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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열 – The Path

2020.10.23 – 11.29
김창열

갤러리현대는 김창열의 개인전 《The Path(더 패스)》를 10월 23일부터 11월 29일까지 개최한다. 김창열의 작품을 ‘The Path’라는 주제로 한자리에 모아, 한국 추상미술과 동행한 갤러리현대의 반세기 역사를 기념하고, 동시에 그의 작품 세계를 새로운 관점에서 조명하기 위해 마련했다. 김창열은 영롱하게 빛나는 물방울과 동양의 철학과 정신이 담긴 천자문을 캔버스에 섬세하게 쓰고 그리며, 회화의 본질을 독창적으로 사유한 한국 추상미술의 거장이다. 갤러리현대는 1976년 프랑스 파리에서 활약 중인 김창열의 개인전을 개최하며 처음 인연을 맺었다. 전시를 계기로 파리에서 호평을 받은 그의 ‘물방울 회화’ 작업이 국내에 처음 소개됐고, 미술계 안팎으로 신선한 반향을 일으키며 작가의 인지도도 크게 올랐다. 이후 갤러리현대는 그의 개인전을 꾸준히 개최했으며, 1993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회고전과 2004년 파리 쥬드폼므미술관 초대전, 2016년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 설립 등의 대내외적 활동을 격려하고 지원했다.

《The Path(더 패스)》전은 갤러리현대와 김창열이 함께하는 열네 번째 개인전이자, 2013년 김창열의 화업 50주년을 기념해 마련한 개인전 이후 7년 만에 갤러리현대에서 열리는 개인전이다. 전시는 그의 작품 세계에서 물방울과 함께 거대한 맥을 형성하는 ‘문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문자는 캔버스 표면에 맺힌 듯 맑고 투명하게 그려진 물방울과 더불어 강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에게 문자는 이미지와 문자, 과정과 형식, 내용과 콘셉트, 동양과 서양, 추상과 구상의 세계를 연결하는 매우 중요한 미적 토대이지만, 이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물방울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진했다. 《The Path(더 패스)》전은 김창열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문자에 담긴 심오하고 원대한 진리의 세계관이 생명과 순수, 정화를 상징하는 물방울과 결합하여, 우리에게 ‘인간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있음을 역설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전시 타이틀 ‘The Path(더 패스)’는 동양 철학의 핵심인 ‘도리(道理)’를 함축하고 있으며, 평생 물방울을 그리고 문자를 쓰는 수행과 같은 창작을 이어간 김창열이 도달한 ‘진리 추구’의 삶과 태도를 은유한다.

《The Path(더 패스)》전에는 문자와 물방울이 만난 김창열의 대표작 30여 점이 전시된다. 물방울이 문자와 처음 만난 1975년 작품 <휘가로지>(1975)를 포함해, 한자의 획을 연상시키는 추상적 형상이 캔버스에 스민 듯 나타나는 1980년대 중반의 <회귀(Recurrence)> 연작, 천자문의 일부가 물방울과 따로 또 같이 화면에 공존하며 긴장관계를 구축하는 1980년대 말부터 2010년대까지의 <회귀> 연작 등을 감상할 수 있다. 출품작의 양상은 갤러리현대의 층별 전시장에 따라 ‘문자와 물방울의 만남’, ‘수양과 회귀’, ‘성찰과 확장’이라는 세 가지 주제로 심화된다. 1층 ‘문자와 물방울의 만남’에서 물방울이 문자 위로 자리를 옮기고, 한자의 기본 획을 도입하며 이미지와 문자의 해체를 시도한 작품을 선보인다. 지하 1층 ‘수양과 회귀’에서는 문자가 본격적으로 작품에 등장하며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는 양상을 살핀다. 2층 ‘성찰과 확장’에서는 동양 문화권의 전통적 미술 재료인 한지와 먹을 활용해 내면을 성찰하고 작품 세계를 확장한 작가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문자와 물방울과의 만남
“물방울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 나는 거칠거칠한 캔버스, 목판, 모래, 흙과 같이 즉각적으로 물질성을 보여주는 표면 위에서 직접 작업하곤 했다. 하지만, 화면이 커짐에 따라 캔버스는 물질성을 상실했다. 그 자리를 공허감이 대신했다.” – 김창열, 2003

