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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호 – 회화와 조각의 틈에 자리한 사군자

김광호 – 회화와 조각의 틈에 자리한 사군자

박영택 (경기대교수, 미술평론가)

김광호, 난 향기, 35x15x41cm, Steelx Natural Stone, 2016

김광호는 사군자 이미지를 차용해서 이를 조각으로 일으켜 세웠다. 종이에 담긴 사군자가 입체로 나와 공간에 자립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림에서 빠져나와 실제공간에 존재하는 사군자인 셈이다. 동시에 작가는 특정한 프레임을 암시하는 구조에 사군자와 항아리 등을 얹혀놓거나 이어 붙였다. 더러 자연석이 좌대처럼 부착되어 있다. 따라서 병풍이나 화첩에 담긴 그림이나 사방탁자나 서탁 위에 올려놓은 항아리들이 그대로 전시 공간 안에 재연되고 있거나 바위틈에서 자라는 난을 보고 있는 듯하다. 이미지가 본래 착시, 환영, 허구에 기반 하긴 하지만 이 작업은 그러한 시각적 유희를, 회화와 조각을 통해 다소 극대화하는 편이다. 아울러 작가의 작업은 선조로 이루어졌기에 빛이 표면에 닿으면 배경이나 벽과 바닥 등에 짙은 그림자를 고스란히 투영한다. 이 그림자는 그림자를 드리우게 한 대상과 불간분의 관계를 유지하며 대등한 차원에서 확고히 다가온다. 작품(대상)과 그로부터 불가피하게 형성된 그림자가 동시에 작동하기에 보는 이들은 이 둘을 차별 없이, 공평하게 대하게 된다. 작가의 이전 작업 역시 드리워진 그림자를 물질로, 입체로 일으켜 세웠다면 근작인 사군자 시리즈는 작품의 주변으로 선명하게 그림자를 떨어뜨리면서 이 둘의 공모관계, 불가분의 관계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김광호, 호리병과 국화 매화, Steel Stone, 15x6x34cm, 14x10x32cm, 2019

그림자는 본래 허상이고 그것 자체로 의미를 부여받지는 못했다. 그림자는 부수적인 존재이거나 허상 혹은 그림자를 드리우게 한 주체, 대상에 비해 열등한 존재로 폄하되었다면 김광호의 작업은 조각에서 별다른 의미를 부여 받지 못한 그림자란 존재를 의미 있는 것으로 대한다. 선적인 조각이기에 그로인해 드리워지는 그림자는 실체와 1:1의 관계를 지닌다. 대상과 그림자가 정확하게 일치하는 셈이다. 또한 이는 이분법적 우열의 관계를 수평으로 펴내는 작업이자 양과 음, 밝음(빛)과 어둠의 관계를 상대적 관점에서 허용한다. 동시에 조각에서 빛이란 요소는 대부분 물질의 표면으로 쏟아지는 밝기이거나 그것 자체를 환하게 드러내는, 다소 소극적인 차원에 머물렀다면 김광호의 작업은 그림자를 의도적으로 부각시키고 그림자를 지게 한 대상과 함께 그림자를 동일선상에서 바라보게 해준다. 물질 덩어리와 회화적 요소가 상호 침투하는 편이다.

