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RTICLES] LEEHWAIK GALLERY
가림으로써 드러나는 창(窓), 김미영의 회화
조아라(전 서울시립미술관 큐레이터)
맑은 날,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내려오는 빛 줄기를 한 번쯤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특히 고딕 양식 성당의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는 그 조각들의 색채와 형태가 매우 다채로운데, 성당 안에 서서 유리 막을 통과해 내려온 빛으로 가득 찬 공간을 느끼다 보면 아름다움을 넘어 형용하기 어려운 숭고함마저 느껴진다. 태양이 내리쬐는 빛, 그 빛이 색유리에 투과되면서 내려오는 빛 줄기, 그리고 그 빛 줄기가 벽이나 물체 혹은 나에게 닿으면서 변화되는 형태와 색. 이 과정을 눈과 공기, 그리고 촉감으로 느낀 경험은 아마 종교가 없는 사람에게도 꽤 인상적인 순간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창이 없을 때는 그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다가, 창이 생겨나면 그것을 통해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가려짐으로써 도리어 인식되는 빛도 마찬가지이다. 역설적이면서도 숭고한 일상의 순간들. 작가 김미영은 이번 전시 < Transparent >에서 자신의 회화를 통해 관객이 이러한 순간을 경험하기를 원한다. “진심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사람과 소통하듯, 창 너머의 세계를 보여주는 유리 같은 회화가 되기를 바란다”고 이야기하는 작가의 소망대로 투명도가 높은 물감이 주로 사용된 그의 신작들은 색색의 투명한 유리 막과도 같아 보인다.
한국에서 동양화과를 졸업한 뒤 영국으로 건너가 왕립예술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한 김미영은, 동양화의 기법과 서양화의 재료가 접목된 그만의 독특한 회화 세계를 구축해왔다. 풍성하고 다양한 감각을 뿜어내는 특징 때문에 ‘다감각적’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을 수 없는 그녀의 작품은, 아름다운 색채와 자유로운 붓 터치의 움직임을 따라가며 느끼는 시각적 즐거움뿐만 아니라 자연에서 들려오는 소리나 피부에 닿는 촉감, 심지어는 맛까지도 상상하게 하는 화면들로 많은 이들에게 주목을 받아왔다.
그 동안 그녀가 선보인 회화들이 눈부신 녹음이나 화려한 꽃다발 같았다면, 이번 개인전에서 선보이는 신작들은 자연스럽게 늘어진 풍성한 버드나무 가지를 떠올리게 한다. 특히 < Dawn Walk >와 < Transparent >에서는 묽은 물감이 흘러내려간 흔적들이 이전에 칠해진 부분을 쓸어 내리면서 자연스럽게 번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작가가 동양화에 쓰이는 붓과 번짐 기법 등을 서양화의 안료와 캔버스에 접목하여 실험한 결과이다. 또한 < Vanilla Flowers >나 < Anna’s Dance > 등 에서는 의도적으로 여백을 많이 남겨두고 ‘transparent yellow’나 ‘cerulean blue’와 같은 투명도가 높은 물감을 주로 사용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마치 스테인드글라스와 같이 색유리를 통해 빛이 투과되는 듯한 효과를 낸다.
< Blow >와 < Midday >는 특히 제소를 바르지 않은 흡수율이 높은 린넨 천 그대로를 사용한 작품으로, 전에 스며든 모든 붓 터치의 형상이 남아 겹쳐져 있는 것이 눈으로 확인되는 작품들이다. 이들은 화선지나 비단에 그린 그림처럼, 한 획 한 획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화면과 마주한 작가의 신중한 작업 과정을 상상하게 한다. 천 자체가 지닌 결이 고스란히 드러나면서도 물감이 화면에 흡수되는 느낌이 강조되어 있어, 이전의 흔적들을 볼 수 있게 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잘 드러나는 작품들이다.
