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GALLERIES] Gallery JJ
2023. 3. 17 – 4. 29
전원근
강주연 Gallery JJ Director
“안료를 거의 물처럼 풀었을 때 컨트롤이 힘들다. 물감을 어린아이처럼 이해해야 비로소 물감을 다룰 수가 있다. 어쩌면 작가의 감각이나 느낌보다 이러한 ‘안료’가 더욱 예민하다.” –전원근과의 대화 2023
우리는 무수한 색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대상이 인간의 감각과 완전히 별개의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색채 역시 인간의 감각과는 무관하게 존재하는 객관적 실체는 아니다. 전원근에게 있어서 색은 늘 감정을 동반한다.
갤러리JJ는 독일의 뒤셀도르프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감각적인 색-공간으로 회화를 탐구하는 전원근 작가의 개인전을 마련하였다. 작가는 자신이 경험하는 다양한 감정을 색을 통한 절제된 조형언어로 표현하고자 한다. 이번 전시 <전원근: 예민하고 합리적인>은 새롭게 발표하는 미색의 단색조 회화 작업을 중심으로, 백색 및 다양한 컬러의 모노크롬적 회화, 그리드와 원 이미지 시리즈의 신작들이 크기를 달리하여 함께 구성된다. 작품은 크기와 색상의 조화, 강약에 따라 고요하고 생동감 있는 분위기를 연출하며, 작업의 대표적 시리즈들을 통해 전시는 20년이라는 오랜 시간 실천해오고 있는 특유의 형식적 미를 기반으로 하는 작품세계의 독자성을 조명한다. 상호 침투하는 색채의 회화적 효과와 그 아름다운 변주가 기대된다.
전원근의 예술세계는 삶을 ‘색’으로 반향하는 그림으로 압축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캔버스 위에서 새로운 색채를 찾아나간다. 우리에게 색면, 혹은 모노크롬적 추상회화로 친근한 그의 작업에는 독특한 아우라가 있다. 알다시피 작가는 반복적으로 색을 쌓고 ‘닦아내는’ 특유의 기법을 구축하였고 그것은 작업을 특별한 것으로 만든다. 곧, 다층적인 작업 방식으로 인해 화면은 두터운 물질성을 내보임과 동시에 표면이 투명한 듯 그 아래로 공간적인 깊이가 느껴진다. 색 이미지들은 모호하게 허공에 부유하며 힘의 강약 조절에 따라 닦고 남겨진 색들과 그 경계는 서로 부드럽게 스며들고 흐릿하게 보인다. 화면과 시각 사이에 일어나는 이러한 일들은 마치 시공간적으로 아득히 먼 것과 가까운 것이 동시에 현존하는 느낌을 준다. 그의 작업은 흔히 우리에게 차갑고 이성적인 작업으로 정형화된 미니멀리스트의 작품과는 차별적으로, 절제된 가운데 따뜻함까지 포용하면서 정서적으로 다가온다. 작가는 예술이 주는 위안과 치유의 힘을 믿으며, 이를 미학적 경험으로 안겨준다.
이렇게 전원근의 추상화는 가장 기본적 조형 요소인 점, 선, 면을 구성요소로 하며, 이성적인 동시에 수행과도 같은 오랜 시간의 반복과 누적의 과정을 동반하여 인간적인 흔적과 감성으로 동서양의 특징을 함께 담고 있다. 작가는 1998년부터 뒤셀도르프 예술아카데미에서 공부하고, 마이스터쉴러로서 헬무트 페더를레(Helmut Federle) 교수를 사사했다. 현재까지 뒤셀도르프에 거주하면서 작업하고 있으며 유럽을 중심으로 세계적으로 전시 활동을 하고 있다. 추상회화의 거장인 이미 크뇌벨(Imi Knoebel)이 전원근의 작품에 깊이 공감하면서 작품들을 소장하는 등 미술관을 비롯하여 국내외 수많은 컬렉터의 호응을 얻고 있다. 그의 작업은 모노크롬적 회화를 비롯하여, 다양한 색상을 한 화면 안에 연출하면서 사각형과 격자, 선, 원의 기하학적 형태로 전개해오고 있다. 전원근은 색으로 내면세계와의 합일을 꿈꿀진대, 그 열망은 새로운 색의 조화와 구조에 대한 치열한 탐색으로 실현되는 중이다. 우리의 내재된 미적 감각에 호소하는 예술적 방식, 마음을 움직이며 상상으로 이끄는 힘, 그의 예술이 주는 매력의 실체가 궁금해진다.
