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8. 6 – 8. 24 | [GALLERIES] GalleryMEME
조은시
회화와 설치의 경계를 넘나들며 구조와 인식의 문제를 집요하게 탐구해온 작가 조은시가 오는 8월 6일부터 24일까지 개인전을 연다.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현재 동 대학원 석사과정에 재학 중인 조은시는 최근 2025 Kiaf Seoul ‘하이라이트 작가 10인’에 선정되고, 서울문화재단 청년예술지원사업 및 아티팩츠 《알마낙: 50인의 한국 동시대 작가》에 참여하는 등 동시대 미술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신예 작가다.
전시 포스터
이번 개인전은 조은시가 오랜 시간 탐구해온 주제인 ‘불가항력적 구조’와 ‘관습적 시스템’ 에 대한 조형적 사유를 바탕으로, 회화와 설치 작업을 병렬적으로 구성한 전시다. 평면 회화부터 공간 설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식 실험을 통해, 보이지 않는 힘과 인간이 만들어낸 구조 사이의 긴장을 시각화한다
전시에서 선보이는 주요 작품 중 하나인 《바람의 방향》(2024) 은 바람이라는 비가시적 자연 현상을 기호화한 대형 회화로, 바람개비, 풍향계, 종이비행기 등 다양한 시각적 상징이 화면에 정교하게 배치되어 있다. 관람객은 이 이미지들을 따라가며 자연과 인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를 사유하게 된다.
하지만 이번 전시는 단일 작품에 머무르지 않는다. 종의 분류, 속담, 단위 묶음과 같은 인위적 시스템, 그리고 자연재해나 혈연과 같은 통제 불가능한 질서에 대한 탐구는 회화와 설치작업 전반에 걸쳐 다층적으로 전개된다. 균형추, 행거, 천, 비정형 구조물을 활용한 가변 설치 작업은 평면 회화의 내부 논리를 공간적으로 확장시켜, 감상자에게 능동적 지각의 경험을 제공한다.
나쁜 생각, 2023, 나무 공, 캔버스에 유채, 밧줄, 가변설치
조은시는 “우리는 어떤 전체의 일부이면서도 하나의 독립된 존재로 살아간다”고 말하며, 체계 속에 놓인 개별성의 조건을 회화적 언어로 번역한다. 그는 이미지뿐 아니라 그것을 지지하는 구조, 배치, 조건 자체를 작업의 일부로 포섭하며, 회화를 인식의 매개로 삼는다. 그 결과, 작품은 단지 시각적인 아름다움에 머무르지 않고, 세계를 해석하고 재구성하는 하나의 인식적 장치로 기능하게 된다.
다른 방식으로 보기, 2023, 판넬에 유채, 168.0 x 76.0 x 44.0 cm
이번 개인전은 Kiaf Seoul 개최에 앞서, 조은시가 지금까지 쌓아온 조형적 실험과 사유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자리이자, 회화의 확장 가능성을 질문하는 동시대적 시도다. 회화, 설치, 언어, 질서, 구조가 겹겹이 교차하는 전시 공간 안에서, 관객은 그 다층적인 흐름에 능동적으로 개입하게 될 것이다.
전시는 2025년 8월 6일부터 24일까지 개최되며, Kiaf Seoul 갤러리밈 부스(A31)에서도 작품을 확인 할 수 있다. 그외 전시 관련 정보는 갤러리 공식 웹사이트 및 SNS 채널을 통해 확인.