또한 이번 전시에서 특히 주목 해야 할 부분은 그의 격자 스케치이다. 그 동안 김미영 작업의 가장 안쪽 부분에 존재했지만 결과물에선 잘 보이지 않았던, 연필로 그린 격자 무늬. 작가는 오랜 기간 빈 캔버스를 대할 때마다 그것이 마치 깊게 뚫려 있는 심연으로의 구멍과 같이 느껴져서, 이를 막는 심리적 장치의 일환으로 격자무늬를 그려 놓고 작업에 임해왔다고 한다. 그러나 유화물감이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또 다른 물감을 지속적으로 얹어 작업하는 온 (wet-on-wet) 기법 덕분에(?) 그 동안에는 그것이 관객의 눈에 보이기는 힘들었다. 그러나 이번 신작들은 천의 질감을 예민하게 느끼면서 물감이 흡수된 모습을 드러내는 작업들이 즐비한 바, 작가가 의도치 않게 숨겨온 하나의 독특한 의식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 Sundance >와 < Summer Snow >에서 특히 잘 보이는 이 격자 무늬는 작가의 심리적 준비운동과도 같다. 캔버스를 실제 ‘공(空)’의 상태로 느끼는 작가는, 먼저 사선의 그리드를 빈 캔버스에 채움으로써 그것을 2차원의 평면으로 인식하고 나서야 서서히 본격적인 작업에 돌입할 태도를 갖춘다. 이 격자가 독특하다고 생각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이것이 제작 과정 전체를 놓고 보았을 때 다른 과정을 위한 보조적인 기능이 전혀 없는 독자적인 존재라는 점이다. 이는 그림의 구도를 위한 것도, 채색을 위한 것도 아닌 온전히 격자를 그리는 행위 그 자체를 위해서만 존재한다. 이것이 완성된 작품에서 잘 보일 것이냐 가려질 것이냐 하는 사실 조차도 작가에게 중요한 부분이 아니다. 즉, 이 격자 무늬 리추얼은 작가가 실제로 캔버스를 깊은 통로로 인식하고 있다는 반증이나 마찬가지인 것인데, 이는 김미영 특유의 춤추듯 자유로운 스트로크와 반대되는 꼿꼿하고 균질 한 특징을 지니고 있어 더욱 흥미롭다.
15세기 건축가이자 미술이론가인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는 그의 저서 『회화론』(1435)에서 ‘그림은 세계를 향해 열려 있는 창문’이라 표현하기도 했는데, 이는 3차원의 세계를 2차원의 화면에 완벽하게 재현해내는 것을 의미했다. 즉, 그림이라는 하나의 창문을 통해 또 다른 세계를 마주하는 경험을 선사하는 것, 그것이 르네상스 시대 회화의 목표 중 하나였던 것이다. 추상과 올 오버(all-over) 구도를 추구하는 김미영의 회화에는 르네상스 예술이 중시하던 환영적 재현도 수학적 원근법도 없지만, 캔버스를 다른 차원으로 가는 하나의 창으로 감각하는 태도 자체는 그 시대 예술가들과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르네상스 예술가들이 치밀하게 계산된 구도와 디테일 한 재현으로 창 너머의 또 다른 세계를 평면 안에 이룩했다면, 김미영은 물리적인 캔버스 프레임 자체를 네모난 통로로 인식하고 그 너머의 것을 보게 하는 매개물로 치환시킨 것이다.
이번 신작 중에서 특히 은색의 가장자리가 도드라져 보이는 < Dawn Walk >와 < Blowing in the Wind >는 공업적인 재료로 만들어진 실제 창문을 떠올리게 한다. 프레임 바깥 부분까지 물감이 튀어나오도록 제작했던 김미영의 기존 작업들을 고려할 때 이는 개념적으로 새로운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사각의 틀을 즉물적으로 재현함으로써 보는 이로 하여금 작가가 상상하는 빈 통로를 함께 인지하게 하고 그 안의 세계를 더 유심히 바라보게 하려는 것이다. 틀 안에 보이는 진한 초록과 흰 물감이 뒤섞여 만들어내는 풍경은 누군가에겐 바람 부는 들판이고, 누군가에겐 눈보라 치는 마음이다. 격자로 가리고, 프레임을 감싸고, 물감으로 채워 넣으면서 오히려 가시화되는 얇고 맑은 창. 이번 전시를 통해 가림으로써 드러나는 김미영의 새로운 창을 하나씩 들여다보며 관객 각자가 지닌 마음의 풍경과 마주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것이 이 전시의 작품들과 교감하는 가장 명확한 방법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