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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현과 박생광 | 그대로의 색깔 고향

2023
윤범모 (미술평론가)

 

한국회화의 역사는 그야말로 유구하다. 하지만 전쟁과 환난은 미술작품의 보존에 악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현재 남아 있는 작품은 그렇게 많지 않다. 시대가 올라갈수록 특히 그렇다. 그 가운데 종이나 비단에 그린 회화작품의 수난은 더 심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현재 미술사학계의 연구 풍토를 보면, 대개 조선시대를 중심으로 하고 있고, 그중에서도 수묵 문인화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많다. 예컨대 한국 회화사라는 제목의 교과서 같은 단행본을 보면 이 같은 지적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책에는 이른바 민화를 비롯 채색화 부분은 매우 소략하다. 어찌 이렇게 되었을까. 나는 근래 수묵 문인화 중심의 한국 회화사 연구풍토에 대하여 비판적 언설을 자주하고 있다. 고구려 벽화 이래 고려와 조선의 불화 그리고 다양한 궁정 회화, 조선 말기의 이른바 민화 부분까지 우리 채색화 역사의 찬란함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채색화 다시 보기. 이는 우리 시대에 주어진 중대 과제임을 실감한다. 일본은 채색 중심의 ‘일본화’를 발전시켜 왔다. 물론 일본인의 색채 선호는 우리 한국인의 오방색 중심의 원색 선호와 비교하여 간색(間色)인 2차 색을 좋아한다. 청순가련형의 일본 미인도가 이점을 입증하고 있다. 정색(正色)을 좋아하는 한국인과의 색채 정서는 사뭇 다르다. 20세기 전반부의 한반도는 일제에 의한 식민지 시대를 거쳐야 했다. 이때 일본화풍의 채색화가 유행했다. 문제는 해방 이후다. 미술계 내부는 채색화 자체를 일본화풍이라하여 경원시여겼다. 그와 같은 미술계 풍토는 날로 채색화 분야의 입지를 축소시켰다. 현재 미술대학 실기실을 보면 채색 전공 학생의 부재를 확인할 수 있다. 아니, 학생들이 배우고 싶어도 가르칠 담당 교수가 없는 현실이다. 어떤 미술대학 한국화과의 경우, 교수진 모두가 유화 작업을 하고, 전통 바탕의 채색화는 아예 존재조차 없다. 전통의 단절 상태. 이는 참으로 안타깝게 하는 오늘의 미술교육 현장이기도 하다. 20세기 대표적 채색화가를 뽑으라 한다면, 나는 당연히 우향(雨鄕) 박래현(1920-1976)과 그대로 박생광(1904-1985)을 우선 염두에 두겠다. 이들은 식민지 시대에 미술 입문을 경험했고, 때문에 젊은 시절 일본화풍을 수학한 배경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고난의 세월을 보내면서 뒤에 독자적 화풍을 수립하는 입지를 보였다. 박래현은 1960년대 새로운 화풍으로 당대 미술계를 대표하는 화가로 부상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박래현은 청각장애의 운보 김기창 화가의 아내로서 그야말로 삼중통역자 노릇을 잘했다. 외국 여행이라도 가면 장애의 운보를 위하여 한국어, 영어, 그리고 구화(口話)의 삼중 통역을 감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박래현은 현모양처의 표상으로 사회적 칭송도 자자했다. 그는 봉건 사회의 잔재가 남은 풍토에서 여성작가로서 고난의 세월을 헤쳐 나갔다. 그 결과 20세기 한국의 대표 여성 화가로 부상될 수 있었다. 박생광은 나이 70대에 채색화의 신경지를 이룩한 입지전적 화가이다. 1980년대 그가 이룩한 채색화는 단연 독보적이었으며, 오방색을 비롯한 원색에 재인식을 시켜 주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나는 1980년대 중반 중앙일보사 신사옥에서 개관한 미술전시관의 실무 책임자로 일했다. (개관 당시의 명칭은 중앙일보사의 직영이어서 중앙갤러리였으나, 곧 삼성그룹의 창업주 이병철 회장의 아호를 따 호암갤러리로 개칭했다. 뒤에 삼성미술문화재단 소속으로 삼성미술관 리움으로 바뀌었다.) 개관 당시 우리 미술계는 큐레이터라는 용어도 없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조차 아직 학예실이라는 직제를 마련하고 있지 않았다. 나는 전시기획자로서 다양한 전시를 추진했다. 그런 가운데 박래현 회고전을 주최했다. 1985년 10주기 회고전 형식으로 박래현 예술을 대규모로 집대성한 전시였다. 내가 운보 김기창 화백과 가까워지는 계기이기도 했다. 우리는 필담으로 대화를 하다가 친해진 뒤에는 필기구가 필요 없어졌고, 뒤에 운보는 나의 소리 없는 입 모양만 보고도 말의 뜻을 이해했다. 호암의 박래현 전시는 채색화 혹은 여성미술의 잔치와 같았다. 2020년 나는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으로 덕수궁관에서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박래현 회고전을 대규모로 개최했다. 이 전시는 의도적으로 김기창의 그늘을 삭제하고 순수하게 박래현 예술에만 집중하도록 했다. 그 결과 박래현 예술의 진면목을 여실하게 드러낼 수 있었고, 이는 박래현 재조명에 기여도를 높이게 했다. 한마디로 근대기 한국 여성 미술의 최고봉이 박래현임을 확인하게했다. 정말 그랬다. 덕수궁 전시는 연고가 있는 청주관으로 옮겨 앙코르 쇼를 하여 계속 각광을 받았다. 박생광의 경우, 나의 미술 평단 신인 시절부터 관심 대상 작가 명단에 있었다. 자연스럽게 화가와 인사를 나누게 되었고, 그의 작품과 접하는 기회도 많아졌다. 나는 박생광의 미술사적 의의를 확신하고 호암갤러리 전시의 하나로 추진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미술계에서 박생광에 대한 이해도는 낮았다. “무슨 무당 그림 가지고 전시를 하느냐”고 핀잔을 곧잘 들었기 때문이다. 주위에서 무어라 말하든 나는 꺾이지 않고 수유리의 박생광 화실을 출입하면서 회고전을 추진했다. 수유리 한옥의 문간방을 잊을 수 없다. 대작은커녕 소품조차 여유롭게 할 수 없는 비좁은 공간이었다. 그래도 창작에의 열정은 최고도로 올라 화가는 대작을 시도했다. 둥그렇게 말린 종이의 한쪽은 펴고, 또 한쪽은 말면서 그림을 그렸다. 전시장에서 작품을 걸어야 화가는 처음으로 자신의 작품 전체를 한 눈으로 볼 수 있었다. 그 흔한 화실 하나도 마련할 수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쭈그리고 앉아 그림 그리는 모습, 이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제작 환경은 열악했지만 거기서 말년의 대표작이 생산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명성 황후나 전봉준 혹은 석굴암이나 국사당이 같은 소재의 대작을 볼 수 있게 되었다. 화가의 말년은 후두암으로 고생 많았다. 턱에 커다란 풍선 같은 혹이 생겼다. 당신의 표현대로 형편없는 몰골이었다. 그래서 화가는 외부인사를 만날 수 없었다. 병세가 악화될수록 화가는 나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나는 화가의 일생을 자원하여 정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화가의 작품을 정리하면 할수록 작품의 진가는 날로 높아졌다. 박생광 회고전 추진은 성공시키지 못했고, 뒤에 작가 사후에 가까스로 유작전으로 개최할 수 있었다. 유작전은 박생광 예술의 진면목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더불어 미술시장의 반응도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우리 미술계는 아주 중요한 채색화가를 얻은 셈이었다.

