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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여현: 현대의 신화

2022. 7. 8 – 8. 13
권여현

권여현, 낯선 숲의 일탈자들 Deviators in Heteroclite Forest 4O1A0512, 2022, Oil on canvas, 194 x 260cm

“생성의 선은 점들 사이를 지나가며… 시작도 끝도 없으며 출발점도 도착점도 없고 기원도 목적지도 없다.”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천 개의 고원』

갤러리JJ에서는 인간에 대한 실존과 자아에 관해 탐구하는 작가 권여현의 개인전을 개최한다. < 현대의 신화 Myth Today >라는 제목으로 열리는 이번 전시는 ‘낯선 숲의 일탈자들’ 시리즈의 신작회화들을 선보이는 자리로, 최근의 보다 경쾌하고 감각적인 작업으로의 변화를 중심으로 그가 모색하고 있는 작품 세계를 새롭게 살펴보고자 한다. 약 2년 정도의 최근작은 예전의 딱딱했던 형태와 달리 빛이 느껴지는 투명하고 맑은 색채와 재빠른 붓 터치가 살아있어 즉흥적이고 감각적인 화면을 보여준다. 화면에는 유행 혹은 밈(meme)으로 자리잡을 것만 같은 힙합, 레트로 스타일의 젊은이들이 맘껏 활보하면서, 고대 신화 속 인물을 제치고 현대의 ‘일탈자’들이 전면에 등장한 모양새다.

권여현의 작업은 인간들의 이성적 삶 이면의 욕망과 원초적인 감각이 깨어나는 장소를 상정한다. 그것은 현실 속의 또 다른 헤테로토피아, 매트릭스일 것이다. 그는 2000년대부터 주로 ‘마법의 숲’이나 ‘코나투스의 숲’, ‘메두사의 숲’, ‘오필리아의 숲’ 등 작품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숲 그림 및 신화나 철학의 아우라를 지닌 작업으로 잘 알려져 있다. 디오니소스와 오이디푸스, 오필리아는 현재까지 그의 작업에서 중요한 등장인물이자 개념이다. 마치 한바탕 꿈의 장면처럼 서로 다른 시공간의 이질적인 장면들로 버무려진 화면에는 주로 문명에 훼손되기 이전의 싱싱한 원시림과 바다 등의 자연 풍경이 신화나 흘러간 시간 속 인물들과 함께 압도적으로 펼쳐진다. 그 신비롭고 미궁 같은 광경에 마치 그물망처럼 시공을 넘나드는 풍성한 이야기가 포획되어 있어 작품은 텍스트적으로 읽힐 수 있다. 흡인력 있는 감각적 에너지와 함께 상징과 기호로 빼곡히 포진된 이미지들은 익숙한 듯 낯선 장면들로 궁금증을 유발하며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다만 늘 반전을 꾀하는 작가의 화면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각 내러티브와 미시적 해석은 시작일 뿐이라는 것이다. 화면에서 형상들이 창출하는 에피소드는 때로 규정되지 않은 이미지이자 각각 하나의 자율적인 요소로 작용하며, 우발적 마주침과 우연성으로 또 다른 가능성을 여는 감각의 재배치이자 끊임없이 접속하여 관계 맺음으로써 사건을 생성하는 리좀(Rhizome)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할 뿐이다. 우발성과 우연성은 그리는 표현 방식에도 적용된다.
권여현은 이러한 다양성과 혼종성의 현대적 작업으로, 80년대 한동안 유행처럼 회자되었던 ‘포스트모더니즘’ 회화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작업은 평면을 중심으로 하지만 때로는 사진과 영상, 콜라주, 퍼포먼스, 설치 등 다양한 매체로 나타난다. 그는 80년대 후반부터 비교적 이른 나이에 미술계에 두각을 드러내었고, 이후 관객과 미술 평단의 사랑을 받으며 왕성한 작업량을 보이기로 국내에서 손꼽는 작가 중 하나이다. 35여년의 오랜 기간 인문학적 성찰을 바탕으로 실험적이면서도 독자적으로 탄탄하게 조형언어를 구축해온 그의 상징적인 작품세계는 이미 작품성을 인정받으며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하여 주요 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되어 왔다. 현재의 작업을 기존과 비교해본다면, 현 사회 현상과 좀더 밀접하게 진일보한 자아 인식, 그리고 이미지의 차용과 조형 방식에 있어서 보다 유동적이며 자유롭다.