닮음에 대한 연구, 2024, 캔버스에 유채, 97.0 x 145.5 cm
<작가노트>
조은시는 ‘닮음’과 ‘불가항력’을 통해 돌발적 사건을 화면 내에 발생시킨다. 그리고 조형 요소들을 납치 – 투하하는 과정으로부터 연쇄적인 상상을 촉발하고자 한다. 섭리, 당연한 것, 닮은 생김새와 같은 것들에서 비롯된 내러티브를 빌려 전체와 부분, 공동체와 개인의 관계에 대해 탐구한다. 최근에는 생산자와 향유자 두 가지의 역할을 동시에 경험할 수 있는 일련의 장치를 만드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미지근한 충돌, 2024, 캔버스에 유채, 162.2 x 112.1 cm
<아틀라스의 어깨 끝, 전시서문>
낮과 밤이 서로 만나는 지점에서 우주의 기둥을 떠받들고 있는 아틀라스, 그는 크로노스의 편에 서서 올림포스의 신들에 대항하는 전쟁에 참여했다가 패배하자 제우스로부터 영원히 천구를 떠받드는 형벌을 받게 된 것이다. 크로노스가 수호한 시간은 통제 불가능하며 고정되고 순차적인 시간으로, 즉 운명의 굴레라고 볼 수 있다.1)
제우스는 크로노스를 몰아내고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려는 존재로 변화 가능한 시간과 운명 속의 기회를 다룬다. 티타노마키아라고 불리는 티탄족과 올림포스 신들의 전쟁에서 크로노스의 편에 섰던 아틀라스는 구시대의 질서를 고수한 존재가 아닌가.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현재의 질서를 지탱하고 지지하는 존재가 되었다.
바람의 방향, 2024, 캔버스에 유채, 193.9 x 130.3 cm
1585년에 발간된 게라르두스 메르카토르(Gerardus Mercator)의 지도 시리즈의 표지 삽화로 아틀라스의 이미지가 사용되었고,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아틀라스라는 용어는 체계화된 지식을 도표 형식으로 정리한 책을 지칭하게 되었다.2)
그러나 메르카토르가 참고한 아틀라스는 고대 전설에 나오는 지리학과 천문학에 해박한 현자이자 통치자였던 마우레타니아의 아틀라스였다. 시간이 흐르며 이 상징은 신화적 형벌을 받은 티탄 아틀라스의 이미지와 뒤섞였고, 아틀라스는 지식을 짊어진 존재로 문화적 이미지가 굳혀져 구조화된 정보의 시각화를 뜻하게 되었다. 예컨대 문화사학자 아비 바르부르크(Aby Warburg)는 아틀라스를 이미지와 기억을 몽타주 한 시각적 아카이브 방식으로 전유하였고, 조르주 디디-위베르만(Georges Didi-Huberman)은 아틀라스 개념을 시각적 사유의 방식으로 이어받았다. 아틀라스라는 개념은 신화 속 인물에서 출발하였지만 여러 다른 맥락 속에서 변화하고 중첩되어 그 의미는 확장 · 전유되었다.
젖는 바다, 판넬에 유채, 가변설치, 2024
형벌에는 필연적으로 고통이 수반되기 마련이다. 지극히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아틀라스 역시 땀을 흘렸을지도 모른다. 오랜 시간 하중과 맞닿아 있었던 그의 어깨 끝에서 난 땀은, 천구 표면에 미세한 미끌거림을 만들고 균열을 남겼을 것이다. 그리고 그 균열 사이에는 기존의 질서로는 수렴되지 않는 새로운 간극이 생겨났을지도 모른다. 견디는 자였던 아틀라스가 신화적 기원에서 벗어나 오해와 문화적 해석을 거쳐 구조화의 상징으로 재구성되었다가, 새로운 의미의 틈을 열어젖힌 존재가 된 것처럼 말이다. 조은시는 이번 전시에서 안정적이고 체계적으로 보이는 세계 안에서의 차이와 어긋남을 세심하게 포착한다.