박래현의 생애에서 중요한 계기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그 가운데 1956년은 주목할 만하다. 이 해 화가는 대한미협전에 <이른 아침>을, 그리고 국전에 <노점>을 출품하여 각각 대통령상을 받았다. 이들 수상작은 새로운 화풍의 시도로서 구습에 젖어 있던 당대 화단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현실 생활을 주목하면서 화면 구성의 짜임새와 입체파적 분위기의 인물 표현, 그리고 유려한 선의 구사와 안정감 있는 색채 구사 등 걸작이었다. 일본화풍은 물론 고답적 중국 문인화풍으로부터도 벗어난 독자적 세계였다. 박래현은 해방 이후 김기창과 거의 매년 부부전시를 개최했다. 1947년 제1회전을 시작하여 1971년까지 12회를 개최했다. 이들 부부는 전통 화단에서 이색적 존재였다. 그래도 ‘운보의 그늘’은 늘 따라다녀 마침내 박래현의 뉴욕 ‘탈출’ 을 단행하게 했다. 그는 1969년부터 73년까지 뉴욕에서 새로운 기법의 판화 작업을 하면서, 또 남미 여행을 하면서, 새로운 세계에 들어갔다. 뒤에 그는 구상의 세계에서 벗어나 순수 추상회화 작업을 했다. 구성의 아름다움 그리고 색채 감각, 이는 독보적 세계에의 진입이었다. 특히 멍석이나 엽전 꾸러미 같다는 색깔 띠 작업은 단연 돋보였다. 이 같은 색띠 작업은 시각적 아름다움 이외 상징성을 읽게 한다. 나이테 그리고 여체 혹은 임신 같은 분위기도 자아내지만, 나는 이들 색띠 작업에서 ‘생명성’이라는 상징을 읽고 있다.

