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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material: What Remains

박영환

전시 전경 (1)

감정이 지나간 자리에서, 한때 선명했던 생각이 서서히 빛을 잃고, 사건이 시간의 층 속으로 가라앉은 뒤 ㅡ 우리는 비로소 묻게 된다. ‘무엇이 남는가.’
 
전시 전경 (2)
 
이번 박영환 개인전 《Immaterial: What Remains》는 사라짐 이후에도 완전히 소멸하지 않는 어떤 감각, 형태를 잃은 뒤에도 지속되는 시간의 밀도에 대한 질문에서 출발하는 전시이다. 작가는 화면 위에 남아있는 형상 대신, 그것이 지나간 자리에서 여전히 작동하는 상태를 응시한다.
 
전시 전경 (3)
 
박영환 작가는 먹과 한지를 기반으로 작업해온 한국화 전공 작가다. 그러나 그의 회화는 전통 동양화의 재현 방식이나 화면 구성과는 분명한 거리를 둔다. 화면 위에 등장하는 검은 구체는 산수나 건축적 공간 속에 이질적으로 배치되며, 관습적인 풍경의 질서를 교란한다. 이 구체는 단순한 형상이 아니라, 작가의 내러티브 안에서 현재의 경험과 감정, 생각과 사건을 응축한 조형적 단위다. 색이 옅어질수록 그것은 휘발되어가는 기억과 감정의 상태를 가리킨다. 화면은 사물을 묘사하기보다, 감정과 시간이 놓이는 밀도를 시각화하는 장이 된다.
 
반추, 2026, 한지에 먹, 130.3×80.3cm
 
먹은 한지에 스며들고 번지며, 형태를 고정시키기보다 흔들리게 한다. 축적과 번짐, 그리고 소거의 가능성을 동시에 품는 이 재료는 작가가 관심을 두고 있는 ‘비물질성(immaterial)’의 감각과 맞닿아 있다. 여기서 비물질성이란 물질을 부정하는 태도가 아니라, 물질에 고정되지 않는 상태를 가리킨다. 화면 위의 형상은 분명 시각적으로 강렬하지만, 그것이 지시하는 것은 형태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 응축된 시간과 감정의 흐름이다.
우리의, 2026, 한지에 먹, 50x100cm
 
작가는 그동안 회화 작업을 기반으로 퍼포먼스를 병행해왔다. 화면에서 출발한 몸의 움직임은 회화의 행위를 시간 속으로 확장시키는 방식이었다. 그의 회화는 분명 수행적 감각이 잠재해 있다. 먹을 올리고, 덧입히고, 지워내는 반복적 행위는 결과로서의 이미지보다 과정으로서의 시간을 드러낸다. 회화는 완결된 오브제가 아니라, 사건이 지나간 자리에서 여전히 진동하는 상태로 남는다.
 
전시 전경 (4)
 
이번 전시에서 함께 선보이는 도판 작업은 이러한 작가의 관심을 또 다른 차원으로 확장한다. 도자기 판 위에 그려지고, 불을 거쳐 굳어지는 과정은 시간과 물질의 관계를 다시 한 번 환기한다. 불이라는 사건을 통과한 표면은 고정된 듯 보이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번짐과 응축의 흔적이 남아 있다. 사라질 것 같던 감정은 다른 형태로 전이되고, 휘발된 기억은 표면 아래에 잔존한다.
우리, 2026, 청화백자에 나무프레임, 21.6×13.7cm
 
작가는 지금 자신의 작업이 하나의 전환기를 지나고 있다고 느낀다. 이미 형성된 조형 언어 위에 서 있으면서도, 그것을 반복하는 데 머물지 않고 그 조건을 다시 질문하는 시점. 검은 구체는 여전히 화면에 존재하지만, 그것이 놓이는 공간과 밀도, 관계의 방식은 조금씩 이동하고 있다. 이번 개인전은 완결된 선언이 아니라, 변화의 과정이 가시화된 장에 가깝다.
 
회고, 2025, 한지에 먹, 130.3×193.9cm
 
《Immaterial: What Remains》에서 ‘남아 있는 것’은 물질로 환원되지 않는다. 그것은 사라진 감정 이후에도 남는 흔적이며, 한 작가가 자신의 언어를 통과하며 붙들고 있는 질문의 상태다. 화면 위의 구체가 점차 옅어지더라도, 그 자리를 지나간 시간은 지워지지 않는다. 남는 것은 형태가 아니라, 형태를 가능하게 했던 감각과 기억의 밀도다.
 
반추, 2026, 한지에 먹, 145.5×89.4cm
 
이 전시는 묻는다. 경험이 지나간 뒤, 감정이 휘발된 뒤, 작업이 하나의 국면을 넘어선 뒤에 — 무엇이 남는가. 그리고 그 남아 있음은 지금 이 순간, 어떻게 다시 시작되는가.
 
/ 김정원 (맥화랑 큐레이터, 2026)
 
맥화랑
부산시 해운대구 달맞이길117번 나길 162, 2층
051-722-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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