1층 전시장의 주제는 ‘문자와 물방울의 만남’이다. 김창열은 초기 물방울 회화에서 물방울의 특징을 강조하는 빛의 반사 효과를 주요 조형 요소로 삼았다. 작가는 이러한 ‘물방울 효과’를 강조하기 위해 바탕칠을 하지 않은 거친 마대나 모래와 나무판 등 물질성이 두드러지는 재료를 사용했다. 그러나 화면이 커지면서 캔버스가 지닌 물질성은 상실됐고, 기존에 자주 사용한 캔버스나 모래는 바탕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는 물방울을 완벽하게 담아낼 ‘지지체’를 찾기 위해 제작 기법을 끊임없이 변주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물방울이 문자와 최초로 결합한 1975년작 <휘가로지>가 제작됐다. 프랑스 신문 ‘휘가로(Le Figaro)’ 1면에 수채 물감으로 물방울을 그린 이 작품을 통해 작가는 캔버스에 환영으로만 존재하던 물방울을 ‘현실 세계’의 장소에 새롭게 위치시킨다. 1980년대 초반 작가는 신문에 인쇄된 활자를 옮긴 것처럼 캔버스에 한자를 빼곡하게 적는 모색기를 거쳤고, 1980년대 중반에 이르러 <해체> 연작을 통해 온전한 글자가 ‘해체’되어 의미 없는 기본 획이나 캔버스에 스민 물감 자국과 같은 문자의 흔적들이 화면에 등장한다.

수양과 회귀
“한자는 끝없이 울리고 끝없이 펼쳐진다. 어린 시절 맨 처음 배운 글자이기 때문에 내게 감회가 깊은 천자문은 물방울의 동반자로서 서로를 받쳐주는 구실을 한다.” – 김창열, 1998

