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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배의 므네모시네 아틀라스를 위해; 정신적 매체의 재창안과 역사적 맥락

임근준 _ 미술·디자인 이론/역사 연구자

0. 현대적 미술사 연구방법론의 성립에 기여한 아비 바르부르크(Aby Warburg, 1866-1926)는, 르네상스 미술의 도상(icon)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기억술-지도(Mnemosyne-Atlas)>(1924-1929)라는 독특한 방법을 창안했다. 이는, 역사적으로 연관되는 각종 작품의 사진 프린트를 한 데 모아 다이어그램처럼 배치함으로써, 그 상관관계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만든, 이미지의 데이터베이스였다. “고대의 사후(afterlife of antiquity)”를 추적하는 것을 전제로, 그가 도상간의 역학 관계를 제시하는 지도를 그리기 시작한 해는 1924년. 하지만 1929년, 아비 바르부르크가 세상을 뜨면서, <기억술-지도>는 미완의 과제로 남고 말았다.

LEE BAE – Gallery2-Joongsun Nongwon(Jeju Island) Installation view

그리스 신화에서 므네모시네(Μνημοσύνη)는 기억의 여신으로, 지하 세계 하데스에서 기억의 연못을 관장한다. (므네모시네의 물은, 레테(Lethe) 강의 물과 함께, 기억과 망각의 한 쌍을 이룬다.) 므네모시네는 제우스와 9일 밤낮을 동침해, 각각 서사시, 역사, 서정시, 희극과 전원시, 비극, 합창가무, 독창, 찬가, 천문을 관장하는 9명의 무사이(뮤즈)들을 낳았으니, 예술과 학문의 기초적 성립은, 기억과 기억을 통한 대물림에 달렸다는 말이 된다.

아비 바르부르크는 <기억술-지도>를 항구적 갱신을 요하는 탐구용 템플릿으로 여겼던 듯하다. 따라서, 후대의 연구자들 누구도 그를 완성하는 작업에 나서지 않았다. 하지만, 므네모시네가 낳은 뮤즈들의 현대판 신전, 즉 뮤지엄들에서 <기억술-지도>의 추동은 계승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박물관/미술관에서 큐레이터들이 갱신-확장되는 소장선을 바탕으로 역사관을 구현하고 또 해체-재구성하는 모습은, <기억술-지도>의 작동 방식의 크게 다르지 않다.

1. 대한민국 경상북도 청도에서 태어난 이배(Lee Bae, b.1956, 과거 국내 활동명: 이영배[李英培])는, 유년기의 기억과 동아시아의 전통과 현대미술의 역사를 바탕으로, ‘정신성의 매체’를 재창안해낸 현대미술가다. 그의 작업 세계는 회화, 조각, 설치 등 관습적 카테고리로 고찰되기도 하지만, 핵심은 수행적 실천(performative praxis)을 통해 ‘매체적 확산과 환원의 순환 주기에서 벗어나는 새로운 탈출구’로 기능하는 열린 질문(open question)을 제시하는데 있다. 그의 작업들은, 20세기 모더니즘과 그 이후의 역사적 전개에 반향하는 포스트-형식주의의 현대미술이기도 하지만, 현대미술의 제도적 존재 방식과 양태에 의문을 제기하는 판단 유예의 오브제가 되기도 하고, 궁극적으로는 현대성과 동시대성을 초극하는 새로운 예술의 시공을 지향한다.

2. 1982년 홍익대학교 사범대학 미술교육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 관훈미술관 별관(서울)에서 데뷔 개인전을 치를 때 신인 작가 이배는, 조선의 민화 등에서 볼 수 있는 전통 미의식을 현대적 방법론을 통해 탐구-정련하는 것을 전제로, 한지 위에 아크릴 채색과 드로잉을 혼합한 풍경화 연작 15점을 제시했다. 현대화한 전통의 색과 형으로 구성된 화면에선, 한국인의 미적 이상을 새로운 각도에서 포착해내겠다는 야심이 빛을 발했다고 전한다.

3. 이후 이배의 회화 작업은, 얼굴이나 인체 형상을 필선으로 반복하고 중첩함으로써, 해체된 추상표현주의로 뵈기도 하는, 수행적 궤적의 축적으로 나아갔다. 작가의 웹페이지에 “유화(Oil Painting)” 항목으로 정리돼 있는 1986-1990년 사이의 <무제> 연작들이 그 일부로, 색채에선 탱화나 무화 전통으로부터의 영향을, 형상을 해체하는 방식이나 기교를 부리지 않은 소박한 필선에선 장 뒤뷔페(Jean Dubuffet, 1901-1985)의 영향을 유추할 수 있기도 하다.