김광호, 참죽, 44x12x36cm, Steel, Natural Stone, 2018

본래 조각이란 특정 공간에 구체적인 물질을 제시하는 방식이다. 그것은 삶의 실질적인 공간, 장소에 놓이는 일이자 다른 사물들과 대등한 차원에서 ‘부정할 수 없는 물질’로 존재한다. 조각은 회화와 달리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이고 물질이다. 회화가 눈속임, 허상에 의지한다면 조각은 보다 명백한 사실로 자리한다. 조각을 이루는 물질의 피부에 환영적 요소가 개입되는 것이 전통적 조각이었다면 모더니즘조각은 물질 그 자체의 물성을 그대로 드러내거나 제시하는 차원으로 추구되었음도 익히 아는 사실이다. 그리고 조각은 공간에 놓인 물질이기에 그것이 놓이는 순간 특정 공간을 채우고 있는 공기를 밀어내는 편이다. 보이지 않는, 그러나 공간을 채우고 있는 비가시적인 요소들을 밀쳐내는 조각은 공간을 확고히 점유하는 형식이다. 그러나 김광호는 선적인 조각, 둔중하고 부피를 지닌 물질이 아닌 선조로 이루어져 있어서 조각에서의 물성이란 측면이 상당히 약화되어 있다. 오로지 선으로만 존재하는 조각이라 그것은 회화에 근접하고 있다. 사실 회화가 표면에서 존재한다면 조각은 공간에 서식한다. 조각은 물질로 공간을 채우는 것이다. 그러나 김광호의 조각은 피부로 존재하며 선으로 구성된다. 가벼운 조각이자 공간에 떠 있는 듯하다. 선으로만 이루어져 있고 납작하기에 조각의 성격, 물질의 힘은 그만큼 약화되어 있다. 전적으로 회화적 성격을 지닌 이 선조작업은 블랙으로, 그림자 같은 형태/색감으로 절여져있다. 통상 조각이 주어진 재료의 본래 색채에 의존한다면 이 조각은 적극적인 검은 색을 취하면서 그림/그림자처럼 자리한다. 실재를 강하게 연상시키는 환영적 조각으로 가늘고 얇은 철선들이 허공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 벽이나 캔버스의 피부에 붙어나가는 게 아니라 공중 부양하듯이 떠 있는 선이다. 선은 회화의 영역이다. 반면 김광호는 회화적 요소인 선을 입체로 구현하면서 특정 이미지에 기생하는 조각을 만들고 있다. 그것은 평면의 이미지에 붙어 나가면서 그 피부를 재현하는 일이자 피부/표면에서만 존재하는 회화를 순간 공간 속의 입체로 제시하는 반전을 보여준다. 여기서 회화와 조각의 경계가 슬쩍 허물어진다. 더구나 철저히 환영이미지에 속하는 그림자까지 서로 연루되면서 회화, 조각, 그림자가 촘촘히 맞물려 들어가는 작업을 시도한다.

김광호, 4월 매화, Steel, Natural Stone, 280×150×310cm, 2020

회화가 표면에서 존재한다면 조각은 공간에 서식한다. 조각은 물질로 공간을 채우는 것이자 3차원의 공간에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이다. 회화가 평면이란 공간에 서식한다면 조각은 공간에 존재한다. 실재하는 현실계에 실감나게 자리하고 있는 조각은 그래서 회화에 비해 그 리얼리티나 현존성이 강하고 크다. 아울러 시각에만 응대하기 보다는 촉각과 물리적인 접촉을 가능하게 하는 육체성을 지녔다. 그것은 환영에 머물지 않고 몸의 총체적인 반응과 마주한다. 공간에‘사건’을 일으키고 그 주변으로 사람의 몸을 불러들이는 것이 또한 조각이고 조각의 물질성이다. 아울러 조각은 덩어리이자 동시에 표면을 거느리고 있고 관자의 몸을 참여시키고 그 감각 전체에 관여하는 것으로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받는 영역이다.

김광호, 겨울바람, 73x13x103cm, Steel, Natural Stone, 2019

평면으로, 선으로 이루어진 김광호의 조각은 회화처럼 정면에서 시선을 받는다. 동시에 배경인 벽에 그림자를 떨어뜨리면서 주변 공간을 작품의 요소로 끌어안는다. 입체적인 프레임 구조와 납작한 평면의 조각, 주변으로 드리워진 그림자 등은 낯선 환영을 자아내면서 우리가 보고 있는 대상과 공간의 관계를 새삼 재인식하게 해주는 편이다.

김광호, 국 인고, 22x7x35cm, Steel Natural Stone, 2020

물질이자 선이고 조각이자 회화에 유사하며 실제와 허상을 동시에 탑재하고 있는 김광호의 작업에서 프레임, 좌대 또한 불가피한 작품의 조건으로 작동한다. 자연석이 그대로 좌대가 되어 그 위로 선조로 이루어진 사군자가 자리하면서 작품의 일부로 동화되어 있다. 높이를 지닌 좌대가 아니라 바닥으로 내려앉은 좌대인 동시에 좌대 자체가 작품의 일부로 편입되어 있다. 그러면서 실제 돌 틈에서 자라는 난초나 자연석 위에 놓인 작은 항아리(주병) 혹은 액틀에 끼어 있는 그림을 실제적으로 연상시킨다. 납작한 평면의 선으로만 존재하는 사군자 이미지나 항아리 형상은 각진 프레임 안에 존재한다. 이는 프레임 안에 놓인 회화의 성격을 강조하는 동시에 그 프레임에 갇힌 이미지를 다시 입체로 제시한다. 평면과 입체가 가는 프레임 선을 경계로 자유로이 넘나드는 것이다.

