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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 한 조각 Fantavision

2021.11.11 – 12.11
박경률

박경률, 〈그림99(청색), 2021. 생천에 아크릴과 오일, 227 x 182 cm

조각적 회화의 조건:
손으로 머리를 지탱하여, 시선에서 환상으로

안소연 (미술비평가)

회화는 “환상”이라고 말하는 그는 지금 파란색 물감을 반복해서 사용하여 어떤 몰입의 강도를 높이고 있다. 세룰리안 블루(Cerulean Blue), 망가니즈 블루(Manganese Blue), 프러시안 블루(Prussian Blue) 물감을 조색 없이 캔버스에 올리면서, 그는 회화의 그리드 안에 가둔-나는 “억압”이라는 단어를 쓰고 싶었지만 혹시 모를 오해를 피하기 위해 “가두었다”는 표현을 선택했다- 물감의 자기 본성에 다시 권한을 부여해 보려는 것 같다. 말하자면, 물감의 물질성(materiality)에 주목하는 것으로 이때의 물질성이란 모더니즘 아방가르드 회화에 기원을 둔 레디메이드 재료라는 사물(object)로서의 특성과 철저히 화학적인 물질이면서 고유한 질료(matter)로서의 특성을 아우른다. 게다가 그는 캔버스 또한 하나의 삼차원적 질료나 사물로 인식하는 회화사의 또 다른 바탕에 뿌리를 두고 자신의 회화가 어떻게 하나의 물질로서 현존할 수 있는가를 탐색한다.

⟪환상 한 조각⟫에서는 박경률의 청색 회화가 색채에 대한 강렬한 지각을 유도하고 있으며 150호 동일한 캔버스의 무심한 배열은 구성적인 서사의 순간을 배제하려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붓질로 매개된 임의의 형상들이 곳곳에서 목격되는데, 어떤 것은 매우 익숙한 형태처럼 보이기도 하고 또 어떤 것은 추상적이며 모호한 붓질의 행위로 경험된다. 이로써 특별한 정황이 만들어진다고 볼 수 있는데, 이와 같은 회화 전시의 구체적인 상황에서 질료와 사물, 형태와 행위가 미세하게 동요하며 잠재적인 변환의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박경률은 “환상”이라는 단어를 써서 자신의 회화가 일련의 요소들을 다루며 차원의 전환을 시도하여 이를 실체화 한다는 (확신에 찬) 가설을 붙들고 있다.

회화가 매체의 순수성에 따라 자율성을 획득한 모더니즘 형식주의의 논의와 매체의 일상적 참조를 통해 회화의 사물성을 획득한 모더니즘 아방가르드의 논의를 임의적 선택과 판단으로 재맥락화 하려는 박경률의 회화에 대한 입장은 다소 선언적이기까지 하다. 그는 “회화는 환상이다”라고 말한다. 이 의미심장한 선언은 “이미지 중심적인 동시대 시각 지형에서 고유 장르로서 회화가 여전히 유효할 수 있는가”라는 작가적 질문에서 모색된 것이며, “오브제로서의 붓질(piece of brushstroke)”을 스스로 인식한 것에서 출발한다.[*⟪환상 한 조각⟫(2021)에 대한 작가 노트 참고] 미리 짐작해 보건대, 애초에 그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붓질”이며 그것은 오브제이자 행위이고 다수의 차원을 매개하는 “사유체(corps-pensée)”라 할 수 있다.

한편 박경률이 “조각적 회화”라 부르는 것은 회화에 대한 그의 변함없는 신뢰를 드러내는 것으로,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조각적 인식을 통한 회화의 성립 조건을 갱신하는데 있다. 지난 세기 회화와 조각 사이에 놓아진 다리를 왕복하면서, 그는 (사물로의) 매체 확장을 조건화 하지 않으며 삼차원의 특수한 사물(specific object)로 규명되는 회화에 집중하기 보다는 매체에 대한 재인식을 통하여 조각적 사유로부터 회화에 대한 변별성을 살피는 듯하다. 말하자면, 그는 작업 과정에서 그가 늘 강조해온 조각적 사물을 비롯해 그것에 대한 삼차원적인 인식이 마침내는 회화적 상태로 귀결되는 흐름과 마주하고 있는 셈이다.