화면은 일탈자의 장소다. 그의 작업에는 늘 일탈자가 있었다. 신의 세계에서 불을 훔쳐내 인간에게 가져다 준 프로메테우스, 자신의 눈을 찌르고 가혹한 운명으로부터 스스로의 의지대로 삶을 이루어나가는 오이디푸스, 그의 딸 안티고네 역시 국가권력과 기존질서보다 인간 존엄성을 위한 자신만의 선택을 했던 체제의 일탈자였다. 상상력 이론의 철학자 뒤랑(Gilbert Durand)은 신화를 인간의 상상세계라는 거대한 체계 속에 편입시킨 다음, 거기서 모든 인간현상을 이해하는, 삶의 표면보다는 깊이, 즉 인류의 공통 토대라고 할 수 있는 원형(archétype)을 제시한 바 있다. 신화를 모든 인간현상의 ‘상상적인 잠재태’로 보는 것이다. 작가의 화면에서 이제 고대 신화는 인간사회가 만들어낸 견고한 벽에 도전하는 ‘현대의 일탈자’의 신화로 이어진다.

권여현, 낯선 숲의 일탈자들 Deviators in Heteroclite Forest 4O1A0623, 2022, Oil on canvas, 130 x 162cm

일탈자와 오필리아
이번 전시에서 화면의 중심을 차지하는 발랄한 현대인들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의 히피(hippie) 스타일의 청년들과 영화 속의 어설픈 우주인 같은 독특한 캐릭터, 동심에 빠진 키덜트, 키치로 대변되는 하위문화로 규정한 것들이나 크든 작든 반항적으로 치부되는 일탈 행위를 하는 인물들이다. 작가는 이들을 일탈자로 칭하며, 고정관념으로 보아 다소 과장되고 부자연스러운 이들의 행위에서 자신의 억압된 욕망과 감각을 대신 표현해주는 현대적 히피의 기호를 찾았다.
베트남전쟁 반대시위, 프랑스 6.8학생운동 등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당시의 슬로건처럼 기존체제에 대한 저항으로 점철되었던 60년대 후반에는 미국의 히피족이나 우드스탁페스티벌, 영국의 펑크 등 다양한 대중문화들이 생겨났다. 대항문화의 기수였던 히피는 성 해방, 환각제, 록 음악(Rock music), 꽃 등의 스타일로 통했고, 물질문명을 비판하며 인간성 회복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대항문화는 현재의 사회 현상, 이를테면 빈티지 복고풍의 레트로 마니아에서부터 스트레스 해소 욕구와 디지털 문화 트렌드가 만든, 잊힌 것들이 ‘힙’해지는 ‘밈’처럼 유머와 우회적인 방법으로 발산되기도 한다. 이번 권여현의 내러티브는 중심이 아닌 키치, 하위문화와 일탈자들의 신화로 시작한다. 원래 허구적이고 비논리적인 이야기(Mythos)에서 시작한 신화(Myth)가 사회적 통념이나 가치, 이데올로기처럼 한 문화의 사회적 현실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방식이 될 수 있다.
한편 ‘끊임없이 조작되는 현실을 자연성으로 포장해버리는 사회’에 대한 바르트(Roland Barthes)의 지적처럼, 너무나 익숙하여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사회현상은 나도 모르게 체화되는 이 시대의 신화일 것이다. 들뢰즈(Gilles Deleuze)가 밝힌 바, 국가 권력과 자본주의로 구조화된 문화와 질서는 교묘하게 욕망과 죄의식을 개인에게로 내면화하였다. 19세기 오이디푸스콤플렉스라는 정신분석까지 이에 동참하면서 자본주의가 원했던 욕망구조에 순응하게 만들었고 이는 현대를 살아가는 독특한 무의식의 상황, 금기를 사회 속에서 코드화시켰다. 자본과 조작되고 권력화된 미디어의 홍수가 물질의 풍요를 가져다 준 대신 끝도 없이 모순된 욕망을 부추기는 오늘날, 생각해보면, 우리는 잘 짜인 사회 구조에 순응하고 길들여져서 하루하루를 본래적 자기자신과 감각도 잊고 살아가는 존재다.