한 단위, 2023, 캔버스에 유채, 80.3 x 130.3 cm
조은시의 아틀라스는 이미지와 기호, 상징들 간의 관계와 반복을 통해 관람객에게 감각적 사고를 유도한다. 이미지의 친연성, 그리고 기호와 오인 사이의 관계는 그의 작품 저변에 흐르는 중심 해석 구조이다. <땅속 형제>, <땅위 형제>는 한 화면 위에 씨앗 혹은 알이 병렬적으로 놓여 있다. 씨앗과 알, 두 기호는 앞으로 개별적으로 의미가 전개될 것임을 암시하는데, 특히나 씨앗의 성장 양상의 다름이 이를 분명히 드러낸다. 이처럼 형태는 닮았지만 운명은 전혀 다를 수 있는 존재들을 반복적으로 배열하여 다중적인 시간과 해석을 잠재적으로 품고 있음을 보여준다. <착각>은 자신을 닮은 그림 앞에 홀로 서 있는 계란을 그린 그림이다. 드로잉북 혹은 노트 위에 그려진 흰색 계란이 본인이라 착각하고 서 있는 갈색 계란을 통해 시각적 자기 인식이 얼마나 불안정한지에 대해 유머러스하게 드러내면서 동시에 이미지와 실재,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의 착란을 나타내기도 한다. 재현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계란 한 판이 그려진 드로잉북은 달력의 모양을 하고 있어 정체성의 추상적 기호들이 이미지로 배치되고, 또 달력의 한 달과 계란 한 판, 서른 살이라는 이중적 기호로 기능하기도 한다.
10분의 9, 2025, 캔버스에 유채, 145 × 97.5 cm
<중심 연구>에는 거스를 수 없는 운명과, 필연에 대한 저항이 공존한다. 쇠 행거를 중심으로 앞뒤로 나뉘어진 캔버스 천은 그 아래에 걸린 추로 인해 균형을 이룬다. 그러나 이 균형은 결코 고정적이지 않으며, 추의 위치와 천의 긴장에 따라 미세하게 흔들리는 유동적인 구조다. 이 작품은 원래 허들 모양을 하고 있는 세 작품과 한 세트로 구성되었다. 허들 작업의 양면에는 상반된 내용을 가진 속담의 상징물이 그려져있다. ʻ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 계란으로 바위치기’ / ʻ백지장도 맞들면 낫다’, ʻ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와 같이 모순되는 속담이 그려져있는데, 이는 언어로 정립된 질서조차 충돌하는 다양한 관점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모순되는 속담이 존재한다는 건 어떤 상황에도 꼭 맞는 하나의 정답, 즉 필연적 진리는 없다는 걸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셈이라 할 수 있다. 삶은 단순하게 인과적으로만 흘러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돌과 돌산, 사막과 모래성과 같이 이미지 간의 친연성, 그리고 균형추를 통해 안정적인 중심과 균형의 의미를 구축하면서도 위태로운 공존이었듯, 허들 작품을 통해 숙명론적인 태도에도 무의식적으로 반발한다.
아틀라스라는 하나의 단어에서 여러 맥락이 쌓이고 여러 의미가 파생되었듯, 조은시의 아틀라스 역시 단일한 내러티브와 의미를 생성하기보다는 복수의 방향으로 의미를 분산시키고 확장한다. 땅 혹은 둥지, 어미 새와 같이 동일한 기원을 갖지만 동일한 결과로 수렴하지는 않는 것이다. 그의 작품은 기본적으로 오인을 바탕으로 그려지고 유도하며, 긴장과 유희를 섞어 정체성과 재현을 유머러스하게 흔든다. 해석의 단일화를 유예하는 시각적 장치로 작용하며 전체 속에서 튀는 개인과 다름이 드러나는 순간을 포착하여 우리 앞에 내보인다.
_글. 김다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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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태초의 신 중 하나이자 시간의 신으로 알려진 크로노스(Chronos, Χρόνος)와 티탄족의 왕 크로노스(Cronus/Kronos, Κρόνος)는 작물, 계절, 노화 등과 연관된 신으로 고대에는 다른 신이었다. 유사한 발음으로 인해 이 둘의 존재는 뒤섞이기 시작했고 로마 후기와 르네상스 미술에서 동일시하거나 상징적으로 연결해 해석되었다.
2) Benjamin H. D. Buchloh, “Gerhard Richter’s “Atlas”: The Anomic Archive, October, Vol. 88 (Spring 1999). 119-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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