이번 전시에서 처음 선보이는 미색 모노크롬 작업은 그동안 전개해온 기하학적 이미지들을 거친 후 전원근 작업의 시작이자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는 흰색 모노크롬 작업이 회귀한 듯, 오히려 더 덜어내어 말을 아끼고 있다. “말을 아낄수록 더욱더 집약된 색들이 필요했다. 결국은 많은 설명이 한 화면에 필요하지 않음을 매번 깨닫게 된다.” -작가노트
회화에서 단색의 추상적인 영역과 색의 관계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 이브 클라인(Yves Klein)이나 마크 로스코(Mark Rothko) 등 앞선 많은 색면화가들의 여러 경우를 생각해 본다면, 전원근 작업에서는 두터운 표면을 헤치고 색이 겹쳐지는 경계에서 효과가 극대화되는 형식을 취한다. 그의 단색 작업에서는 화면의 모서리로 경계를 밀고 나가고, 원이나 격자의 구조를 통해서는 흐릿한 경계의 효과가 전면에서 적극적으로 나타난다. 원과 사각형의 테두리 혹은 가장자리에서는 빛이 산란하여 후광을 발산한다. 빛과 어둠의 경계에서 색이 생겨난다는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의 이론처럼, 경계의 색들은 또 다른 색이 되어 서로 조화를 이루는데, 이는 평면성을 띠기보다는 수직적이며 표면으로부터 깊이를 가지고 공명하는 색의 공간을 형성한다.
이러한 형식의 바탕에는 감성과 이성, 물질과 정신, 특히 방법에 있어서 안료라는 물질과 신체, 환경 사이의 예민한 줄다리기가 놓여있다. 초기 유학 시절, 작가는 흑백의 모노톤 추상 작업으로 시작하면서 다소 이질적으로 다가왔던 차갑고 정밀한 서양의 미니멀적 요소에 내부적으로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고유의 방법을 치밀하게 탐구하였다. 그것은 동서양 사고의 간극에서 일어나는 혼란을 진정시키는, 어쩌면 이국의 작가로서는 당면할 수밖에 없는 과제였을 것이다. 그는 감상적이거나 표현적인 제스처는 걷어내는 대신 최대한의 절제와 집중의 방식을 택했다. 작업은 최소한으로 최대의 결과를 생각하여, 기본적인 형태들과 빨강과 노랑, 파랑, 초록의 색으로만 작업하는 한편 그것들을 겹겹이 쌓았다. 더하고 덜어내는 방식으로 말이다. 물로 아주 희석되어 멀겋게 흐르는 아크릴 물감을 화면에 바른 후 채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다시 닦아내는 과정을 수십 번 반복하여 얇게 색의 레이어를 쌓아 나간다. 그 결과 화면에 나타나는 색들은 수없이 중첩된 색으로, 닦는 가운데도 흔적처럼 남아있던 색들이 아래로부터 연속적으로 우러나와 서로 결합하면서 오묘하고 새로운 색들이 발생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작업은 누적된 색층으로 인해 묵직하면서도 아래층의 색들이 표면을 관통하여 빛을 발하여 투명하고 표면의 깊이가 생긴다. 구현되고 침식되는 형체로 보면, 프랭크 라우쾨터 박사(Dr. Frank Laukötter)가 말했듯이 작가는 고고학적으로 이미지를 다루고 있다. 한편 레이어, 다층의 구조라는 한국 미의 근간에서 본다면 어떠한가. 예를 들어 얇게 켜켜이 층을 이루는 한복이나 기와, 옻칠과 유약 바른 도자기, 장식을 배제한 담백함과 닥종이의 고운 결에서 느껴지듯이 겹, 결에 대한 전통적 미의식은 내면의 빛이 올라오고 깊이로부터 도출된다.
