인공적 구조물과 인간의 차갑고 끈적한 공존이 두드러진 설치 작품과 그 주변부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인물 군상들이 끌어내는 긴장감을 통해 이동욱 작가의 강점인 시각이 주는 일차적인 미적 쾌감과 함께 내밀하게 찾아오는 인간에 대한 통찰을 읽어낼 수 있다.
김인배 작가의 공간은 전시장 한 벽에 꽤 작게 작가가 적어 둔 ‘3개의 안개’라는 제시어와 함께 시작한다. 아이러니하게도 3개의 안개로 시작하는 전시의 작품 수는 총 4개다. 3개와 4개라는 개수에서의 어긋남, 셀 수 없는 명사인 안개에 지정된 3개라는 셀 수 있는 숫자, 눈 앞에 있지만 언제나 명확히 잡히지 않은 안개라는 단어와 함께 시작하는 김인배 작가의 공간은 첫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의도된 혼동을 강요한다. 작가에 따르면 이번 전시에서 소개되는 작품들은 공통적으로 ‘접촉’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이야기하는 접촉들은 못 보거나 만나지 못 하는 지점들에 대한, 즉 접촉하지 못하는 것들을 다룬다. 합판으로 만든 얇은 파주 지도가 켜켜이 쌓여 5.6미터에 이르는 작품 “안개”, 하나의 평면을 중심으로 앞면과 뒷면, 바깥과 안이 마주하는 구조를 만들어낸 작품 “거울”, 각각 정형, 비정형적으로 만들어진 2개의 프로펠러가 등장하는 작품 “변신”, 그리고 분필의 재료로 칠판을, 칠판의 재료로 분필을 만든 작품 “칠판과 분필”, 이 4점의 작품들이 모두 접촉에 대한 작가의 사유를 담고 있다. 작품들은 기존 방식이나 특정 관계에 간섭해서 감상자들의 인지 체계를 교란시키는 데 능한 김인배 작가만의 표현 방식을 통해서 언제나 전체를 한 눈에 볼 수 없고 맹점이 생길 수 밖에 없는 여러 지점들에 대한 고민, 그리고 함께하지만 함께 할 수 없는 관계에 대한 질문 등의 문제의식을 던진다.
안지산 작가의 작품들은 그가 최근까지 집중해온 비 폭풍 속 돌산의 풍경에서 조금 더 나아가 눈 폭풍이라는 새로운 상황 속에서의 사냥과 채집을 다룬다. 스스로 부여한 상황 속에서 잠식된 인간의 불안을 시각화하는 안지산 작가가 그려낸 눈 폭풍 속 풍경은 적막감이 감돌고 극적이다. 사냥과 채집은 자연 속에서 항상 행해지는 가장 자연스러운 생태계의 순환이자 삶의 일상이면서 동시에 그 순간은 최고의 긴장과 공포가 축약된 극적인 순간이다. 이러한 안지산 작가의 풍경은 독일의 낭만주의 화가 카스퍼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 1774-1840) 식 낭만주의적 정신의 숭고함과 충만함이 내재된 풍경을 연상시킨다. 프리드리히의 풍경처럼 언제나 내 눈앞에 존재하는 풍경의 묘사와 인상의 표현에 기초를 두지만 훨씬 더 나아가 불안과 불길함, 그리고 경외감의 감정을 숨김없이 표출한다. 결국 안지산 작가는 인간이 제어할 수 없는 거대한 자연의 숭고미를 표현하고 그것에 대한 작가의 경외감을 숨김없이 드러내지만, 동시에 삶의 어쩔 수 없는 아이러니한 부분들, 즉 이번 시리즈에서는 서로 사냥하고 채집할 수 밖에 없는 인간과 자연간 먹고 먹히는 순환 관계나 숨겨진 그 이상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노상호 작가는 이번에 디지털과 현실 세계 간 이미지의 생산과 소비에 대해 흥미로운 화두를 던지는 신작 시리즈 “Holy”를 소개한다. 전작들과 달리 이번에 작가는 현실과 디지털 세계에서의가상 이미지들 간 혼종교배와 그로 인한 결과물을 노출시키고 그 현상에 대해 고민한다. 디지털 가상 이미지는 현실에서 출발하고 주 사용자들도 현실에 존재하지만, 그 이미지가 소비되는 방식이나 반응은 두 세계 내에서 각각 다르게 풀어진다. 작가는 이번 신작에서 디지털 세계와 현실 세계에서 모두 공존하지만 각각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이미지 혼종교배의 여러 단면들을 가장 고전 매체인 회화로 풀어낸다. 기존 시리즈들처럼 작가는 제작 방식에서도 자신의 문제의식을 전면에 드러내는데, 예를 들어 현 시점에서 매우 진일보한 디지털 이미지 기술인 AI 기술을 가장 고전적인 방식의 회화에 접목시켰다. 작가는 우선 3D 이미지 중 무료로 사용 가능한 이미지들로 화면을 구성한 후, AI 생성 이미지 도구를 통해 특정 이미지를 탄생시킨다. AI 기술로 생성된 가상의 이미지를 작가의 신체를 매개로 현실 세계로 회화의 형태로 끌어내는 매체 방법론이 작가가 전달하려는 주제와도 의도적으로 맞닿아있다. 더불어 이번 신작에서는 과거와는 달리 에어브러쉬를 주도적으로 사용하고 화면에는 재료의 물질성을 가시적으로 부각시켰다. 한없이 얇고 평평하게 표현되는 에어브러쉬를 사용하면서 동시에 특수 안료 혹은 석고 등 직간접적 두께감을 더할 수 있는 재료를 더해서 극도로 아날로그적인 캔버스 면에 디지털 이미지의 특수성을 표현하고자 하는 작가의 부단한 노력이 작가가 전달하려는 디지털 시대의 이미지 생산과 소비에 대한 문제의식을 더욱 명확하게 드러낸다.
아라리오갤러리 서울
서울시 종로구 율곡로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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