4. 1989년 프랑스 파리로 이주한 이배는, 이러저러한 모색기를 거치다가 1992-1993년부터 숯을 활용한 회화 작업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캔버스에 백색의 그라운드를 바른 후 숯을 송진으로 부착하고 사포로 갈아낸 작업들을 통해, 작가는 신체를 풍경으로서 탐구하던 문제의식을 이어나갔다. (비고: 1989-1990년부터 목탄대신 값싼 숯을 사용해 드로잉을 제작하기 시작한 것이, 1992-1993년 숯을 화면에 고착하고 갈아내는 저부조적 회화 작업으로 이어졌다.) 현대한국화의 연장선에서 아크릴 물감 등 치환과 확산의 매체로 다채색을 구사하던 그가, 숯을 통해 환원과 수렴의 길로 나가가는 순간이었다. (비고: 1997년에 등장해 오늘날까지 지속하고 있는 추상적 흑백 구성의 <풍경(Landscape)>연작(경우에 따라선, “Paysage”로 표기되기도 했다)은, 1992년에 제작된 <몸(Body)>[경우에 따라선, 캔버스를 세워 제시하며 <체질량(Body Mass)>라는 제목으로 달리 소개되기도 했다]에서 파생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배, Issu du feu ch-70, 2003, Charcoal on canvas, 170X260cm

5. 하지만, 초기의 숯 작업들은 치환과 환원의 논리를 따랐을 뿐으로, 아직 정신성의 매체로 온전히 재창안 혹은 재발명된 것은 아니었다. 이배가 숯을 정신성의 매체로 재정의해낸 때는 1999년. <불에서 나온(Issu du feu)> 연작(평면)을 본격화하면서부터다. 숯을 화면 위에 짜 맞추고 패널에 부착한 뒤, 아라비아 고무액을 도포하고 사포로 연마해 새로운 층위(échelle)를 발굴하는, 발명가적/장인적 작업 과정을 통해, 작가는 숯의 검은 빛으로부터 다채로운 색을 찾아냈다. (비고: <불에서 나온(Issu du feu)>의 이름 아래 몽골의 물주머니를 연상케 하는 형태의 숯 조각을 제작한 해는 1999년, 같은 제목 아래 가공되지 않은 숯덩어리들을 화물용 고무 밴드로 묶어놓은 대형 조각 설치 작업을 시작한 해는 2000년이었다.)

이때부터 이배의 작업은, 1. 구미 전후 모더니즘과 형식주의 내부로의 돌진도, 외부로의 탈주도 가능케 하는, 2. 또한 수묵 전통과 그 현대화의 역사 내부로의 침투도, 외부로의 이행이나 탈거도 가능케 하는, 고쳐 말해, 먹빛으로 구현돼온, 동양 정신의 뿌리로 이어지는 역사적 소실점들을 향한 질주도, 수묵 정신과 일획론의 신화에서 벗어나는 동양주의 해체로의 도약도 가능케 하는, 3. 더불어, ‘구수한 큰 맛’으로 대표되는 조선미론/한국미론의 원형을 지향하는 내부로의 수렴도, 탈식민 한국의 전통 강박에서 벗어나 인류 보편의 가치를 창출하는 ‘내부가-되는-외부’로의 약진도 가능케 하는, 판단 유예의 시각장(visual field of suspended judgment)을 형성하게 됐다.