박경률, 〈그림101(청색), 2021. 생천에 오일, 182 x 227 cm

박경률에게 조각적 회화란 무엇일까? 그는 “조각적 회화의 본질은 ‘그리기라는 행위’에 주목한다는데 있다”고 말했다.[*⟪왼쪽회화전⟫(2020)에 대한 작가 노트 참고] 이때의 그리기 행위에서 이루어지는 조각적 인식은, 마치 미니멀리즘 이후 조각적 시도들이 삼차원적 연극성에 몰두했던 것을 떠올리게 하는데, 특수한 사물을 실제 공간에 배열하는 신체의 행위로 유추해 볼 수 있다. 오래된 조각적 환영에서 벗어나 “모서리와 면들을 결합하여 하나의 오브제를 형성함으로써” 실제 공간에서의 실제 재료를 통해 형태의 “사실”을 경험하려 했던 미니멀리즘의 맥락과 비교해 볼 때, 박경률은 물감과 캔버스를 하나의 “물질”이자 “사물”로 인식하여 그것을 매개하며 공간에 배열하는 붓질을 신체 행위로 본다.[*로잘린드 크라우스, 윤난지 옮김, 『현대 조각의 흐름』, 예경, 1997, pp. 311-312 참고] 이때 박경률은 매우 비약적인 회화로의 변환을 감행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것은 사각의 모서리로 특정되는 회화의 공간에 대한 다차원적 전환이라 할 수 있다.

⟪환상 한 조각⟫에서는 전시 공간 전체를 150호(182x227cm/227x182cm) 캔버스가 여유롭게 채우고 있다. 각각의 캔버스 회화는 라는 제목에 번호가 매겨 있고 괄호 안에 “in blue”라는 표기를 추가했다. 이와 같이 푸른 색조로 그려진 일련의 청색 회화에서, 그는 스푸마토(Sfumato)를 비롯한 대기원근법과 헬렌 프랑켄탈러(Helen Frankenthaler)의 얼룩 기법(Soak-Stain Technique)을 직접적인 레퍼런스로 가져와 고전적으로 푸른 색이 발휘해온 시각적 공간감에 한층 몰두했다. < Picture 94 (in blue) >(2021)와 < Picture 102 (in blue) >(2021)를 보면, 각각의 파란색 화면에 부유하고 있는 붓질의 흔적들이 (화면 내의) 주위를 살피며 시선을 계속해서 이동하도록 만든다. 하나는 대마(hemp)에 유화물감으로 그린 그림이고, 또 다른 하나는 황마(jute)에 그린 것이다. 박경률은 그림의 지지체로서 캔버스의 천을 중요하게 다룬다. 회화의 표면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캔버스 천의 물성에 대해 그는 스스로 강렬하게 체감해 왔는데, 그것을 통해 또 한 번 회화의 공간을 실험하는 것이다. 요컨대, 그는 푸른 색 물감과 채색 기법과 캔버스의 물성을 조율해 가면서 일련의 다차원적 회화 공간의 가능성을 모색한 셈이다.

그가 조성해온 회화의 공간은 “전환”에 방점을 찍는다. 그것은 그가 말하는 그리기의 행위, 즉 붓질에서 시작되며 공간과 사물이 경험에 있어서 지각과 인식의 교차를 불러온다. 이를테면, 박경률은 회화의 평면 지지체로서 천의 물성과 직조 상태를 꼼꼼하게 살펴 붓질로 그 표면에 미세한 차이를 발생시킨다. 어떤 관점에서 받침대로부터 해방된 조각(적 사물)의 삼차원적인 배열과 흡사한 행위로서 박경률의 붓질에 대해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그는 스스로 조성한 회화 공간 안에 “오브제로서의 붓질”을 배열한다. 그것은 대마나 황마 같은 캔버스 천의 이차원적 표면에 놓이는 것이며, 동시에 천과 물감의 물성에 의해 실제 삼차원적 전환이 이루어질 테고, 게다가 그의 행위가 지닌 물리적인 힘과 기술에 의해 삼차원을 초과하는 비현실적 사유의 세계가 마치 (유령같은) 시각적 환영의 회귀처럼 새롭게 현전할 수 있게 된다. 이는 무척 논쟁적인 내용이지만, 마이클 프리드(Michael Fried)가 조명했던 미니멀리즘의 추상적이고 비지시적이며 실재하는 육면체 오브제들 표면 아래 (여전히) 잠재되어 있는 고대적인 인간 형상의 조각적 기원을 충분히 떠올리게 한다.