여성 화가의 새로운 도전, 그것은 생명 외경의 사상을 기본으로 한 과감한 도전이었다. 박생광은 무엇보다 농채의 활용 즉 채색의 진수를 보여주었다는 점을 주목하게 한다. 그는 전통에서 소재를 얻어 온 바, 그렇다고 그대로 재현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았다. 화가가 즐겨 차용한 소재는 우리 겨레의 민속, 무속, 불교, 역사 등이다. 그렇다고 박생광 작품을 무속화, 불화, 역사화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소재를 빌려오기는 했지만 화가 나름대로 소재를 재구성하고 상징성을 따로 부여했기 때문이다. 박생광식의 화풍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그동안 박생광 관련 전시나 논고 집필 등 인연을 두텁게 했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반복하고 싶지는 않다. 한마디만 강조한다면, 박생광은 오방색이라는 원색을 기본으로 하여, 그리고 우리의 전통을 바탕으로 삼아, 새로운 조형세계를 창출했다는 점에서 미술사의 커다란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이번 Kiaf SEOUL 2023의 특별전으로 박래현과 박생광을 주목하고 전시를 마련한 것은 획기적이라 할 수 있다. 국내외 미술 애호가가 운집하는 대형 미술행사에 이들 작품을 소개할 수 있다는 의미는 매우 크기 때문이다. 그동안 한국의 단색화가 미술시장에서 주목을 받는 등 단색화 시대를 거쳐왔다. 이제 한국미술의 외연 확장을 위해서도 채색화 부분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아니, 원래 한국회화사의 중심은 채색화였다. 이는 역사적으로도 찬란한 채색 전통을 재인식할 필요가 있다. 취미 생활이기는 하지만, 오늘날 이른바 민화 그리기 대열에 동참한 애호가는 수십만 명에 이르고 있다. 이들 아마추어 가운데 본격적으로 작업하는 작가 후보들이 속출하고 있다. 민화라는 용어는 식민지 시대 한 미학자가 만들었고, 그 개념 정리도 엉성하기 그지없다. 게다가 궁정회화까지 민화라는 범주에 넣는 등 모순을 자초하여 입지를 좁힌 바 있다. 이른바 민화의 특색은, 형식적으로 채색화이고 내용적으로는 행복 추구다. 그래서 민화는 채색 길상화(吉祥畵)라고 부를 수 있다. 이들 길상화를 비롯 전통 채색화의 현대화와 국제화 작업이 절실한 시점이다. 나는 우리 채색화를 국제 경쟁력이 넘치는 분야라고 믿고 있다. 채색화야말로 한국화의 본류이기 때문이다. 이번 박래현과 박생광 전시는 원래 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개최했던(2023년 3월) <위대한 만남, 그대로 우향>을 기본으로 했다. 당시 전시는 270점가량을 선보인 대규모였고, 게다가 박래현과 박생광이라는 작가 명성 때문인지 대중적 갈채를 모았다. 이와 같은 여세를 염두에 두면서, 이번 Kiaf SEOUL 2023를 계기로 채색화의 영광을 재현해 보고자 새롭게 마련한 특별전이라 할 수 있다. 이름하여 <그대로의 색깔 고향>이다. 박생광의 아호 ‘그대로’와 박래현의 아호 ‘비의 고향(雨鄕)’ 에서 따온 명명이다. 그대로의 색깔. 이는 채색 중심 우리 전통 회화의 영광을 재음미하고자 하는 염원의 발로이기도 하다. 전시 공간의 한계 때문에 부득이 한가람 전시의 압축판으로 핵심만 모으기로 했다. 물론 당시 선보이지 않은 가나문화재단의 소장품 등을 추가하여 약간의 변화를 시도했다. 이제 새로운 분위기에서 박래현과 박생광의 주옥같은 명품의 참모습이 보다 널리 조명되기를 기대할 따름이다.