작가는 일탈자들에게서 획일화된 사회적 가치로 인해 희생되고 소멸되어야 했던 것들, 이성적 사회체제의 틈바구니에서 때때로 삐져나오는 감각적 욕망에 주목한다. 감각은 늘 욕망과 정서에 관계한다. 이때 욕망이란 보다 인간적인 것으로, 인간 본연의 끊임없이 운동하는 긍정적인 힘에의 의지 같은 것이다. 통제된 욕망은 일상 속에서 나름의 방법으로 위장하여 일탈로서 나타나지만, 자연적인 행위로 본다면 일련의 긍정적 신호일 수 있다. 소극적이지만 굳어버린 감각과 사고에서 탈출하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기존의 가치관이나 고정된 정체성에 구애되지 않고 이전과는 다른 자신으로 변화할 수 있다. 그림에서 일탈자는 잠시나마 기존권력으로부터 탈주선을 타고 지금 순간을 온전히 자신의 시간으로 만든다.
질서의 전복과 이성에 저항하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심미적 삶을 이끄는 하나의 동인이기도 하다. 이러한 관심과 더불어 ‘나’라는 실존의 관심에서 시작하여 지금껏 사회적이고 역사적 존재, 주체로서의 존재 탐구에 천착해온 작가에게 무엇보다 개인적인 자아에서 사회적인 자아로 넘어가는 과정은 중요하다. 상징계로 진입하여 사회화되기 이전의 순수한 야생의 오필리아가 나신의 여인으로 지금껏 화면에 많이 등장한 것은 사회적 주체 형성에 대한 작가의 관심을 보여준다. 정신분석학자인 프로이트와 라캉이 ‘오필리아의 신화’와 ‘연못에서의 죽음’이라는 에피소드를 가져온 같은 맥락에서다. 유토피아적이고 순수한 상상계로부터 언어화되고 교육으로 길들여지는 상징계로의 진입이란 인간이 고유한 존재적 가치를 포기하고 의미의 주체, 기표적 삶에 매몰된 이미지의 존재로 살게 됨을 의미한다.
이러한 작가의 작업세계를 미루어보면, 일탈자들은 이전 작업에 수없이 등장했던 오필리아와 겹쳐진다. 일탈의 순간은 감각이 깨어나는 순간이다. 일탈자는 베일로 눈을 가린 오필리아, 죽음의 연못으로부터 부활한 오필리아다. 그들은 돌처럼 굳어진 감각을 경계하면서 체제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또한 눈이 먼 오이디푸스 역시 눈에 보이는 현실 대신 원초적 감각, 인간 본연의 욕망을 찾는 존재이기도 하다. 작업에는 이성과 감성, 무의식과 욕망, 자아와 타자가 모두 겹쳐져 있다. 상상력이 더해진 그의 작품은 꽉 짜인 사회구조 속에서 무뎌진 우리의 원초적 감각과 창의성을 꼬집으며 아직 포획되지 않은 수많은 감각들을 찾아 나선다.

권여현, 낯선 숲의 일탈자들 Deviators in Heteroclite Forest 4O1A8912, 2021, Oil on canvas, 73 x 91cm