박경률의 조각적 회화는 일련의 삼차원 조각이 태생적으로 지니고 있는 지각과 인식 간의 간극 및 부조리를 일종의 방법론처럼 전유하는 망상이 엿보인다. 그리고 그것을 능숙하게 처리해낼 수 있는 회화 매체의 환영적 요소를 그는 다시 불러내, 조각의 차원을 매개하는 회화에 힘을 싣는다.

박경률, 〈그림95(청색), 2021. 생천에 아크릴과 오일, 182 x 227 cm

이번 전시 ⟪환상 한 조각⟫에서 푸른 색의 < Picture > 연작은 박경률이 그동안 실험하며 모색해 온 조각적 회화의 여러 시도들 중에서 “환상”이라는 새로운 화두로 이어진다. 그는 이 전시에 대한 영문 제목으로 “fantavision”이라는 임의의 조어를 사용해 표기했는데, 그 단어에 내포되어 있는 요소들이 그의 조각적 회화에 대한 당위를 가늠케 한다. 그는 이 청색 회화에 대해서, “물성적 체험과 그에 따른 변환된 시공간의 마주침을 통해 예술은 사유를 강제하는 힘을 갖게 된다”고 했다.[*⟪환상 한 조각⟫에 대한 작가 노트 참고] 이 “마주침”과 “사유”는 환상으로서의 회화를 구축하는 중요한 개념으로 그에게서 다뤄진다. 여기서 나는 다시 한 번 하나의 조각적 사례로 미니멀리즘과 그 이후의 조각에 있어서 삼차원적 경험이 확인시켜 주었던 비가시성의 조각(적 환영)에 대한 사유를 가져와 보기로 한다.

< Picture 102 (in blue) >의 경우, 화면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붓질의 행위뿐 아니라 평면의 공간 안에 배열된 물감과 붓질의 제스처에 반응하는 캔버스 자체의 역동성도 가늠된다. 비어 있던 하나의 사각 캔버스에 원초적 행위로서 붓질이 오가는 동안, 캔버스는 제 몸체에 물감을 흐르게 하다가 멈추게 하고 쌓이면서 겹치게 한다. 이때, 박경률은 자신의 그리기 행위를 추적하듯 시각적으로 쫓으면서 동시에 이를 지속시킬 하나의 명분으로서 인식과 사유의 증폭을 꾀한다. 이를 위해, 그는 거친 붓의 덜 익숙함을 받아들이고 조색하지 않은 물감을 화면에 쌓아 올려 얼룩처럼 스미는 물성의 효과를 유도했다. 일련의 행위와 물성의 효과가 구축해낸 회화의 표면에는 실제적인 공간과 환영적인 공간이 교차하면서 “환상”으로서의 인식과 사유를 매개하게 된다.

그런 까닭에, “손으로 머리를 지탱하며, 시선에서 환상으로”라는 이 글의 부제는 조각적 경험과 인식을 통해 박경률의 회화로 진입하는 일련의 과정을 축약한 것이다.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의 그 유명한 멜랑콜리아 포즈에서 손으로 머리를 지탱하고 있는 모습은 전형적인 비현실적 사유의 표상으로 다뤄진다. 날개 달린 여인의 시선은 현실의 사물들 앞에서 허공을 향해 있고 근본적으로는 어떤 비현실적 사유와 회의에 빠져있다. 내가 멜랑콜리에 빠진 인간의 몸을 생각했던 이유는, 아감벤의 철학적 사유에서 (불행한) 조각가가 가지고 있는 형상에 대한 실제적인 감각과 그것으로 인한 이미지에 대한 광적인 사랑/집착을 마치 하나의 동일한 사건처럼 떠올렸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조각적 경험이란 조각가와 조각 사이의 대칭적 구조에서 실제적인 감각을 주고 받게 되어 있는데, 그것이 매우 물리적인 지각에 따르면서 동시에 비물질적 차원의 “인식”, 즉 대상에 대한 “앎”을 동반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두 가지의 조각적 사건을 떠올릴 만한 개념으로 박경률은 “마주침”과 “사유”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그것이 그가 이번 연작에서 유독 엄격하게 제한한 회화적 매체와 기법을 통해 차원의 변환을 거치면서 마침내는 회화의 (조각적) 조건에 대한 갱신을 가늠해 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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