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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린다.

Tan Ping

Tan Ping / 谭平, Soul / 灵魂, 1990, Acrylic on canvas / 布面丙烯, 95 x 100 cm

경계를 가로지르다.

2021년 베이징의 탕현대미술센터에서 열린 탄핑(谭平) 개인전의 제목은 ‘회화란 무엇인가(绘画是什么) 1984-2021’였다. 본질론적이면서 도발적이기도 한 이 질문은 ‘계I한(界I限)’을 제목이자 주제로 제시한 2022년 홍콩에서의 회고전과 함께 탄핑이 추구하는 예술은 경계를 가로지르며 질문하는 것임을 암시한다. ‘회화란 무엇인가 1984-2021’ 전시에 맞춰 리 티안지(李天琪)와의 인터뷰에서 탄핑은 “40년 동안 그려왔지만 아직도 미완성이다”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술은 진행형이어야 한다. 나는 매 순간 미완의 마음가짐으로 창작에 몰두한다. 이 과정에서 나는 언제나 특정한 시간, 공간, 그리고 맥락에서 누군가와 만나고, 곧이어 헤어지고, 다시 시작하기를 기대한다. 이는 마치 삶의 끝과 시작, 죽음과 탄생, 슬픔과 기쁨, 실망과 희망, 과거와 미래가 집합하고 분리되는 순간을 통해 영원을 실현하는 것과 같다. 이것이 바로 예술이며, 이것이 곧 그림이다.”

 

답을 찾기보다 질문하는 것은 예술의 특징이자 가능성이다. 탄핑에게 발견할 수 있는 이러한 개방성은 2023년 2월 샤먼(厦门)의 훙딩현대예술센터(TCCA红顶當代艺术中心)에서 열린허우잉X탄핑’ 2인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허우잉 댄스 시어터(侯莹舞蹈剧场)와 탄핑작업실이 이 미술관과 공동으로 개최한 2인전은 중국 포스트모던 무용의 선구자인 허우잉과 중국 추상회화의 개척자인 탄핑이 상호협업을 통해 공연예술과 조형예술이 한 공간에서 공동작업을 발표하는 실험적인 무대이자 전시였다. 이 전시에서 탄핑은 긴 붓으로 벽에 드로잉을 하는 퍼포먼스를 발표했다. 먹으로 자유롭게 그린 종이는 벽에 걸어놓은 것이라기보다 그냥 걸쳐놓은 것에 가까웠다. 이로써 그림은 공간의 일부이자 공간 그 자체가 된다. 즉흥적이며 즉자적인 붓의 움직임이 만들어낸 자유로운 드로잉은 무용가의 춤과 어울리며 시각예술이 신체예술과 공연예술로 확장되도록 유도했다. 이 작업에서 탄핑의 작업세계를 관류하는 경계를 넘나드는 자유로운 정신은 다시 빛을 발산하였다. 실제로 탄핑의 작업은 판화, 회화, 디자인, 퍼포먼스, 설치 등 특정한 방법이나 장르에 한정되지 않고 그 경계를 넘나든다. 이러한 다학제적 관심이 만들어내는 다원성은 미리 예술의 개념을 규정하지 않는 ‘비전제(非预设性)’로부터 나타난다. 이러한 특징을 이해하기 위해 그의 학습배경과 활동영역에 대해 먼저 고찰할 필요가 있다.