살펴보면, 축적의 작업 방식과 그로부터 도출된 색의 반향은 미색의 신작을 비롯하여 한눈에도 무척 세련되어 보이는 그의 작품에서 아련하게 스치는 모종의 고풍스러운 인상으로 연결되는데, 이는 결국 문화와 역사, 고고학을 좋아하는 작가의 취향에서 간파된다. 과거의 경험은 작가에게 언제나 현재와 연결되고 작품의 영감을 준다. 이를테면, 고궁 등 역사적 건물의 재료와 색상, 한국 전통 도자기의 하늘빛 유약의 느낌을 간직하며 여행에서의 관찰과 그것에 대한 감정이입, 또는 동남아 바다의 경험은 비취색 감흥으로 축적되어 있다가 작가의 뛰어난 색채 감각으로 캔버스 위로 호출된다. 애초에 전원근의 초기 흑백 추상회화가 아득히 빛바랜 흑백사진에의 관심에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오로지 색채와 조형예술의 기본 요소만으로도 감동을 전하는 미술의 실천은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를 거쳐 이미 한 세기를 지났다. 이러한 추상작품 부류는 작가의 시선이나 감정, 철학 등이 작품의 형식을 결정한다. 전원근의 예술세계는 이 같은 회화적 전통 속에서 유희하며 시간의 누적, 단순함과 느림, 절제와 집중 등 작업의 방식은 곧 그의 삶의 태도와 결을 같이한다. 거기에는 담백함, 즉 소음이나 소란스럽지 않은 침착함과 고요함이 자리한다. 작가의 관심은 현실이나 자연의 재현이 아니라 동서양을 넘나들며 살아온 한 인간으로서의 기억, 직관과 본능, 욕구, 감성 등 내면세계의 표현에 있다. 이때 색은 과거의 수많은 기억과 감각을 대변하는 언어이자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는 매개체이며 그림은 그의 삶의 방식을 반영한다. 그래서 그것은 삶이 묻어나는, 어쩌면 세상사와 그다지 동떨어져 있지 않으면서 절제된 미학으로 관객과의 또 다른 소통을 이끌어내는 전원근만의 방식이 아닐까?
화면에서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수많은 색은 놀랍게도 캔버스 위에서 오직 4가지 색상만으로 칠하고 닦아내는 과정에서 새롭게 나타나는 것들이다. 과정 중에 칠해진 색들은 눕혀진 캔버스 옆면으로 흘러서 그대로 시간의 흔적, 채색의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 모든 작업 과정은 철저한 계획과 통제 하에 이루어지지만 여름에는 빨리 말라서 닦아낼 것이 없는 등 안료의 건조 시간과 그 효과에 있어서 자연, 온도, 습도, 빛에 의존하게 된다. 이러한 안료의 물질성과 환경은 물론 작가는 붓을 잡거나 닦을 때 전해지는 손목의 힘, 심지어 체온의 작은 변화에도 그림은 민감한 차이를 보인다고 한다. 물감의 물성을 이해하고 다스리며, 지적 조형요소와의 지난한 조절 끝에 엷게 얹혀지고 흔적처럼 남아있는 색의 단면들, 그 수많은 감정의 결, 그것은 예민하지만 격정적이지 않다.
작가가 끊임없이 닦아서 색채가 지워진 희미한 공간은 또 다른 것들 즉 색채나 형체, 느낌, 감각 등을 생성하는, 공간의 활성을 의미하는 부재이자 존재에 다름아니다. 작업에서의 ‘경계 흐리기’의 방식과 ‘올오버(all-over)’의 화면 구성, ‘무제’의 제목 역시 관객에게 닫히지 않은 자유로운 경험과 상상, 생각의 공간을 내어준다. 색으로 전달되는 감각과 정신적 산물로서의 예술. 전시는 회화적 색채가 가진 에너지와 잔잔한 울림을 전한다. 색의 경계가 풀어지고 서로 스며들고… 그것은 단절이 아닌 열린 세계를 향해 있지 않은가. 예민하고 합리적으로.
갤러리J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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