 

총괄 기획 – 윤범모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미술 평단에 등단한 이래 미술비평, 전시기획, 미술행정 등 다양한 미술 현장에서 활동해왔다. 중앙일보 기자, 호암갤러리 큐레이터를 거쳐 가천대 회화과 교수, 동국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좌교수,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역임하는 한편, 창원조각비엔날레 총감독, 경주세계문화엑스포 예술총감독, 광주비엔날레 특별프로젝트 책임큐레이터 등을 지내며 다수의 전시 기획을 맡아 왔다.

큐레이터 – 김윤섭

현 아이프 칠드런/미술경영연구소 대표이자 숙명여대 미술대학 겸임교수, 예술경영지원센터 이사직을 맡고 있다. 동국대 사회교육원 교수를 역임하였고 국립현대미술관 운영위원, 서울시 공공미술위원 및 정부미술은행 운영위원 을 지내며 국공립 미술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또한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 예술감독, 한강조각프로젝트 전시감독 등을 지내며 전시 기획에도 활발히 참여하고 있다.

코디네이터 – 이보름, 임재훈

 

Rehyun Park, Work, Ink and color on Hanji, 168.2×134.5cm, 1967

Rehyun Park, Early Morning, Ink and color on paper, 253x194cm, 1956

Rehyun Park , Work, Ink and color on Hanji, 150.5 ×135.5cm, c.1963

Saengkwang Park, Sunset, Ink and color on paper, 137x140cm, 1979

Saengkwang Park, Shaman12, Ink and color on paper, 136x139cm, 1984

Saengkwang Park, Flower Palanquin, Ink and color on paper, 170.4×90.4cm, 1979

 

우향(雨鄕) 박래현 (1926-1976)

 

평안남도 진남포 출생
경성사범대학교, 일본여자미술전문학교
봅 블렉번 판화연구소 및 뉴욕 프래트그래픽센터 수학
성신여자사범대학교 교수 역임

 

주요 개인전

2020 탄생 100주년: 삼중통역자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1995 시옴 화랑
1974 신세계 미술관

 

주요 단체전

2023 위대한 만남, 그대로·우향, 예술의 전당
2004 한국미술의 힘 I, 가나 포럼스페이스
2001 채색의 숨결- 그 아름다움과 힘전, 가나 아트센터
2000 한국 현대미술의 시원, 국립현대미술관
1998 한국 근대미술: 수묵, 채색화- 근대를 보는 눈, 국립현대미술관
1998 세계 인권 선언 50주년 기념전, 예술의전당
1995 현대미술 50년전, 국립현대미술관
1994 음악과 무용의 미술전, 예술의전당
1992 한국 근대미술 명품전, 호암갤러리
1992 한국 현대미술의 한국성 모색 IV부전, 한원 갤러리
1986 한국화 100년전, 호암갤러리
1985 유작전, 호암미술관
1978 유작전, 국립현대미술관
1973 마이애미 그래픽 비엔날레, 미국 플로리다 미술관
1972 한국 근대미술 60년전, 국립현대미술관
1972 한국 현대회화전, 샌프란시스코 Asia 화랑
1967 제9회 상파울로 비엔날레 국제전, 상파울로
1957 백양회 창립전, 화신백화점 화랑
1957 현대 한국화가전, 뉴욕 월드하우스 화랑

내고(乃故) 박생광 (1904 -1985)

 

경남 진주 출생
진주농고 졸업, 교토시립회화전문학교 졸업
1969 경희대학교 강의
1968-1975 홍익대 동양화과 강의

 

주요 전시

2023 위대한 만남, 그대로·우향, 예술의 전당
2019 대구미술관 박생광 전
2005 진주 MBC 주최 <박생광 탄생 100주년>기념전
2004 경남 도립미술관 <박생광 탄생 100주년>기념전
갤러리 현대 <박생광 탄생 100주년>기념전
부산 시립미술관
스페이스 C <그대로 박생광>
1993 다보성 갤러리 유작전
1986 호암갤러리 <박생광화백 1주기 유작전>
1985 파리 그랑팔레 <르살롱-85>
<한국 16세기부터 오늘날까지의 예술>전
1984 서울 문예진흥원 미술회관
1978 마산 동서화랑
1977 서울 진화랑 (첫 번째 개인전)
1975 동경 彩壺堂
동경 東京商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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