Tan Ping / 谭平, Fission No.2 / 裂变2号, 2008, Acrylic on canvas / 布面丙烯, 200 x 300 cm

형상으로부터 표현으로

탄핑은 1960년 허베이성(河北省) 청더시(承德市)에서 교사인 아버지와 산부인과 의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980년 중앙미술학원 판화과에 입학한 그는 1984년 졸업작품으로 케테 콜비츠(Käthe Kollwitz)의 영향을 받아 동판화 <광부(鑛夫)> 연작을 제작했다. 그의 초기작품은 티베트 사람과 그곳의 풍물을 포착한 것으로부터 향토적 정서를 담은 어두운 색조의 풍경화를 거쳐 마티스나 말레비치의 작품을 연구하며 자신의 양식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졸업 후 모교인 중앙미술학원에 출강하면서 제작한 <흑해>와 <장성> 연작에서는 형이상학적 회화의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몬드리안과 칸딘스키, 자오우키(赵无极) 등의 작품에서 추상의 초보적인 원리와 방법을 터득하여 전통적인 판화나 회화를 통해 추상회화에 대한 관심을 표현하기도 했다.

 

1989년 독일문화에술교류장학금(DAAD)을 받아 베를린예술대학 자유회화과에 입학하여 독일 신표현주의의 거장인 회디케(Karl Horst Hoedicke) 교수에게 배우면서 탄핑의 작업은 한 차례 변화를 겪었다. 자유회화 전공은 다양한 매체를 사용한 개인적 표현을 제창하는 분위기였고 신표현주의에 관심을 가지면서 그의 작품에서도 신표현주의의 특징인 원시적인 힘이 나타났다. 그러나 그에게 신표현주의 시기는 짧았다. 재현적인 회화에서 서사(敍事)가 색채와 형태를 한정할 수 있다는 문제의식을 느낀 그는 1993년 형상이 아니라 개념에 주목하면서 ‘시간’이란 설치작업을 시도하기도 했다. 먹으로 그은 선만 있는 종이를 설치하여 흑백으로만 이루어진 이 작업은 선불교의 선화(禪畵)를 떠올리게 만들면서 침묵이 달변보다 더 강한 울림을 줄 수 있음을 시각적으로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 그는 신표현주의, 미니멀리즘, 기하학적 추상 등을 시도하며 방향을 모색했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감정의 표현으로부터 기하학적 추상과 개념적 사물에 대한 연구도 진행했다. 1994년 베를린예술대학에서 석사학위와 마이스터슐러(Meisterschule)를 취득한 후 가을에 귀국하여 중앙미술학원에서 다시 강의를 시작한 그는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정신으로 디자인전공 개설에 주력했다. 디자인의 조형원리에 대한 관심은 1997년 계수(模數, modulus) 원리를 적용한 <20×20> 연작의 제작에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동료 예술가들과 사방공작실(四方工作室)을 설립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마침내 2002년 중앙미술학원에 디자인학원이 설립되자 그는 원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벽돌 하나하나를 쌓아 건축을 완성하듯 판화의 전통적인 창작 또한 과정이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이므로 건축과 유사할 뿐만 아니라 디자인 원리와도 연관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2000년대 초반 탄핑의 작업은 목판화로 되돌아가고 있으나 대상을 재현하지 않고 구성에 중점을 두고 선의 자유로움을 표현한 점이 주목된다. 이런 특징은 같은 시기 회화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목탄으로 마치 자유로운 선긋기 또는 원그리기를 한 작품은 서예를 연상시킨다. 특히 색면추상과 선을 결합한 작품은 동서의 융합을 지향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작업 이후 그의 회화는 과정을 중시하는 판화와 달리 형태보다 밝고 활달한 색의 중첩과 즉흥적인 필치의 선이 어우러진 행위의 장으로 바뀌었다. 주관적인 감정과 순간적이며 즉흥적인 화면구성이 만나는 화면은 조화, 질서, 완성의 강박으로부터 벗어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이런 작품을 미완성이라고 부른다. 미완성은 아직 더 그려야 할 것이 남아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작품은 다양한 해석 앞에 열려있는 가능성의 영역이라는 의미로 이해하여야 한다.