이러한 포스트-미디어의 재창안은, 네 가지 전례와 연결 지점을 공유한다 : 첫째, 이브 클랭(Yves Klein, 1928-1962)이 1960년 5월 “인터내셔널 클랭 블루(IKB: International Kein Blue)”를 발명해 추상미술의 논리의 심화와 비물질적 세계로의 도약 모두를 성립시켰던 일. 둘째, 인간의 시간을 대변하는 녹슨 철판과 자연의 시간을 대변하는 돌을 대치시켜놓은 이우환(李禹煥, Lee Ufan, b.1936)이, 1977년부터 양의성(兩義性, ambivalence)의 논리를 통해 내부로의 비약과 외부로의 비약 모두를 가능케 하는 ‘인식론적 탈출구’로서의 “관계항(Relatum)”을 성립시켰던 일. 셋째, 데이비드 내시(David Nash, b.1945)가 1988-1989년 장소 특정적 목조각에 불을 먹여 부분적/전체적 탄화(charring)를 거친 다채로운 숯의 조각(자연계의 환원에 부합하는) <탄화된 아홉 계단(Nine Charred Steps)>을 구현했던 일, 넷째, 1989년 박사 과정에 입학한 무라카미 다카시(村上隆, Takashi Murakami, b.1962)가 이브 클랭의 문제의식에 화답하며 니홍가(日本畵)의 방법으로 네 폭의 패널에 청색 모노크롬 화면을 구현해놓고, ‘니홍가의 동시대화’와 ‘동시대화를 통한 니홍가의 죽음’을 도모했던 일. (무라카미 다카시, <색상들 1(Colors 1)>, 1989년, 화지에 라피스라줄리와 석채, 네 폭의 패널, 각각 300×180×5.4cm)

6. 1999년 이래의 <불에서 나온(Issu du feu)> 연작을 통해, 수묵을 대치하는 동시에 그 정수를 명료화해내는 포스트-미디어를 재창안해낸 작가는, 2004년 다시 한 번 새로운 미디어를 발명해냈다. <아크릴 미디엄(Acrylic Medium)> 연작은, 묵림회(墨林會, 1960-1964)가 제기했던 신조적(信條的, creedal) 수묵추상의 문제의식에 대한 기호학적 화답처럼 뵈기도 한다.

제작 과정은 다음과 같다: 캔버스에 점, 선, 필획을 반복해 만든 기초적 형상 등을 확대 배치하고, 숯가루와 아크릴 미디엄으로 제작한 먹물로 채색한 뒤, 반투명 아크릴 미디엄을 도포해 건조시키고, 다시 그 위에 본디 그려 넣었던 것과 동일한 형상을 그려 넣음으로써, 이중의 기호학적 환영을 구현한다.

한데 흥미롭게도, 2019년 LA카운티미술관에서 열린 <선을 넘어서: 한국의 서예(Beyond Line: The Art of Korean Writing)>전을 보고 감명을 받은 작가는, 2020년 서법/필법 추상에 도전했다. 숯가루를 물에 개 먹물을 만든 뒤, 붓에 적셔 종이에 궤적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추상적 필획을 그려 넣었다. 연작의 제목은 <붓질(Brush stroke)>이다.

이 배, Drawing-86, 2020, Charcoal ink on paper, 162X130cm

7. 한국화/동양화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동시대 수묵 정신의 정수에 부합하는 길을 닦는데 성공한 작가는, 이제 각 연작 사이의 관계를 재설정해야 하는 결정적 변신의 단계에 서 있다. 미디어의 재창안을 동반하는 창작 방법론을 수립하고, 각 연작을 발전시켜오는 사이, 작업 세계의 자율성 심화는, 각 연작 사이의 역학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작가는 이에 어떻게 화답할 것인가? (비고: 종종 작가의 자율성은, 작업의 자율성과 상충하고, 작업의 자율성 심화는, 작가의 자율성을 새로운 단계 혹은 차원으로 이끈다.)

8. 이배의 작업 세계 전반을 재조명하고 탐구하는 과정에서, 규명해야 할 지점도 있다. 그의 작업을 지배하는 역사적 정체성은, 추상 이후의 추상, 즉 이미지 귀환의 시대에 구현된 메타-추상이라는 흐름에 속한다. 방법론적으로는 비미술적 재료로의 확장-치환과 매체적 전유(appropriation)의 실험에 속한다. 하지만, 동시대미술의 역사 속에서, 먹이 아닌 어떤 재료로 수묵전통의 세계를 재창안해낸 경우는, 차이궈창(Cai Guo Qiang)과 이배, 둘뿐이다. (비고: 부분적으로, 먹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먹을 대치-치환한 경우는 리커란 이래, 수많은 사례가 존재해왔지만, 수묵전통의 세계 자체를 재창안/재정의하는 일에 도전한 경우는, 많지 않았다.) 그런데, 이배의 작업이, 재창안된 매체를 통해 회화, 조각적 설치, 수행적 작업 등의 양태에 부합하는 작업들을 유기적으로 전개해온 경우라는 사실에 주목하면, 줄무늬를 통해 제도 비평적 작업에서 관계미학적 작업에 이르는 시대적 요청에 적절히 적응해온 다니엘 뷔렌이나, 픽셀을 통해 포스트-미니멀리즘에서 관계미학에 이르는 여러 종류의 과제에 대응해온 홍승혜의 경우와 비교해보게 된다.