지하 전시장의 ‘수양과 회귀’에서는 문자가 물방울과 조우하는 <회귀> 연작의 다채로운 면모를 확인한다. 1980년대 후반부터 집중된 <회귀> 연작에서 마침내 문자가 물방울과 함께 작품의 주인공으로 부각된다. 김 화백은 1980년대 후반부터 천자문을 쓰거나 그리고, 문자의 주변에 물방울을 정교하게 배치해 그리는 <회귀> 연작을 제작했다. 김창열의 1990년대 작업 양상을 대표하는 <회귀> 연작은, “문자와 이미지의 대비를 넘어 음양의 철리와 같은 동양적 원천에로의 회귀”(이일)이자, “글자라는 기억의 장치가 물방울이라는 곧 사라져버릴 형상과의 미묘한 만남”(오광수)이며, “한문이라는 시각적 경험과 지성의 전통을, 현대적 기록법의 형태적 변수들로 변모”(필리프 시룰니크)한 작품으로 평가를 받는다. 작가가 작품에 옮긴 천자문은 우주와 자연, 인간 삶의 이치 등에 관한 동양사상의 정수를 담은 4자 2구로 된 125편의 고시이다. “하늘과 땅은 검고 누르며, 우주는 넓고 거치니”라는 뜻으로 풀이되는 천자문의 첫 두 구절 “천지현황, 우주홍황(天地玄黃, 宇宙洪荒)”은 우리가 사는 이 세계의 구성 원리를 드러내며, 무한한 우주적 상징 체계를 동양적인 관점에서 해석한다. <회귀>라는 연작의 제목처럼, 환갑이 넘은 김창열은 고향 평안남도 맹산에서 조부로부터 천자문을 배웠던 자신의 어린 시절로 ‘회귀’해, 물방울(이미지)과 천자문(문자)을 만나게 한다. 작가는 <회귀> 연작에서 날짜, 계절, 시간, 농사, 전쟁 등 문명의 근본과 세상의 이치가 담긴 천자문을 깨치던 배움의 원점으로 돌아가, 다시 유년의 깨끗한 마음으로 ‘참’을 추구하고, 창작을 통해 ‘진리’을 전달하며, 자연의 흐름을 따르겠다는 작가적 의지를 녹여냈다. 김창열의 작품에서 문자는 기계로 인쇄한 것처럼 단정하고 규격화된 해서체와 서예의 자유로운 운필과 회화적 요소가 강조되는 초서체로 등장한다. 전자는 물방울과 만나 문자와 이미지의 대립과 긴장을 강조한다면, 후자는 먹의 농도가 달라지며 화면에 그물망을 형성하듯 자유롭게 쓰여 알아볼 수 있는 대상이 아닌 물방울의 배경 역할로 강조된다. <회귀> 연작에서 새롭게 설정된 문자와 이미지의 관계는 물방울의 형상과 질감, 의미에도 깊은 영향을 미친다. 이전 작품의 물방울이 캔버스 뒤에서 앞으로 스며 나온 듯한 인상을 줬다면, <회귀> 연작 이후의 물방울은 캔버스 앞에 맺힌 영롱한 형태로 그려지는 구조적 변화를 보인다. 지하 전시장에 전시된 <회귀> 연작에서 이러한 시각적 특징이 확인된다. 캔버스의 천자문은 단정한 해서체로 작품 오른쪽 귀퉁이부터 순서대로 꼼꼼하게 적혀있고, 자간과 행간도 모두 균일하다. 한자 위에 무수한 물방울이 그려진다. 게다가 물방울이 놓인 부분은 한자의 색이 옅기 때문에 글자가 물에 녹아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한자가 작품 전체를 가득 채우기도 하고, 넓은 여백과 함께 화면 구석이나 주변에 한자가 자리 잡는다. 캔버스는 한자가 담긴 해석 가능한 일종의 텍스트가 되었고, 그 위에서 물방울은 자유롭게 표류한다. 김창열이 추구한 동양적 세계관이 확장되며, 물방울의 원초성과 투명성, 순간성도 강조되어 작품의 초현실적인 분위기도 배가된다. 또한 2000년대 이후 <회귀> 연작의 또 다른 변화인 다채로운 색감의 도입도 전시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성찰과 확장
“물방울을 그리는 것은 모든 사물을 투명하고 텅 빈 것으로 만들기 위해 용해하는 행동이다. 당신이 분노와 두려움을 몰아내고 자신을 비운다면, 당신은 평온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서양 사람인 당신은 당신의 자아를 개발하기를 원한다. 하지만 나는 나의 자아를 무화 시키기 위해 이런 방법들을 추구하고 있다.” – 김창열, 1988

2층 전시장 ‘성찰과 확장’에서는 작가가 198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 제작한 <회귀> 연작 중에서 먹과 한지를 소재로 한 작업을 만난다. 그는 이미지와 문자의 결합을 통한 동양적인 조형 공간의 합일을 이루어내기 위해 재료의 사용에도 연구를 거듭했다. 종이에 글자 쓰기를 연습하듯 한지를 캔버스에 부착하고 여기에 천자문을 반복적으로 쓰면서 문자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겹쳐 썼다. 김창열은 한지에 먹으로 선을 겹겹이 교차시켜 문자의 층을 만든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한자를 무수히 여러 겹 쌓은 작품은 문자의 층이 겹쳐도 색이 탁해지거나 어둡게 가라앉지 않는다. 또렷하게 그려진 지하 전시장의 <회귀> 연작과 비교해, 읽을 수 없을 정도로 겹쳐 쓴 천자문은 특정한 진리를 드러내는 도구가 아니라, 천자문(진리)을 넘어서는 무한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작가는 물방울과 천자문의 관계를 통해 작품을 마주한 관객을 문자 너머 진리의 세계로 초대하고 있다.

Recurrence NSI91001-91, 1991, Ink and oil on canvas, 197 × 333.3cm

갤러리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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