낯선 숲에서
권력에 희생되고 생략되어 소멸된 차이들이 저장된 곳, 이성보다 감각이 우선하는 장소, 일탈자들의 장소인 낯선 숲은 자연의 원시림과 바다로 이어지고 다시 인공적인 스키장으로 이어진다. 꿈의 생성과정은 그의 작업의 중요한 근거가 된다. 이를 통해 개인의 억눌리고 희생된 욕망과 감각이 그의 사유의 원천이 되는 인문학적 참조물과 함께 시공을 넘나드는 장면으로 표현된다. 이처럼 한 공간에 겹쳐진 여러 개의 사건이 접속하는 낯선 숲은 마치 인간이 다른 존재와 만나는 과정 속에서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 ‘배치’를 통해 끊임없이 자신의 차이를 발생시키는 것과 같다. ‘되기’를 하는 인간은 항상 유동적이다.(들뢰즈와 가타리) 낯선 마주침, 낯선 배치의 화면 역시 일탈자들의 무의식적 욕망처럼 유기체적 통일성을 허락하지 않는다. 인류의 통일된 지층은 존재하지 않듯이, 다양한 몸체에 의하여 구성된 문화의 지층들은 다양한 힘들이 서로 작용하는 복잡한 방식으로 형성된다. 미분화된 광경은 마치 유기체가 되기 이전의 문화의 몸을 파헤치려는 시도와도 같다.
더욱이 작가는 콜라주된 이미지들이 종국에 질서 잡히고 정리가 되고 구조화되면 다시 리좀의 나무줄기나 소용돌이 등으로 다시 헝클어뜨리기를 반복한다. 그리하여 구상이라는 현실의 층위 위에 잠재성을 도입하여 새로운 실재를 만들어 나간다. 궁금증은 이러한 일이 개념적 질서를 벗어나려는 노력, 혹은 마치 재현이라는 클리셰를 빠져 나오려는 예술가의 방편인 듯, 감각을 그리는 또 다른 창조적 방식은 아닌지, 그가 그리고 있는 것이 고정된 주체성과 상관없이 끊임없이 움직이는 세계 자체가 아닌지 하는 것들이다. 여기에 재미있는 이야기를 덤으로 얹어서 말이다.

작품의 구성뿐 아니라 표현 방식에서도 그러하다. 일탈자들의 우발성과 즉흥성은 표현 방식으로도 나타난다. 작가에 의하면 ‘사물에 깃든 기운생동이란… 작가의 역량이 간결하게 녹아 있을 때 혹은 그것이 사회적인 미적 요구에 부합하여 현대적인 조형성을 띨 때 관람객은 그 작품을 보고 살아 움직임을 느끼게 된다.’ 이에 견고한 배경이나 명확하게 구획했던 형태는 사라지면서 윤곽선이 흐려지고 대상은 특징적으로만 드러난다. 쌓아서 구축하는 색이 아닌 감각적으로 색을 구사하여 형태는 그저 그것에 따라오는 것으로만 간주하는 것이다. 여전히 구성은 치밀하되, 유화 안료를 마치 수채화처럼 얇고 투명하게 빠른 속도로 사용하여 회화적이고 감각적인 형태와 빛으로 물든 색채의 변주를 꾀하고, 작가는 이를 ‘감각의 드로잉’, ‘회화적 드로잉’이라고 부른다. 최근으로 갈수록 화면에는 빛이 보인다. 바탕과 가볍게 스치는 순간은 곧 일탈자의 순간과 동일한 방식으로 일어난다. 미끄러지며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가는 질료들의 속도, 그것은 앞서 얘기했듯이 또 다른 가능성과 사건을 생성하는 방식이다.

정리해보면, 의미와 조형에 있어서 동원된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존재의 문제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자 자신의 감각표출의 수단이다. 그것은 지속적인 자아 찾기를 통한 이성과 감성, 보편과 개별의 대립적 연관성의 메타포로 나타난다. 일탈자와 낯선 숲의 지향점이 있다면, 구조를 인식하여 의지로써 잠시나마 구조를 벗어나 인간성을 회복하고 자기의 본래성을 가지려는 노마드적 실천(니체), 혹은 탈영토화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는 리좀적 사고일 것이다. 나는 무엇이고 현실은 무엇이며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현실 인식은 결코 필연적이 아니다. 매트릭스에서 구현되는 개인의 유토피아의 실현 가능성을 꿈꾸며 작가 역시 일탈자로서 그리는 즐거움, 감각의 놀이를 즐기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낯선 숲은 끊임없이 요동치는 노마드의 장소이자 자신만의 신화, 현대의 신화를 자처하며 우리의 관습 너머 신선함을 선사할 것이다.

글│강주연 Gallery JJ Director

권여현, 낯선 숲의 일탈자들 Deviators in Heteroclite Forest 4O1A9565, 2021, Oil on canvas, 67 x 106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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