 

양식적으로 추상표현주의나 앵포르멜을 떠올리게 만들지만 탄핑만의 고유한 조형언어가 내재한 그의 작품은 특정한 서사를 지향하지 않으나 예술의 자율성을 강조하여 내용을 폐기하는 형식주의에 함몰한 것은 아니다. 예컨대 2004년 아버지의 간암 진단과 2007년의 수술에 이르는 고통스러운 경험은 그의 작업에도 영향을 미쳤다. 의사가 아버지의 몸에서 떼어낸 종양을 절개하여 보여주었을 때 검은 상어알과 같은 암세포를 직접 목격한 그는 그 경험을 작품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세포같은 원들이 화면 곳곳에 흩어져 있는 작품들은 죽음과 치유란 상반된 세계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투영하고 있다. 2008년에 제작한 붉은색의 <분열 2(Fission No.2)>은 적혈구가 붕괴하거나 혈소판이 엉겨있는 상태를 연상시킨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느끼는 마음의 고통이 분열하는 형태를 통해 표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Tan Ping / 谭平, Untitled / 无题, 2011, Acrylic on canvas / 布面丙烯, 200 x 600 cm

직관은 표현이다.

예술작품은 예술가의 내면적, 사회적 경험을 외적으로 드러낸다. 예술가의 개인적 감정, 생각, 신념, 아이디어는 형태와 색채를 통해 직관적으로 표현된다. 직관은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이해나 인식 또는 따로 골똘히 생각하거나 추론하는 과정 없이 당장 이해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을 의미한다. 사물의 외양을 재현하거나 서술적 형상을 추구하기보다 선과 색, 형태가 자율적으로 생동하는 공간인 탄핑의 회화를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의 하나로 직관을 들 수 있다. 예컨대 <잡을 수 없는(抓不住)>, <지속적인 절단(剪不断)>, <우울증(抑郁)>, <부유(浮游)>, <마음(心智)> <지도 위의 게임(地图上的游戏)> 등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우연성과 즉흥성이 두드러진 화면은 마음이 몸과 손을 경유하여 표출된 결과이다.

 

그의 작품에는 그의 감정이 침윤해 있다. 화면이 유희적이면서도 형태와 색, 선이 중첩, 교차하는 공간 앞에서 사색하게 만드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반면에 이 작품들을 제작하던 시기가 팬데믹이 지속되던 때인 점을 감안할 때 색면들을 연결하고 있는 선들은 ‘사회적 거리두기’에 의해 차단된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연결하고자 한 의지의 표현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작품으로 보는 사람을 설득하기보다 작품 자체가 의미를 생성하는 가능성을 열어둔다. 그러기 위해 색채의 대비, 색면의 분할, 율동적인 선의 움직임을 표현할 때 의도와 계산, 결과에 대한 예측을 하지 않고 자신의 직관에 내맡긴다. 작업하는 순간 직관은 표현으로 발전한다. ‘직관은 표현이다’는 말은 물론 이탈리아 관념론적 철학자 크로체(Benedetto Croce)가 한 말이다. 그러나 크로체의 학설과 상관없이 사물의 두 관점 사이의 관계에 관심을 가지고 전체로서 완전하게 다른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탄핑의 생각을 구현함에 있어서 직관은 다른 어떤 지적 능력보다 우선한다. 직관은 그의 작품을 활달하고 변화에 탄력적이며 미완이면서도 다음 단계를 기대하게 만드는 힘이다.

 

탄핑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특징으로 ‘지독한 그리기’를 들 수 있다. 이 그리기의 지속은 그가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지독한 그리기에 대해 본능적 욕구라고 말한다. “‘그리다’에서 ‘나를 그려라’는 ‘나는 그린다’에 도달한다. 그것이 나의 일상이다”는 탄핑의 발언을 읽으면서 나는 문득 데카르트의 유명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를 떠올렸다. 이 금언은 탄핑에게 “나는 그린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Pingo, ergo sum)”로 바꿔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그리기는 일상이자 지속이다.

Tan Ping / 谭平, Untitled / 无题, 2008, Acrylic on canvas / 布面丙烯, 80 x 100

Tang Contemporary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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