김광호, 달빛국화, 60x11x93cm, Steel, Natural stone, 2020

작가는 전시장이란 공간에 동북아시아의 전통문화와 사유체계의 대표적인 도상인 사군자를 새삼 주목시킨다. 우리의 경우 유교가 들어온 이래 사군자는 사대부 지식인들의 자화상이었다. 사군자란 매·난·국·죽의 생태를 정확히 관찰하여 양식화시키고 단순화한 것을 말한다. 이 사군자 그림은 동북아시아 지식인들의 그림 가운데 고도의 상징성을 지닌 예술로서 그 안에는 성리학적 우주관, 세계관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당시 지식인들의 최고의 덕목으로 여겼던 충절을 바탕 삼으면서 매화를 인자함(仁)에, 국화를 의로움(義)에 그리고 난초를 예(禮)로, 대나무를 슬기로움(智)에 자리 매김 했는데 이 모두가 철학의 깊이와 생활의 진리를 거기에 두고 싶어 했던 지식인들의 희망이 남긴 상징의 체계화이다. 그러니까 예술을 앞세워 자연과 인간의 일체화를 꾀한 것은 동북아시아 예술의 남다른 부분이었던 것이다. 사군자란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의 네 종류 식물을 소재로 하여 그리는 그림인데 모두 추위를 견디며 꽃을 피우거나 푸름을 잃지 않는 기개를 자랑하는 것들이다. 이른 봄의 추위를 무릅쓰고 제일 먼저 꽃을 피우는 매화, 깊은 산중에서도 은은한 향기를 멀리까지 퍼뜨리는 난초, 늦가을 첫추위를 이겨내고 꽃을 피워내는 국화, 모든 식물이 잎을 떨군 겨울에도 푸른 잎을 계속 유지하는 대나무가 그것이다. 군자의 기상을 드러내고 세파에 흔들리지 않고 절개를 지키며 고매한 인품으로 주변을 맑고 향기롭게 하는 사람이 되고자 열망했던 문인사대부계급들이 지향했던 세계관이 사군자라는 도상에 기탁된 것이다. 그러나 문인들의 사군자는 20세기 들어와 급속히 와해되었다. 군자를 지향하던 사대부계급이 붕괴되었고 유교적 이념, 성리학적 세계관도 망실되었기 때문이다. 일찍이 윤희순은 현대에 이르러 미의식이 바뀜에 따라 사군자 역시 그 단순한 필치와 군자의 의취(義趣)만으로는 예술이 될 수 없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그 사군자로 표상되는 전통시대의 세계관, 유교적 가치이념이나 사대부들의 삶의 방식은 오늘날도 여전히 유의미한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환생시키고 재해석해내느냐가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단지 도상의 차용에만 머물 수는 없다는 얘기다.

김광호의 작업은 철선들을 이용해 이를 의사 사군자로 환생시켰다. 그림이자 동시에 조각이기도 하다. 작가는 죽어 있는 것, 생명이 없는 차가운 철에 온기와 유연함을 불어넣어 싱싱한 식물성의 삶으로 환생시켰다. 작가의 손이 철에 생명을 불어넣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것은 죽은 사물의 세계를 유기체 화하려는 식물적 상상력이기도 하다. 아울러 사군자가 표상 하는 전통적인 유교의 이념과 명분을 떠올려주거나 또는 전통을 소환해내는 작업이자 회화와 조각의 경계를 부단히 흔드는 한편 대상과 그림자의 관계 역시 흥미롭게 다루고 있다. 이 점이 김광호 작업의 유의미한 부분이다.

김광호, 내 그림자 끝나는 곳 고향, Steel, Natural Stone, 21x13x6cm, 2020

중앙갤러리
대구시 중구 봉산문화길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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