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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노래하는 서정시

2023. 2. 7 – 2. 28
채림

채림, 산과 섬, 2021, 122x162cm

옻칠로 쓴 서정시

이용우 미술이론가 / 상하이대학 교수

예술가 채림의 옻칠 작업이 현대미술로 거듭나는 데는 지난한 끈기와 연구의 과정이 동원됐다. 이러한 과정은 작품의 형식적 변화나 옻 기술의 진화만으로 획득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선 옻칠이 기능적 예술에서 탈기능적 담론의 수준으로 격상시킬 수 있는 장르라는 사실을 작품으로 입증해야 하고, 현대미술의 복잡한 개념적 정의와 울타리를 넘나들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현대미술의 존재이론들은 기능적 완성도보다는 프로세스 중심의 실험정신과 시대정신, 작품이 가지는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자주성을 묻는 태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채림의 ‘옻 그림’은 전통의 뿌리를 튼튼하게 가진, 그러면서 더욱 새롭고 다양한 진화과정에 있다. 그의 예술은 세련된 옻을 다루는 기술, 그리고 보석디자인기술의 완성도가 뒷받침 하는 공예적 전통과, 그것을 다시 현대미술과 만나게 하는 적응력이 매우 주목을 끈다. 현대미술이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개념과 물질, 비물질, 행위, 아방가르드의 전복적 가치들이 연대하여 만들어낸 자극적인 퓨전 요리라면 채림의 예술은 옻칠이 빚어낸 감칠맛 나는 시적, 감성적 풍경화이다.

채림의 예술을 공예적 전통과 기술을 바탕으로 한 현대미술이라는 술어가 적절한 것인지는 더 들여다봐야 하지만, 현대미술로서의 옻칠 작업을 보는 것은 신선한 충격이다. 이러한 노력은 오늘날 공예를 진흥시키기 위한 각 직능별, 단체별 노력이 돋보이는 상황에서 공예를 단순히 전통예술이나 상품으로 정의하는 협소한 시각에 대한 적극적 제안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제안이 담고 있는 신선한 야망은 기능적으로 중요한 전통예술이 거꾸로 탈기능적 현대미술과 만났을 때 답이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채림, 삶의 한가운데, 2022, 122x162cm

채림의 ‘옻 회화’는 20세기 초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유화(oil painting)의 마티에르(matière) 효과를 연상시킨다. 캔버스에 대한 심미적 해석으로 불리는 마티에르 작업은 가령 평면 회화의 주 재료로 쓰이는 캔버스나 종이, 나무 등이 재질에 따라 표면에 많은 변화가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시작되었다. 유화는 기름 물감의 성질상 두껍거나 얇게 칠할 수 있고, 붓의 터치를 극대화시켜 독특한 질감(質感)을 갖게 할 수 있다. 따라서 마티에르란 재질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의 귀결로 볼 수 있으며, 예술가의 의도에 따라 미적 완성도가 달라진다. 채림의 옻 회화에 나타난 평면의 질감은 옻의 기능적 완성도를 바탕으로 그 두께나 깊이를 조절함으로써 만들어내는 다양하고 세련된 미감이다. 이 독특한 표면효과는 그 자체만으로도 다양한 풍경을 연출하고 색채의 다양한 스펙트럼은 서정적 감수성을 드러낸다.

나무에 여러 번 옻칠을 반복하여 만들어진 다양한 표면은 독특한 색감과 광택, 윤기를 드러낸다. 이러한 효과는 캔버스에 붓을 사용한 효과보다 더 선명하고 자극적이다. 캔버스의 마티에르 효과는 유화물감의 액체성분에서 발산하는 미완성의 색채감이 아름답지만 옻칠에서 생산된 모호한 윤기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스푸마토 기법을 연상시키는 몽환적이고 자극적인 회화성이 있다. 녹색이나 짙은 푸른색, 붉은 색, 검정색을 타고 상승하는 듯한 곡선들은 흡사 초서체로 휘갈겨 쓴 서예의 상승기류를 보는 듯하다.