이배, Landscape ch-171, 2003, Charcoal on canvas, 73x92cm

9. 암흑물질(dark matter, matière noire)로 유비되는, 이배의 재창안된 숯의 먹은, 그림이 되고, 조각이 되고, 시간이 되고 공간이 되며, 한계를 뛰어넘는 관문이 된다. 시간의 조각들과 공간의 그림들이 다시 새로운 접면으로 조우하게 되면, 비로소 과학기술 시대의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를 새로이 조망하고 성찰하는 메타-시점 또한 도출되리라 기대한다. 이배의 암흑물질은, 더 나은 미래를 비춰보는, 거울이자 구슬이자 망원경이자 레이더가 된다. 새로운 창조의 힘과 질서를 배태하는, 암굴이자 음예의 신전이자 묵양청음(墨陽靑陰)의 도시가 된다.

이배 작가

1) 동아일보 1982년 10월 16일자 단신 기사에는 “두 번째 개인전”으로 소개됐다.
2) 1970년대 후반에서 1985년 광복 40주년(의 한국근현대사 재조명)에 이르는 과정에서 ‘민족 문화 재발견 붐’이 일었더랬다.
1957-1965년 시기의 고색추상 운동이, 한반도 과거 유물과 유적이나 향토에서 막연히 고대의 원형을 찾는 수준이었다면, 1970년대 후반부터는 귀족적 서화 골동 취향에서 벗어나, ‘민중 미학적 원형을 되살려 현실 사회를 비평하는 전복성을 발현시키는 길’로 나아갔다.
1. <한국미술 5000년>전의 성과와 2. 한일 교류를 통한 야나기 무네요시 민예론의 재발견, 3. <뿌리 깊은 나무>를 통한 한창기식 세계관의 유포, 이렇게 크게 세 가지가 새로운 민중적 민족 전통 재발견/재해석 흐름의 태동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한 역사적 흐름 속에서 한국화가 황창배(1947-2001)는, 매체적 확장과 민화적 표현의 수용 등 통해 한국화의 동시대화를 추구했다.
3) ‘포스트-미디엄’이란 기술적 변동에 의해 전통적인 미학적 매체가 무효화된 상황에서 어떤 식으로든 미학적 미디어로 재맥락화되(려)는 매체들을 통칭한다. ‘포스트-미디엄의 조건,’ 혹은 ‘포스트-미디엄의 상황’을 비평적으로 점검하는 것이 수사의 목표이므로, 특정한 매체만을 지칭하는 일은 드물다.
프랑스의 철학자 피에르-펠릭스 가타리(Pierre-Felix Guattari)가 1992년 『르 몽드 디플로마티크』에 “사회적 실천의 재구성을 위하여”라는 글을 기고했는데,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이 원고가 ‘포스트-미디엄’이라는 표현의 초출지다. 유고에서 그는 “현재 미디어의 위기와 포스트-미디어 시대의 도래는 보다 심층적인 위기의 징후들이다(The current crisis of the media and the opening up of a post-media era are the symptoms of a much more profound crisis)”라고 적었다.
이후 미술사학자 로절린드 크라우스를 위시한 이론가들이 각기 다른 비평적 지점에서 ‘포스트-미디엄’을 키워드로 당대 미디어의 상황을 논하기 시작했고, (20)00년대에 걸쳐 ‘포스트-미디엄’ 담론이라 부를 만한 이론적 지형이 형성됐다.
크라우스는 1999년에 가진 월터 뉴라스 기념 특강 “북해로의 항해: 포스트-미디엄 조건 시대의 예술(A Voyage on the North Sea: Art in the Age of the Post-Medium Condition)”에서 ‘포스트-미디엄의 조건(the post-medium condition)’이라는 수사를 전면에 내세운 채 미디엄의 변화된 지형을 이야기했고(강연록에 바탕을 둔 팸플릿이 실제로 출간된 때는 2000년 1월), 그로써 올드미디어아트 VS 뉴미디어아트의 소모적 구도에서 벗어나 미적 미디어의 재창안이 가지는 의의를 규명하고 담론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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