채림은 나전칠기 과정인 옻칠, 생칠, 흑칠 등의 기술적 적용을 회화적 표면 만들기에 대입할 경우 그 표면은 다양한 신비로운 결과를 생산한다는 사실을 확인시킨다. 채림의 입체적 평면, 또는 조각적 회화로 묘사될 수 있는 복합적 양식들은 이러한 기술의 완성도가 뒷받침하는 결과물로서 관객에게 신뢰를 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날렵하고 세련된 세기들이 기능적이고 서정적인 단면을 넘어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확산된 주제들과 만났을 때 어떻게 나타날지는 연구과제가 될 것이다.

채림은 옻칠에서 획득한 회화적 자신감을 보석디자이너로서 닦은 기능성을 바탕으로 입체 작품에 도전했다. 세공기술의 한계를 옻칠로 확장시킨 것처럼, 보석디자인의 장점이자 약점인 장식성을 제어하면서 과거 부조나 판넬에서 창조한 서정적이고 유연한 감성의 입체들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시도가 농익어 자주적 질감과 미적 동기를 찾아갈 때가 되면 채림의 예술은 드디어 하이브리드(hybrid) 미학이라는 현대미술의 다채로운 옷을 입고 재도약 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복잡한 혼성형형식의 예술을 대하면서 자주 언급하는 하이브리드는 그 개념이나 서술형식에서 거침없는 미학적 반란들을 수용하는, 급진적이고 실험적인 모험들이 교차하는 토론의 장이기 때문이다. 아방가르드의 혁명적이고 전복적 정신은 현대미술의 시작에서부터 그 배후에 오랜 동안 머물고 있으며, 이러한 개념미술에 대한 환호, 횡포는 오늘날 다양한 담론들은 풍성하게 하는 모체다.

채림의 아름다운 옻칠처럼, 오늘날 미술대학에서 잘 가르치지 않는 애석한 기예들은 현대미술의 개념적 논제나 담론에도 잘 노출되지 않는다. 그러나 사회적인 관심이 확장되어 있는 분야, 예를 들어 마리나 아브라모비(Marina Abramović)처럼 자신의 몸을 뛰어나게, 익숙하게 다루는 퍼포먼스예술의 경우는 다르다. 신체가 전통매체보다 훨씬 사회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표현의 민감성. 확장성 때문이다. 시각예술이란 예술가들의 아이디어가 일정한 재료, 기법과 만나 합성된 것이라는 전통을 의심하고 심문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개념미술이다. 말하자면 캔버스에 일정 비율의 물감을 바른 평평한 물질(회화)이 예술가의 손을 떠나는 순간 역사적, 미학적, 경제적 의미를 갖게 되는 아이러니를 비판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주 오랜 동안 우리 곁을 지켜온 옻 기술, 칠기예술의 렌즈를 통해 사물을 다시 볼 것을 권유하는 채림의 예술언어는 아름다운 귀환이다.

채림은 보석이나 장신구들처럼 물질이 기능적으로 바뀌는 순간 전혀 다른 사회적 가치를 갖게 되는 현상에 대하여 질문을 던진다. 말하자면 기능이 없는 ‘물질’과 기능이 입혀진 ‘비물질’ 사이의 아름다움의 차이를 규명하는 것, 그리고 다시 기능적인 것과 회화적인 것 사이의 감성의 차이를 세밀하게 표현한다. 그러므로 기능이란 라벨이며, 이 사회적 라벨이 형성해 온 편견의 무게를 버리도록 유도하는 상징시들을 옻칠이라는 확장된 예술의 그릇에 담아 놓는다. 말하자면 각기 다른 개체들의 아름다운 색채와 도형들이 뿜어내는 생명현상이 목격되도록 순수한 예술의 옷을 다시 입히는 것이다.

채림, 자연의 노래, 2022, 혼합재료,116×72.7cm

라우갤러리
경주시 알천북로1
054-772-9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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